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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롬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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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성령의 법안에서 (롬 8:1-11)

1852년 4월 10일, <존 하워드 페인, 1771∼1852>이란 미국인이 알제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뒤 미국 정부는 군함을 보내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옮겨왔습니다. 유해가 뉴욕에 도착하던 날, 부두에는 뉴욕시가 생긴 이래 최대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그 중엔 미국 대통령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많은 인파가 몰려 나왔을까요? 그것은 그가 작사한 한 곡의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집 내 집뿐이리.> 

이 노래의 원제목은 <홈 스위트 홈, Home Sweet Home>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즐거운 나의 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노래는 페인이 지은 가사에 영국 작곡가인 <비숍, Bishop, Henry Rowley, 1786~1855>이 곡을 붙인 것입니다. 

이 노래는 가정의 소중함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만, 정작 페인 자신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아 가정이 없이 길거리를 떠돌았습니다. 그는 나이 81세이던 1851년 3월 3일에 친구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세계 모든 사람에게 가정의 기쁨을 노래한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의 맛을 모르고 지냈으며, 앞으로도 맛보지 못할 거야!> 이 편지를 쓴 지 일 년 후 페인은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이 좋은 이유를 말한다면 끝도 없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으뜸인 대답은 <조건 없는 사랑>일 것입니다. 사회에서 무능하다고 홀대받는 사람도, 성적이 별로인 학생도, 병들고 나약해진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환영받는 유일한 곳이 가정입니다. 

무엇보다 가정은 죄로 인해 오갈 데 없는 사람이 찾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곳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비유>야말로 모든 비유의 백미입니다. 아버지께 불순종한 아들,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여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아무 조건 없이 뜨거운 사랑으로 맞이하는 아버지가 계신 곳이 가정입니다. 

가슴 아픈 것은 오늘의 가정들이 이 모습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정에서까지 무능한 사람이 홀대당할 때, 실패한 사람이 격려를 받지 못할 때,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차가운 대접을 받을 때, 병들고 연약해진 것 때문에 돌봄을 받지 못할 때, 이미 이 공동체는 가정이 아니라 냉혹한 사회의 연장일 뿐입니다. 가정은 사회 전반을 흐르는 능력 위주의 냉혹한 인간 평가에 저항하면서, 특유의 따스함과 포용과 용서와 사랑을 뿜어낼 때 비로소 가정다울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들은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닌 인생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이듯이,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배우지 못하셨어도, 경제적으로 무능해 보여도, 늙고 병들어 약해지셨어도 자녀는 당연히 효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가 당신을 경외할 때의 기쁨을 잘 아시기에, 자식의 효도를 받는 부모의 기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효도하는 자녀들에게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절 이하를 보면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경외하지 않고 불신앙할 때의 섭섭함을 아시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때 부모님들이 느끼는 섭섭함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부모를 학대하고 핍박하는 자녀를 심지어는 죽이라고까지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15절을 보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을 공경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여러 면에서 우리들의 가정이 성경이 가르치는 원형으로서의 가정의 모습을 가지길 원합니다. 우리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과 복이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성도는 가정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 역시 하나의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가정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 자녀입니다.세상에서 가정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조건 없는 사랑으로 영접하고 회복하고 치유하고 쉬게 하듯이, 하나님이야말로 그러한 사랑을 주시는 아버지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영적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엄청난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말씀되고 있는 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어떤 것일까요?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옙스키, 1821~1881>가 1866년에 출판한 대하소설 『죄와 벌』은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나폴레옹>처럼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비범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또 다른 하나는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가 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으면서 해악만 끼치는 것처럼, 세상에는 해악만 끼치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사람들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가진 이성의 힘을 믿고, 이성을 통해 나폴레옹처럼 합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러한 사람인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무자비한 고리대금업자인 노파와 그녀의 동생을 살해합니다. 그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는 죽어 마땅하고, 이런 사람의 돈을 빼앗아 좋은 일에 쓰는 것은 하등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살인자가 되고 보니 현실은 생각과 달랐습니다. 머리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가슴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즈음에 그는 <소냐>라는 여인을 알게 됩니다. 소냐는 정신착란증을 앓는 계모와 동생들을 위해 몸을 팔고 있는 불쌍한 여인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희생적 삶을 사는 소냐를 이해할 수도 없고 한심해 보이기도 했지만, 점차 이 여인에게 구원을 갈망하는 자기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끝내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한 뒤, 몸을 굽혀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춥니다. 그의 고백을 들은 소냐가 말합니다. 

<이 세상에 당신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금 당장 사거리로 가서 당신이 더럽힌 대지에 입을 맞추세요. 그리고 큰 소리로 '나는 살인자입니다!'라고 외치세요. 그리하면 아직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구해 주실 거예요.>  

마침내 라스콜리니코프는 경찰에 자수합니다. 경찰서로 가는 도중 소냐의 말에 따라 그는 광장에 꿇어앉아 흙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죄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고, 소심한 성격과 어리석음에 패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을 갈망하면서도,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이성, 자존심, 합리적 생각 등을 다 던져버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한없는 평안을 맛보게 될 것이었지만,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 없이 살 수 없으면서도, 끝까지 스스로를 구원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리석은 인생들의 고뇌>를 잘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은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서 그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인이란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죄책감과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죄로 인한 고통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이미 어떤 이들은 그 고통을 적나라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부딪히는 여러 가지 괴로움, 경제생활의 고통, 질병의 위협, 사랑이 깨진 관계에서 오는 아픔 등이 다 죄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마치 질병 초기에는 통증을 느끼지 못해도 시간이 지나 병세가 깊어지면 심한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언젠가는 죄로 인한 깊은 고통을 느낄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해도, 지금은 죄책감과 고통이 없다고 해도,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품에 있는 따스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증거자로 살면서도 자신이 죄인으로서 겪는 고통을 숨기지 않고 고백했습니다. 로마서 7장 21절 이하에서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이 그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것을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렇게 깊던 바울의 탄식이 8장으로 넘어오면서 대반전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아멘!  방금 전까지 죄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고 말하던 그가 더 이상 정죄는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죄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어디에 기인한 것입니까? 

1절을 다시 보십시오. 거기 정죄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건 하나가 제시됩니다.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했지요? 그 조건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부터 벗어납니다. 

본래 세상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있어 우리를 힘들게 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죄를 지으면 그 형벌로 죽어야 한다는 법을 말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죽음의 고통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새로운 법을 만드셨습니다. 그 법이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기울이신 수고를 아십니까?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씻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는 형벌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고,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던 사탄은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탄에서 놓여 생명으로 옮겼고,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할렐루야!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생명의 성령의 법>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마치 북한에 사는 주민이 북한법에 의해 고통을 받았지만, 대한민국에 온 이후에는 더 이상 그 비참한 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축복의 법을 따라 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말씀합니다. <내 아들과 딸들아, 다 오라! 그렇게 방황하면서 괴로워하지 말고, 어서 집으로 오너라. 나는 조건 없이 너희를 용서하고 사랑하여 받아줄 것이다. 너희는 영원한 내 아들딸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도 많은 사람이 <죄와 사망의 법>을 따라 삽니다. 그런 법을 망라하여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앞의 소설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처럼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려 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이성과 합리적 판단으로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버팁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의를 얻겠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율법이란 한 조항이라도 어기면 죽어야 하는 무서운 법일 뿐입니다. 

20세기 초 영국 시인 <프랜시스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쳤다. / 밤과 낮과 오랜 세월을 / 그로부터 도망쳤다. / 그리고 나는 푸른 희망을 향해 / 쏜살같이 날아 올라갔다가 / 그만 암흑의 수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 그리고 틈이 벌어진 공포의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 힘센 두 발이 쫓아왔다. / 이어 그보다도 더 절박하게 들려오는 한 목소리 / 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 저버림을 당하리라!> 

여러분, <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 저버림을 당하리라>는 마지막 구절처럼,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저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알량한 자존심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본문 3-4절에서 보십시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얻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 <구  상> 선생님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 고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 불안과 허망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앞이 캄캄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다음에 소망을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14세기의 한 수도사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당나귀가 두 개의 먹음직스러운 건초더미 중간에 서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양쪽 모두 먹음직스러워 어느 쪽 건초를 먹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과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 사이에서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믿는 것은 허망한 결과만 가져올 뿐입니다. 우리 자신,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의지하는 모든 마음을 내려놓고, 과감히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죄와 허물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결코 정죄함이 없게 하시는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준비하신 구원의 은총을 받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구원의 은총이 우리의 것이 되는 과정에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일하시면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고, 그 때부터 마음에 생명과 평안이 생겨납니다. 6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주님의 영이 계시면 나중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1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아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준비하신 은혜를 풍성하게 입길 원한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날마다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길 기원합니다. 

부디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누리게 되길 기원합니다. 영원한 아바 아버지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평안과 생명으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김운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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