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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개만이 살길이다 (욘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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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만이 살길이다 (욘 1:1-3)

요나서의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들을 향하여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요나가 외칠 내용은 그들의 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요나는 자신이 그 메시지를 선포하면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을 피하기 위하여 다시스로 가기로 하고 욥바에서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탄 배가 큰 폭풍을 만나게 됩니다. 뱃사공들은 폭풍 속에서 그 폭풍의 원인을 알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걸리게 됩니다. 요나는 자기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사공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폭풍은 그치고 요나는 큰 물고기에게 삼키게 됩니다.
   
2장에 보면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있으면서 철저히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회개기도를 받으시고 물고기에게 명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3장에 보면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는 다시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요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선포합니다.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하룻길을 다니며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메시지를 선포했는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이 회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킵니다.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셔서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십니다.
   
4장의 내용입니다. 요나가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께 분을 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죽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박 넝쿨을 준비해서 그늘을 만드십니다. 요나가 박 넝쿨을 기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벌레를 예비하셔서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시고 또 해가 뜨거울 때 뜨거운 바람을 불게 하셨습니다. 요나가 너무 힘들어 혼미케 되고 다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요나를 깨닫게 하십니다. 요나는 수고도 아니 하고 재배도 아니 했던 박 넝쿨을 아꼈는데 니느웨성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12만여 명이나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 성을 아끼지 아니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요나서를 묵상하면서 많은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오늘 설교는 그 중에 몇 가지만 나누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1. 사람은 부르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니느웨로 가서 그들을 향해서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저버리고 다시스로 도망을 가고 있었습니다.
   
요나의 고통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한 결과로 찾아온 것입니다. 요나가 타고 가던 배가 폭풍을 만나고 결국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요나는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는다고 말했습니다. 스올은 음부 혹은 무덤을 뜻하기 때문에 요나가 지옥과 같은 고통, 혹은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떠났기 때문에 죽음과 같은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중보자로 부르심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평신도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역장으로 또 어떤 사람은 찬양단으로 또 어떤 사람은 거리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몸으로 섬기는 봉사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생긴 것이 다양한 것처럼 부르심도 다양합니다. 목회를 해도 다 같은 목회가 아닙니다. 기도 목회로 부르심을 받은 분이 있고 치유목회로 부르심을 받은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제자훈련사역으로 어떤 분은 내적치유 사역으로 또 어떤 분은 선교사역으로 어떤 분은 긍휼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긍휼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한국에서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한국뿐만 아니라 파키스탄까지 가서 가난한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도들도 부르심이 각기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람마다 각각의 부르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 종류입니다. 자신의 부르심을 아는 사람들과 자신의 부르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부르심을 알지 못한다면 그만큼 인생은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성공은 얼마만큼의 돈을 벌었느냐, 어떤 자리에 올라갔느냐, 어떻게 인생을 즐겼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성공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서 한걸음씩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부르심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요나서의 교훈을 들으면서 자신의 부르심을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나의 부르심을 알고 있는가? 나의 부르심을 알고 있다면 나는 그 부르심대로 살고 있는가? 혹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지만 부르심대로 살고 있지 않다면 인생의 폭풍을 만나기 전에 부르심의 자리로 돌이키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2. 죽어야 열매가 있다. 
   
요나는 폭풍의 원인이 자기 때문임을 알고 뱃사공들에게 자기를 바다에 던지게 합니다. 뱃사공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치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본 뱃사공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합니다. 그들이 어떤 서원을 했는지는 요나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들은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1:5에 보면 각각 자기의 신을 불렀습니다. 1:9에서는 요나에게 바다와 육지와 하늘을 지으신 여호와를 소개 받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그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폭풍이 일어난 것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요나가 바다에 던져진 후에 곧 바다가 잔잔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만났던 폭풍을 일으키셨고 다시 폭풍을 잔잔하게 하신 분이 요나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떤 서원을 했을까요? 당연히 이제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서원 아니겠습니까. 요나 한 사람이 자기 탓이라고 인정하고 바다로 던져지니 여러 명의 사공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요나의 죽음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고 난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니느웨성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성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약 12만 명이었으니 어른들까지 합치면 몇 백만 명은 될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요나 한 사람이 죽어지므로 생명을 얻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나의 죽음이 보여주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죽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향해서 한 걸음씩 전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요 12:24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길을 여신다는 의미입니다.
   
마 12:38-40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님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구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말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사흘을 있다가 나온 것처럼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고기 뱃속을 통과한 요나의 외침을 듣고 니느웨성 사람들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들마다 구원을 얻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실 때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깊이 잠들게 하셨냐면 옆구리에서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는데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담이 죽어서 하와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으로 신부인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죽음의 비밀이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신앙생활은 육신을 죽이는 생활이고 자아가 죽는 생활입니다. 육신이 죽어야 영이 살고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주님을 따른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자아를 부정하라 자기의 원함을 죽이라는 말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령한 생활이라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원하는 것을 부인하고 영을 따라가는 것이 신령한 생활입니다. 자아를 부인하고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신령한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생활은 꼭 산으로 들어가서 수도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면 그것이 신령한 생활입니다.
   
쉽게 내비게이션으로 설명을 합니다. 제 차에는 오래된 내비게이션이 있습니다. 그 내비게이션은 오래된 길 돌아가는 길로 인도를 합니다. 제 스마트 폰에는 최신 내비게이션을 다운 받아두었습니다. 그 내비게이션은 막히는 길과 막히지 않는 길의 정보를 받고 가장 빠른 길로 인도를 해줍니다. 제가 만약 오래된 내비게이션을 따라 운전하면 저는 돌아가고 경비도 많이 나오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만약 최신 내비게이션의 인도를 따라 운전을 한다면 빠르고 비용도 절감되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 우리의 자아는 사망의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가면 사망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듭난 영과 주님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내가 죽어야 생명의 열매가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인간의 작은 수고에도 큰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 
   
요나가 니느웨성에서 하룻길을 가며 외쳤습니다. 앗수르는 강대국이고 이스라엘은 약소국이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보기에 요나는 아주 하찮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요나는 앗수르 말도 어눌했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후진국에서 온 노동자 한 사람이 서울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어눌한 한국말로 “40일이 지나면 한국은 멸망합니다.”라고 외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 미친놈 다 있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요나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요나의 외침에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니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니느웨성 사람들이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린 아이들까지 회개합니다. 심지어 온 백성들과 짐승들까지 금식을 하며 회개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심판을 돌이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물질, 우리의 재능, 우리의 인맥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능력을 갖추는 것은 무능력한 것보다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꼭 능력을 따라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능력이 있어도 하나님이 막으시면 그 능력이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못합니다. 우리가 약해도 하나님이 밀어주시면 놀라운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아람군대가 강성하고 이스라엘 군대가 약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여러 번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아람의 공격을 미리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람의 왕은 이스라엘을 빼앗으려면 먼저 엘리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람군대가 엘리사가 있는 도단성을 포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람군대의 눈을 가리셨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아람군대는 엘리사를 따갑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성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능력 있는 아람군대가 능력 없는 이스라엘 군대에게 사로잡힌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면 아무리 강해도 무능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무능력 한 사람도 강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 편이냐 입니다. 하나님이 내편에 서시면 무능해도 큰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이 나를 막으시면 능력이 있어도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 편이냐 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편이 되어주십니까? 하나님 편이 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남북전쟁 때의 일입니다. 곳곳에서 전투는 벌어지지요. 양식은 부족하지요. 전쟁은 길어지지요. 그때 부하 한 사람이 링컨에게 “각하,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편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말했습니다. 링컨이 대답합니다. “나의 관심은 지금 하나님이 우리 편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다만 지금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를 묻고 있다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언제나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께 손을 내밀면 언제나 그분은 내 손을 붙들어 주십니다.
   
약합니까? 부족합니까? 무능합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고 나를 세우시고 나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4. 회개만이 살길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곧 바다에 던져져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소화가 되어 죽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가 부르짖으며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회개기도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요나를 향한 심판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고기에게 명령 하셨고 물고기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요나를 토해냈습니다.
   
니느웨성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그 죄악이 가득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성을 향해서 설교하는 그날부터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소돔성이 멸망한 것처럼 멸망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설교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잘못을 구하고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회개를 받으시고 뜻을 돌이키셔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회개가 하나님의 심판의 물줄기를 바꾼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죄를 짓고 안 짓고의 차이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죄인입니다. 차이점은 죄를 처리하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의인은 죄를 처리하여 없애지만 악인은 죄를 처리할 줄 모릅니다. 아니 죄를 처리하지 않습니다.
   
두 집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한 집은 깨끗하고 한 집은 더럽습니다. 그런데 깨끗한 집이나 더러운 집이나 쓰레기가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쓰레기를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깨끗한 집은 쓰레기를 잘 치워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배출시킵니다. 

날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깨끗합니다. 더러운 집은 쓰레기를 한 곳에 모아서 신문지로 덮어 둡니다. 처음 쓰레기가 많지 않을 때는 덮어두면 보이지 않고 깨끗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쓰레기의 양이 많아지면 더러운 것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냄새도 진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쓰레기를 가리기만 하면 결국은 더럽고 냄새나서 사람이 그 집에서 살수 없게 됩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점은 죄를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죄를 그냥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악인이고 죄를 처리할 줄 아는 사람은 의인입니다. 의인은 두 가지 방법으로 죄를 처리합니다. 하나는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죄를 깨끗이 처리해 주시고 의인이라 칭해주십니다. 또 하나는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으나 연약해서 죄를 범할 때마다 주님에게 그 죄를 자백하고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처리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회개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악으로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땅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대하 7:14에 보면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땅을 고치신다는 말은 환경을 바꾸어주신다는 뜻입니다. 회개하면 환경도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한 길로 들어서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게 됩니다. 창 16,17장을 보면 86세인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합니다. 그리고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 일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13년 간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가 단절되면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생명 없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죽은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은 잘 믿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혀서 살던 사람들과 하나님께 버림받았던 사람들의 차이는 회개입니다. 의인은 회개하는 신앙생활을 했고 악인은 절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울과 다윗입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좋은 짐승들을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찾아와서 책망하지만 그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저를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여달라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회개가 없는 사울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습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다윗이 사울보다 더 악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야라는 신하의 아내를 취하여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요압에게 편지를 서서 전투 중에 적의 성벽 가까이 가게하고 우리야만 남기도 철수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우리야는 적에게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야를 죽인 것은 다윗이었습니다. 나단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와서 “당신이 죄인이요”라고 지적하자 바로 엎드려서 “내가 죽일 놈입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세요.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하며 엎드립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다윗의 고백을 받으시고 다윗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심판의 물줄기를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해주십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회개가 약합니다. 아니 없습니다. 교회 와서 몇 마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형식적인 회개는 있지만 진정한 회개는 없습니다. 값싼 회개, 심하게 표현해서 미안한데 입으로 몇 마디 나불거리고 용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용서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용서 받은 것입니까. 

그렇게 믿는다고 용서 받은 것입니까? 가슴을 치는 회개, 눈물로 매달리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올라와야 하는데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하고 너무 자유합니다. 큰 종기가 나서 살 속이 썩어 가는데 빨간약 바르고 반창고 붙여놓고 자유하다고 말한다고 그게 자유입니까.
   
성경에서 벗어난 생활을 회개합시다. 내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부분을 철저히 회개합시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죄라고 여겨지지 않지만 내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것이 있다면 잘못했다고 고백합시다. 가슴을 치며 회개합시다. 눈물로 회개합시다. 살려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읍시다.
   
어쩌면 오늘 이 설교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요 경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그 잘못된 신앙생활에서, 잘못된 라이프 스타일에서, 잘못된 관계에서, 잘못된 교회생활에서, 잘못된 마음가짐, 양심에 걸리는 것들로부터,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게 하는 상태에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기회요 경고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엘리제사장을 죽이시기 전에 먼저 기회를 주셨습니다. 경고하셨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에 가책으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였습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셔서 경고하셨습니다. 엘리는 두 번째 경고를 받아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살려달라고 기도하며 눈물로 회개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두 번째 경고, 하나님이 주시는 두 번째 기회도 붙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사무엘을 통해서 엘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엘리는 세 번째 경고라도 붙잡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습니다. 

엘리는 이 때라도 “하나님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울면서 매달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그 마지막 기회도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고 자기도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회개하지 않는 엘리에게서 떠났습니다.
   
아마 이 설교를 듣고 여러분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생각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조명하셔서 자신의 죄악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신앙생활에서 돌아서라고, 하나님 앞에서 악한 생활에서 회개하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입니다. 경고이며 동시에 기회입니다. 애통하십시오. 가슴을 치시며 회개하십시오. 악한 길에서 돌아서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돌아오십시오. 철저한 회개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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