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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마리아 여자를 통과 하시다 (요 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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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자를 통과 하시다 (요 4:1-15)


이스라엘 땅은 우리나라 강원도만한 크기의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도 지역 지역별로갈등이 심각합니다만 이스라엘은 지역 색이 매우 강하고 지역 갈등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은 세 개의 지역으로 구분 되어 있었습니다. 남쪽을 유다로, 북쪽은 갈릴리로 불렸습니다. 남과 북의 사이에 있는 지역은 사마리아로 불렸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과 2장 중간까지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작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난했습니다. 이런 사회 구조 때문에 갈릴리 사람들은 기존 체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저항했습니다. 그들의 언어와 행동을 거칠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갈릴리 지역에서 성장하셨고 공생애의 대부분을 그 곳에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하셨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모든 사회적, 영적 특성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나다나엘을 말하고 있습니다. 

2장 중반부터 3장까지는 남쪽의 유다 땅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유다 땅은 수도인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성전을 중심으로 부와 권력과 명예가 다 모여 있는 곳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왕궁과 총독부를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의 모든 경제력이 예루살렘에 다 모여 있었습니다. 

이런 부를 가지고 예루살렘의 부자들은 갈릴리 땅을 사들여 대지주가 되었고 갈릴리 현지인들을 소작인으로 두고 관리했습니다. 성경에서 주인이 포도원을 하인들에게 맡기고 나중에 돌아와 심판하는 내용이 바로 이런 사회 구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며 성전을 숙청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지역이 품고 있는 특성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를 말하고 있습니다.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중간 지대에 있는 사마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셔서 복음을 증거 하시는 일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지역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해결하기 힘든 갈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갈등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했습니다.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에 앗수르의 변방에 있는 사람들을 북이스라엘로 이주 시켰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 사람들과 앗수르 사람들을 결혼시켜 혼혈 민족으로 만들었습니다. 남 이스라엘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당했습니다. 대부분의 똑똑한 사람들은 다 포로로 잡혀 갔고,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방 사람들과 강제로 결혼을 해 혼혈을 이루며 살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잡혀간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민족의 순수 혈통을 지키며 율법을 중심으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들이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보니 그곳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이방인들과 혼혈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을 사마리아인이라 부르며 하나님의 백성의 피를 더럽힌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며 이방인들 보다 더 멸시하며 개 취급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수 백 년 동안 서로 원수지간으로 지냈습니다. 유대인들이 갈릴리 지역이나 두로 지역으로 여행을 할 때 사마리아 지역을 관통하면 나흘 정도면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을 보지 않기 위해 우회의 길을 선택해서 요단강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그 길은 팔일 내지 열흘 정도 걸렸지만 그 길로 갔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만큼 사마리아인들을 혐오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올라가시면서 사마리아 지역을 관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보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셨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런 행보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을 천하게 여기거나 비판한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도리어 사마리아인들을 감싸 주셨고 칭찬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유대인, 제사장, 레위인들 보다도 사마리아인을 더 칭찬하셨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낫기를 간청할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치유하셨습니다. 문둥병에서 치유된 아홉 명의 유대인은 감사함이 없이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 중에 사마리아인 한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은 유대인 아홉 명은 어디 가고 사마리아인인 너만이 네게 와서 감사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마리아인을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지역, 신분, 계층, 인종, 성별을 구분하셔서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두를 똑같이 대하셨습니다. 도리어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 더 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올라가시면서 사마리아 지역을 관통하심으로 막힌 담을 허물며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갈등과 반목과 차별이 아니라 화합과 일치와 평등임을 사마리아를 관통하는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기독교는 어떤 이유로든지 이웃과 담을 쌓고 평화를 깨뜨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삶의 문화가 달라도 그것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며 적대시하며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가 헌신적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며 서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는 허물이  많았습니다. 힘을 가지고 억압하며 기독교의 정신을 강요하고 지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짧은 안목으로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긴 역사를 가지고 보면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를 더 멀어지게 한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이 중세의 역사였고, 식민지 시대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으로 정복함으로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는 가운데 이뤄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사마리아 지역에서도 가장 천한 삶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천한 사마리아인들 중의 가장 천한 삶을 사는 창녀인 여인이었습니다. 수가 성의 여인은 사마리아 지역이 가지고 있는 모든 사회적, 영적인 특성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은 아마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 가운데 가장 천한 계층에 속하는 여인일 것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은 통해 변화되고 구원을 받으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갈릴리에서 간절함을 가지고 있는 나다나엘을 변화시키시고, 예루살렘에서 최고의 지성인이 니고데모를 변화시키시고, 사마리아에서 가장 천한 여인을 변화시킴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이 세상의 모든 계층의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세 사람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가장 힘들어 했던 사람이 니고데모였습니다. 그만큼 세상적으로 누리는 것이 많아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간절함이 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의 마구간, 예수님께서 자라신 나사렛, 예수님의 대부분의 사역이 일어난 갈릴리지역, 예수님께서 민족의 갈등을 끌어안고 찾아가신 사마리아의 수가 성 등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이 땅의 가장 천한 사람 한 사람까지도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이 있기에 저와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  받았으니 그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며, 가장 연약한 사람까지도 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어린 소자에게 물 한 그릇 준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약한 자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둥병자를 어루만지시며 너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신이고,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여기에서 잠깐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면 저와 여러분의 내면의 세계에는 사마리아의 수가 성의 여인과 같은 어두움 영역이 있습니다. 내적인 상처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 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가운데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어두운 영역이 있습니다. 곪아 터져 피고름이 흐르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 상처와 아픔이 나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쓴 뿌리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고통의 쓴 뿌리가 우리를 지배하면 우리의 삶 잩체가 고통입니다.  쓴 뿌리에 끌려 살다보니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없습니다. 도리어 원망과 분노가 가득해 주변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가시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수가 성의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녀의 가장 아픈 영역을 어루만지십니다. 그가 아파하는 가장 큰 상처를 만져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과정은 다음 주에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사마리아 수가 성의 영역은 어디입니까? 그 쓴 뿌리로 인해 계속되는 가정의 아픔은 없습니까? 직장과 이웃들 속에서, 그리고 교회 속에서 사마리아의 쓴 뿌리의 영역은 어디입니까? 제가 요즘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가정, 교회, 일터를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를 만드는데 있어서 걸림돌 역할을 하느냐, 디딤돌 역할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디딤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같은 돌이지만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 성의 여인을 걸림돌의 자리에서 빼어내 디딤돌의 자리로 옮겨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이 내면의 쓴 뿌리에 지배되어 걸림돌의 삶을 사는 우리들을 예수님 안에서 품으시며 쓴 뿌리의 아픔으로부터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가로 막고 있는 담들을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너뜨려 삶의 영역을 하나님의 화평으로 만들어 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쓴 뿌리를 제거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세워지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여러분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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