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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부문제 극복 (느 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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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문제 극복 (느헤미야 5장)  
 
느헤미야서를 묵상하면서 우리교회 공동체가 지금까지 추구한 대로 건강한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도록 더 구체적으로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사명이 생겼습니다. 140년 넘게 무너진 예루살렘성벽을 단 52일 만에, 41공구로 나누어서 재건(再建) 했습니다. 

우리교회는 긴 세월의 소송을 견디고 이겨낸 만큼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세월동안 방치한 성벽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건축하기를 원하십니다. 담임목사인 제가 생각할 때 그것을 우리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면 우리교회가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존속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한계, 우리 교회의 한계와 우리 개인의 한계를 뛰어 넘게 되면 좋겠습니다. 

느헤미야 5장의 말씀으로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통해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참여한 75명의 헌신자들과 같이 성도 여러분께서도 거룩한 대열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 방해세력은 4장은 외부의 적이었고, 5장은 유대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였습니다. 

탈무드에 이러한 글이 있습니다. 마귀들이 모여서 기독교인을 없애는 방법을 찾기 위해 회의를 했습니다. 한 마귀가 외부세력을 들여와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자고 하자 경험이 많은 마귀는 그 행동은 오히려 기독교인의 신앙을 뜨겁게 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저지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입증되는 사실을 볼 때 기독교는 핍박을 받으면 외부적으로는 약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신앙이 순결해지고 뜨거워졌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인 분쟁은 해결하지 못하고 분열을 거듭한 아픈 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는 내부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상황

1] 구약의 탁월한 지도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전부터 가뭄으로 흉작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루살렘성벽 재건 75년 전에 있었던 일을 재연시킬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제 1차 포로 귀환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다가 방해를 당하자 성전재건을 중단했고, 이 일은 심한 흉년으로 이어져서 여러 해 동안 스무 가마를 얻을 곳에서 열 가마를 얻을 만큼 흉작이 계속 되도록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과 우박 재앙이 있었습니다.(학개2장15절~19절) 

가뭄과 내부문제로 중단이 되면서 75년 전의 악순환이 또 시작되는 절체절명의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자녀가 많아서 양식을 얻어야 살 수 있는 형편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혀야 곡식을 얻을 수 있는 형편이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보다 더 심각한 사람들은 밭과 포도원으로 빚을 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상황은 심각한 불만으로 표출되어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됐지만, 아무런 힘이 없어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더욱 금 세공업자들과 향수 제조업자들과 상인들과 실업가들도 대적의 방해로 사업을 원활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2] 귀족들과 고위공무원들은 돈과 곡식을 빌려주면서 그 당시 페르시아 법으로는 합당하지만, 신앙인으로서는 합당하지 못한 높은 이자를 받았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돌아온 귀족과 공무원들이 다른 나라에서 배운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은 이자와 원금을 갚지 못하고 밭과 포도원과 심지어 자녀까지 종(從)으로 내어 주었습니다. 

과거나 현대나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은 헐값으로 돈 있는 사람들이 차지할 기회였습니다. 이방인에게서는 해방됐지만, 자신의 동족에게 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고엘제도가 있어서 채무자의 근족 중에서 회수해 줄 수도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려운 때라 고엘제도로 인한 회생의 길은 없었습니다. 

또한 희년제도로 인한 회복의 길도 있었지만 국가법 앞에 종교제도로 재산을 내놓을 가능성도 희박해서 유대인의 회생(回生)의 대안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내부문제 해결 

이러한 내용을 보고 받은 총독 느헤미야의 해결방법은

첫째,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는 일 이었습니다. 느헤미야 자신도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다』고 인정했습니다. 높은 이자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지만 느헤미야도 돈과 양식을 꾸어주고 이자를 받은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둘째, 자신과 자신의 형제와 자신의 영향력이 직접 미치는 사람들은 이자를 받는 일을 그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셋째, 그리고 귀족과 민장들을 설득하자 그들도 동참하겠다고 동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는 자신의 권리인 총독의 보수도 백성들에게 세금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받지 않으면서도 『(18절)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귀족과 민장들의 행동은 조금만 크게 생각하면 그들 스스로에게도 이익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탁월한 지도력은 민장과 귀족들을 제사장 앞에서 맹세하게 한 다음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서 『(13절)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 지로다』로 확증을 하는 행위에서 드러났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성벽 재건이 완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시작되어 유대인 전체를 무력하게 할 상황에서 느헤미야가 스스로 희생을 감수했고, 중간지도자들이 따라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교회로 말하면 평신도 지도자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 공동체가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목사의 헌신뿐만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의 헌신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시대 그리스도인은 어느 틈에 내 몫의 십자가는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주장하는 습성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모든 영역에서 우리자신에게 요구하는 십자가를 짊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 길 끝에서 위로의 주님을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그 곳에 계신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노예무역의 고리

200년 전, 영국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노예 무역국이었습니다. 영국으로서는, 노예무역이 실질적으로 또 하나의 성공적인 사업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적인 정책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노예무역은 국가 안보에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사회적 통념이었습니다. 

영국의 선박들은 서 아프리카의 해안에서 직접 사로잡거나, 아랍 상인들에게서 사거나 마을의 추장들과 교환하는 방법으로 노예들을 배에 실었습니다. 

그러나 퀘이커 교도들은 1724년에 노예무역을 정죄하자, 일각에서는 그들을 해방하는 길이라는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존 웨슬리는 the execrable sum of al villainy(저주받아 마땅한 온갖 극악무도한 일의 총합)이라는 소책자로 계몽을 했지만 현실적인 벽은 너무 높았습니다. 노예무역을 포기하자고 발언하는 사람을 매장했고, 의회에서 발언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1780년 10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윌리엄 윌버포스는 헐을 대표하는 의원이 돼 평생을 노예무역을 중단을 부르짖자 마침내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뜻을 세운지 56년 만에 영국 국회는 노예 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 윌버포스는 “나로 하여금 영국이 노예 제도를 통해 얻는 2천만 스털링의 돈을 포기하는 날을 목도하고 죽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 윌리엄 윌버포스의 생애 - 가트 린 지음/송준인 옮김, 두란노)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의 길을 걷기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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