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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행복한 가정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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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 (엡 6:1-4)


먼저 이 시간 아름다운 영상을 하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 아이가 장애를 딛고 이렇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을까요?

한 중학교 윤리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효’에 대한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묘안을 짜냈습니다. 부모님 칭찬하기.
부모님을 칭찬하다니? 수행평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해도 듣기에 따라서는 맹랑한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프로그램은 ‘작은’ 성공을 거뒀고 그 내용 일부가 ‘엄마, 힘들 땐 울어도 괜찮아’라는 책으로 묶여졌습니다. 비록 수행평가를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부모님 칭찬하기’를 통해 변화된 학생들과 학부모, 가족들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부모님을 칭찬하면서 느꼈습니다. 부모님도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저는 그동안 잊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시는 부모님을 어쩌면 저는 요술방망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의 고백 속에는 잊고 있었던 가족의 소중함, 사랑, 부모님에 대한 깊은 애정이 드러나 있습니다. 
많은 상담가는 상처를 주고받기 쉬운 사람이 바로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가족의 더할 나위없는 귀염둥이였던 사람은 성공자의 기분을 일생동안 가지고 살며 그 성공에 대한 자신감은 그를 자주 성공으로 이끈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족이 어떤 긍정적인 말과 사랑을 베푸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 가족 일원의 인격은 물론 행불행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자세, 자녀에 대한 부모의 교육에 대해 권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정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달’ 5월. 그러나 오늘도 깨진 가정 속에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거나 가족이라는 이름만 있을 뿐 이미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에 아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애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칭찬하기란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이제 칭찬을 통해 무너진 가정을 회복하고 사랑을 회복하길 바랍니다.

유대인의 탈무드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세상에 보내서 가장 아름다운 것 세 가지를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세상을 두루 다니다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 세 가지를 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①아름다운 꽃 ②어린 아기의 웃음 ③부모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세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왔을 적에는 세월이 너무 오래 걸려서 ①꽃은 이미 시들어 추하게 되었고 ②어린 아기는 자라서 아름답지 않게 되었으며 ③단지 부모님의 사랑만은 여전히 아름답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아래서 부모님의 사랑만큼이나 아름답고 부모님의 은혜만큼이나 위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는 부모와 자식 사이입니다. 부부간의 사이도 가깝고 형제간의 사이도 가깝지만 그보다 더 진하고 어떤 경우에도 떼놓을 수 없는 사이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가장 정다운 이름은 어머니와 아버지 이름입니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라는 이름은 더 정답기 그지없는 이름입니다.

“어머니! 엄마!”
어머니라는 이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떤 아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엄마” 입니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서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르는 말도 “엄마”입니다. 길을 가다가 넘어졌을 때도 부르는 이름은 “엄마”, 몸이 아파 신음할 때도 부르는 이름은 “엄마”입니다. 
시집간 딸이 친정에 오면서 제일 먼저 부르는 말도 “엄마”요, 나이가 늙었어도, 괴롭고 외로울 때 찾은 이름도 “어머니”입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정다운 이름은 없습니다. “어머니!” 
이 얼마나 정다운 이름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왜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인줄 아세요? 

그것은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를 낳아주신 분입니다. 나를 기르시기 위하여 온갖 수고를 다하신 분입니다. 나를 가르치기 위하여 헐벗으신 분입니다. 나를 위하여 땀과 눈물을 흘리신 분이요, 생명도 아깝다고 여기지 아니하신 분입니다.
참으로 어머니 은혜는 너무나 크고 위대합니다. 그래서 한 현인은 어머니의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낳기까지 서 말 서 되의 피를 흘려주신 분이요, 낳고서 기르는데 여덟 섬의 젖을 먹여 주신 분이다. 그 분은 몸의 진기를 뽑아서 길러 주셨고 온갖 더러운 것을 씻어 주셨다. 허리가 물도록 업어 주셨고 병들어 누웠을 때도 밤새워 간호해 주신 분이다. 

나를 가르치기 위하여 못 잡수시고 나를 잘 입히기 위해 헌옷을 마다 아니하신 분이시다. 착한 사람 되라고, 귀한 인물 되라고 눈물 흘려 항상 기도해주신 분이시다. 
그의 품은 세상 파도에 지친 아들을 영접하기 위한 아늑한 포구요, 바람에 시달린 어린 갈매기가 날아가서 쉬는 피난처이시다. 실망한 자녀를 격려해 주는 안식처요, 뜨거운 이마를 식혀주는 약손이며 배고플 때 먹을 것 주시고 필요할 때 용돈 주시는 은행이시라."
이렇게 어머니 은혜는 참으로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양주동씨는 어머니 은혜를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시이지만요.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잃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엔 주름이 가득
땅위에 그무엇이 높다하리요.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오늘은 모든 교회들이 어버이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어버이 주일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인간 역사에 있어서 부모님보다 귀한 존재가 없기에 이 날을 제정하여 순간 순간 잊어버리는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에 깊은 감사와 존경과 은혜에 보답토록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군사부(君師父)일체라는 말이 있어서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다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공통된 인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러한 권위와 도덕과 윤리가 땅에 곤두박질되어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도 없어지고, 제자가 스승을 폭행하고, 심지어는 스승의 머리까지 깎는 비정한 일들이 대학가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부모가 자녀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비위를 맞추며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 비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것으로 말세의 특징 중의 하나가 부모를 거역하는 일입니다(딤후3:1-2).

오늘날 사회구조가 도시화, 산업화가 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이 바뀌고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생활양식으로 인해 사회의 흐름이 역류되어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노인들은 사회 구석으로 밀려나는 괴리 현상과 함께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는 풍토가 되었습니다.
물론 부모나 자녀가 서로 이해를 달리하고, 세대 간의 갈등이 있고, 가치관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며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의 로마인의 가정은 아버지가 가족들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전제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혹독한 벌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이거나 내다 버릴 수 있는 권리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인격적이고, 몰인정한 로마 사회구조 속에서도 바울은 부모와 자녀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어떠한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언젠가 “효도란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한 조사에 응답한 내용의 60퍼센트를 차지한 답변이 “효도란 부모의 속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요즘 세태에서 생각하는 효도입니다.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것이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불과 6.2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모에 대해서 속이나 썩히지 않고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정도로밖에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님의 수고와 희생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처럼 의학이 발달했어도 아이를 낳다가 죽는 사람이 혹간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습니다. 아니 아이를 낳기까지 10달 동안의 어머니의 수고는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아파도 아이가 잘못될까봐 약조차 쓰지 못합니다. 먹고 싶고 마시고 싶다고 해서 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된다 싶으면 삼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다가 입덧을 할 때의 고통은 정말 끔찍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뱃속에 있을 때가 편했다는 말들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를 낳고 난 다음부터는 그 아이를 바로 키우기 위해서 때로는 잠도 자지 못하고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 자기의 꿈도 다 내려놓는 것이 어머니가 아니겠습니까?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거의 탈진하기에 이르기까지도 아이 곁을 지키는 것이 어머니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 온갖 사랑의 수고를 다하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조금 섭섭한 일이 있다고 해서 우리 엄마 맞느냐고 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나한테 해 준 것이 뭐 있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나 오늘의 우리는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서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하고 그 수고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꼭 필요한 분이시라는 것을 언제나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존재의 가치, 그분의 능력을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 부모를 공경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루 세 번씩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어머니, 아버님은 우리 집에 꼭 필요하신 분입니다. 꼭 계셔야 합니다." 라고 말씀드려 보십시오. 다른 무엇보다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 힘없다고 아들집에서도 싫어하는 눈치고, 딸집에 가도 싫어하는 눈치를 보일 때 부모님들은 자기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서러워지는 것입니다. 꼭 무엇을 해드려서가 아니라, ‘부모님은 우리 집에 꼭 필요합니다’라는 한마디에 존재 가치와 삶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해 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말씀은 언제나 선합니다. 설령 자신은 악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자식은 착하기를 바라고, 자신은 실패했더라도 자식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자신은 거짓되이 살았다 하더라도 자식만은 진실하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이 같은 마음을 두고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부모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분이다.” 때로는 섭섭한 마음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내가 섭섭하게 여길 것을 알면서도 어떤 일을 하실 때는 그분들의 마음도 그만큼 아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들 자식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두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한데 그렇게 하면 자식에게 오히려 해가 될 것을 뻔히 알고 있다고 할 때 누군들 그것을 막지 않겠습니까? 
그러던 부모가 어느 때가 되면 더 이상 자식들의 앞을 막아서지 않습니다. 아니 막아서지 못한다는 말이 맞겠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만큼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세대차가 어쩌고 하면 더 이상 할 말도 없게 되고 마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을 탑니다. 부모님 역시 이제는 사랑을 받아야 할 때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젖먹이일 때는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사랑이었다면 어느 정도 자식이 성장을 했다고 하면 이제는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 부모님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흔히 부모들이 그런 말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손주들 오는 것이 참으로 반갑고 가는 손주 더 반갑다고요. 손주들 반갑지만 그러나 그들이 언제까지 곁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 나이를 먹어갈수록 애가 된다고 하지를 않던가요? 어떻게 보면 아이들보다 더 합니다. 작은 일에도 쉽게 삐집니다. 왜 그런가요? 그만큼 이해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 드리고 수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지라도 끝까지 들어줄 수 있는 그 마음이 참된 부모 공경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그분이 나의 부모님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골에서 도시에 사는 아들집에 갔는데 아들 친구가 저 할머니는 누구냐고 묻자 아들은 어머니의 초라한 모습이 창피했던지 먼 친척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부모님의 얼굴의 주름살은 나를 위한 수고의 흔적이요. 마르고 거친 손은 나를 위한 희생의 흔적입니다. 부모님은 한 번도 나를 자기 자식이 아니라 옆집아이라고 하시지 않았는데 왜 자식은 그 부모를 자랑하지 못하고 무시하고 귀찮아합니까? 내가 부모를 귀찮아하는 것을 내 자식들이 말없이 보고 있음을 아십시오. 그들이 자라서는 나보다 더 심하게 나를 귀찮아 할 것입니다. 

나이든 부모님의 모습은 얼마 안 있어 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부모님들을 부끄러워한다면 후에 나의 자녀들 또한 나를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심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치신 부모님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부모를 부끄럽게 또는 귀찮게 여긴다면 그 결과는 아주 참담하게 내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는 부모가 연약해 보이고 초라해보일수록 그런 부모를 더 자랑스럽게 여길 줄 아는 자녀들이 다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히려 내가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잠언 23장 24-25을 보면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부모의 근심 걱정거리가 되지 말고 자랑거리가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이 효도입니다. 
옛날의 우리나라 여성들은 그 어려운 시집살이를 효도하는 마음으로 견디어 나갔다고 합니다. 
“'내가 좋은 며느리가 되어야 친정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다. 내가 좋지 못한 평을 듣는다면 친정 부모님과 가문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효도의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었습니다. 저 하나만 생각하고 마음대로 해버린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내가 진실하고 부모님의 이름을 소중히 여겨 바르게 살면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되고 기쁨이 되고 그것이 효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부끄럽게 생각하기보다는 그런 부모님이 사람들 앞에 칭찬받는 인생이 되실 수 있도록 먼저 우리 자신을 잘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 내가 잘 될 때 부모님들 역시 사람들 앞에서 존귀와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어나가야 될 것입니다.

아울러 부모공경은 내 중심이 아닌 부모님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해놓고 부모공경 다 했다고 하면 안 됩니다. 부모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알아서 해야 합니다. 옷을 하나 사더라도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스타일 색깔을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경상북도 어느 산골에 추운 겨울눈이 내리는 가운데 선교사님이 지프차를 타고 고개를 넘어 오는데 어디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선교사님은 차를 세우고 울음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니 어떤 어머니가 아기를 꼭 껴안고 얼어 죽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기는 얼어 죽으면서도 어린 자식은 죽지 않도록 자기 치마를 벗어서 아기를 감싸주어서 아기는 죽지 않고 살아서 선교사님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 가 청년이 된 후 그 사실을 알고 추운 겨울 눈 오는 날 어머님이 묻혀있는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어머님의 무덤을 덮어주면서 “어머니 그때 이만큼 추웠습니까? 어머니! 그때 이만큼 추웠습니까?” 하며 울었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시다면 이제부터라도 못 다한 부모공경을 다하십시오. 그분들이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습니까? 사실 우리들은 내 자식에게 하는 반만 하여도 부모님은 기뻐하실 것인데 내 자식에게는 얼마나 잘하지만 부모님께는 소홀히 하지나 않았습니까? 내 기분만 생각했지 부모님의 기분이나 감정은 생각지 못하고 살아오지나 않았습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요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가정입니다. 부모님 여러분 자녀위해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자녀 여러분 부모님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하여 공경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낳아 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다”고 자식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나는 오르지 너를 위해서만 살아왔고 너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 날 부모와 자식 간의 입장 차이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들 역시 계산적으로 부모님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물려받을 재산 때문에, 남들이 비난할까 두려워서, 그리고 예수님이 보시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을지라도 부모님은 이해할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넓은 바다와 같아서 당신의 허물도 용서하실 테니까요……. 
오늘은 어버이 날 더도 덜도 말고 우리가 자식에게 쏟아 붓는 사랑만큼 부모님께 되돌려 드립시다. 부모님은 우리가 느꼈던 것보다 두 배로 느끼고 고마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부모님께도 효도합시다. 다음에 효도하지 하고 미루면 때는 늦습니다. 나무는 고요하게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냥 놔두지 않고 자식은 부모님을 더 봉양하려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부모 공경의 도리를 다하십시오.
마지막으로 황수관 박사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쓰셨던 어머니라고 하는 제목의 가슴을 적시는 아름다운 글을 소개합니다.
어느 일류대 졸업생이 한 회사에 이력서를 냈습니다. 사장이 면접 자리에서 뜻밖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청년은 부모님을 목욕시켜드리거나 팔 다리를 한번 주물러 드린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청년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부모님의 등을 한번 긁어 드린 적은 있나요?”

청년은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등을 한 번도 긁어 드린 적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청년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입사를 못할까봐.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면접하러 오세요. ㅎ하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내일 여기 오기 전에 부모님께 혀도 한번 하고 오면 좋겠네요. 할 수 있겠어요?”
청년은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품을 팔아 그의 학비를 댔습니다.
그는 명문대학에 합격했습니다. 학비가 어마어마했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청년이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일터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시니까 틀림없이 발이 가장 더러울 거야.”
그러니 발을 닦아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아들이 발을 씻겨드리겠다고 하지 “갑자기 발은 왜?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닦으마”라며 한사코 발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 오늘 입사 면접을 봤는데요 사장님이 어머니를 씻겨 드리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얼른 알아차리고 태도가 금세 바뀌었습니다. 문턱에 걸터앉아 세숫대야에 발을 담갔습니다. 청년은 생전 처음으로 어머니의 발을 잡아 보았습니다.
손이 어머니의 발바닥에 닿는 순간 청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발바닥은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여기 저기 갈라져 반창고를 감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숨이 멎었고 말문이 막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이 발바닥에 닿았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청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오는 울음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새어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고 또 삼켰습니다. 하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한쪽 어깨에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어머니의 발을 끌어안고 목을 놓아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청년은 다시 만난 회사 사장에게 말했습니다.
“사장님 이번 기회를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가슴속 깊이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홀로되신 어머니를 잘 모시겠습니다.”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이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합격입니다. 인사부로 가서 수속을 밟도록 하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해야 합니다. 한번 가시면 다시는 뵐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안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평생 같이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홀연히 떠나셨습니다. 이별은 다들 슬픈 일이지만 어머니와 헤어질 때 어머니와 이별할 때 눈물이 제일 많이 나는 것 같습니다. 

황수관 박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므로 아직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섬기십시오. 이미 돌아가셨다면 자녀들을 바로 가르치십시오. 속에만 담고 계시지 마시고 효를 가르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우리와 자녀들이 다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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