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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의 영성 (창 5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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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영성 (창 50:15-21)

성경의 인물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요셉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셉은 가나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마치 왕자처럼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 중에서 요셉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런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서 고난을 당하고 애굽과 주변 국가들을 7년 흉년으로부터 구원했습니다. 이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요셉은 은 20냥에 상인들에게 팔렸는데 우리 주님은 은 30냥에 팔렸습니다. 요셉을 판 형의 이름이 유다인데 예수님의 제자 중에 예수님을 판 사람이 유다입니다. 우리는 그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요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요셉의 영성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빌 2:5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고, 엡 4:15에서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야 하지만 요셉이 예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오늘 설교는 요셉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순종의 영성 
   
창 37:12 이하에 보면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야곱과 요셉은 헤브론에 살고 있었고 요셉의 형들은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양을 치고 있는 아들들과 양떼가 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오라고 명합니다. 

야곱의 말을 들은 요셉은 아버지에게 순종해서 세겜으로 갑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의 거리가 약 100km입니다. 100km의 거리를 걸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룻길이 30km이고 요셉은 어린 나이였으니 족히 4일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겜에 가보니 형들이 없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명한대로 순종해서 세겜까지 갔으나 형들이 없다고 그냥 돌아가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버지가 보낸 목적을 알기 때문에 들에서 적극적으로 형들을 찾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요셉에게 무엇을 찾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형들이 도단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도단은 세겜에서 약 30km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요셉은 나흘을 걸어서 세겜에 왔으니 많이 피곤하고 지쳤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30km가 떨어진 도단까지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형들을 만납니다. 지금이야 웬만한 사람들은 자동차가 있고 또 대중교통이 발달해서 130km 거리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걸어서 130km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서 100km를 걸어서 세겜까지 가고 세겜에서 형들을 만날 수 없으니 또 30km를 걸어서 도단까지 가는 적극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셔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빌 2:7에 보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분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종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주님도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두고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넷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잔’은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에 자신의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편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쏟으시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두 가지를 잘 하면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아느냐로 영성을 측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영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알고 교통법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동차의 용도에 맞게 그리고 교통법규를 따라서 안전하게 자동차를 몰 줄 아는 사람이 운전을 잘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기록한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무슨 일인가를 판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과 올바른 선택이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합니다.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올바른 판단을 내렸지만 육신을 따라 형편을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그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이 우리를 저주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내적인 갈등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야 되는지 가지 말아야 하는지, 만나야 하는지 만나지 말아야 하는지 등등의 갈등이 끊임없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힘든 상황이 벌어져도 그리고 물질적으로 손해가 되어도, 심지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제가 오금동에서 목회 할 때 일입니다. 한 달 월세가 530만원이었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빚도 좀 있는 상태였고 그 달에는 교회 재정이 400만 원 정도 마이너스였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제게 예배당 인테리어와 지역노인을 위한 제주도 무료효도관광을 명하셨습니다. 저희 형편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단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을 했습니다. 예배당 인테리어를 새로 하고 지역노인 80분을 모시고 무료효도관광을 제주도로 다녀왔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빚을 져야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테리어 비용도 채워졌고 효도관광도 잘 다녀왔고 교회 재정은 오히려 400만원이 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했습니다. 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물리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마음에 욕심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들과 약한 짐승들은 죽였지만 건강한 짐승들은 남겨두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남겨두었다고 말했지만 그 불순종 때문에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여러분들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내 뜻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갈등 속에서 내 뜻을 선택하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여 순종하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영성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 성장하는 영성 
   
요셉은 여러 면에서 성장했습니다. 육체적인 성장이야 당연한 것이고 신앙적인 성장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성장 중에 중요한 것이 관계의 성장입니다.
   
오늘 요셉의 영성을 설교하면서 제가 창 50:15-21을 분문으로 잡은 이유가 있습니다. 창 37장에 보면 요셉은 아버지에게 사랑은 받았지만 관계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보면 그것을 아버지에게로 달려가서 고자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상인들에게 팔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관계의 영성이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형들은 그의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기꺼이 형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때 형들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과거에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했던 일을 생각하니 요셉이 복수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이 요셉을 만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가면서 자신들의 안전을 위하여 요셉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가 죽더라도 요셉이 형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형들을 위로합니다. 본문 19-21절을 보겠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하였더라” 

요셉은 원수를 사랑으로 갚았습니다. 아버지 곁에 있을 때 요셉은 이 정도로 넓은 마음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속 좁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내면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후에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장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눅 2:52에 보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키도 자라셨고 지혜도 자라셨고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도 성장하셨습니다. 성경이 당연히 자라야 할 예수님의 키 까지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성장을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신앙이 자라야 함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교회생활을 몇 십 년 씩 했지만 신앙성장 전혀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다보니까 세례도 받고 직분도 받고 교회에서 사역도 하지만 여전히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중생은 했으나 영적인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전 3:1-3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영적인 어린 아이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소화력이 약합니다. 바울은 영적인 어린아이들의 특징은 밥을 먹을 수 없고 젖만 먹는다고 말했습니다. 젖 먹는 어린아이에게 어느 날 밥을 먹이면 어떻게 될까요? 소화하지 못하고 토해버립니다. 갑자기 고기를 먹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 납니다. 소화력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는 소화력이 약하기 때문에 설교를 듣다가 시험에 잘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해내지 못해서 생명의 말씀을 듣다가 시험에 듭니다.
   
또 영적인 어린아이는 사람들을 잘 소화해 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영적인 어린아이가 소화해내지 못하는 A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는 A가 시험거리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잘 소화해냅니다. 전혀 시험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는 그가 A를 소화해 낼만큼 성장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 두 번째는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이 말은 그의 생활은 영이 중심이 되어 영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중심이 되어 육신이 끄는 대로 끌려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대한 사인(sign)을 보내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 받은 사인을 우리의 혼에 전달을 합니다. 그러면 혼이 육체에게 명령해서 영이 받은 하나님의 사인을 육체가 행하게 합니다. 이것이 신령한 생활이고 영중심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한 자들은 영이 받은 하나님의 사인이 혼을 통해 몸에 전달이 될 때 순종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이 받은 사인과 반대되는 몸이 원하는 일들을 합니다.
   
고전 3:3에서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을 두 가지 말합니다. 시기와 분쟁입니다. 시기심은 분쟁을 일으키고 결국은 자기를 죽이게 됩니다. 잠 14:30에 보면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상인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도 시기심 때문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도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시기심은 상대를 괴롭게 하는 것만 아니라 결국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을 따라 살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죠. A팀과 B팀이 줄다리기를 합니다. 두 팀 다 이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느 팀이 이길까요? 당연히 힘이 좋은 팀이 이기는 것입니다. 영과 육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약하면 영이 육에게 끌려 다니기 때문에 육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영이 강하면 영이 육을 끌고 다니기 때문에 영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이 강해지는 비결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딤전 4:5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날마다 밥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날마다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영적인 근육이 풍성해지고 강해지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영혼에 힘이 생기게 되면 육신이 원하는 일들을 부인하게 되고 영이 육을 끌고 다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3:3에 보면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이 하나 더 나옵니다. 사람을 따라 행합니다. 진리를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지 않고 사람을 따라 행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고 행하거나 다수를 따라 행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 오직 성경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의 은혜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성 
   
요셉의 영성 중에 가장 알려진 부분이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창 39장에 보면 4번이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동행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했다’고 말씀 합니다.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형통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형통합니다. 여러분!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모두 형통하기를 원하시죠? 형통의 비결이 뭔지 압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창 39:2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창 39:3입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23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과 하나님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사 41:10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구속 받은 자기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님께서는 마 28:20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 14:17에서는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 말씀을 근거로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에녹이나 요셉 등 몇 사람들에게만 사용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표현이 적은 이유는 사람의 입장에서 표현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요셉에게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모든 믿는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동행한다고 표현하신 이유는 요셉이 하나님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창 39에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처 입은 요셉, 외로운 요셉을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자고 유혹합니다. 9절에 보니 그 때 요셉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인정합니다.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그 집에 보디발의 아내와 자기 둘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창 40장에 보면 요셉이 감옥에서 두 관원의 꿈을 해석해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두 관원은 요셉의 해몽대로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요셉의 해몽대로 3일 만에 복직이 되어 왕을 섬기게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요셉의 해몽대로 3일 만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 때도 요셉이 꿈을 해몽할 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40:8입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요셉은 꿈을 해몽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능력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41장을 보면 요셉이 애굽의 왕인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요셉의 해몽대로 애굽에 7년 풍년이 들었다가 다시 7년 흉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요셉이 꿈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41:16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역시 요셉이 여기서도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창 45장을 보면 요셉이 애굽의 총리인 자기가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하는 형들 앞에서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45:5,7,8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50장에 보면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여 살기 위해서 비굴하게 아버지를 팔고 있을 때 요셉은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창 50:19,20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내 편에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인정해드릴 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시고 언제나 무엇을 하든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잠 3:6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음식을 먹으면 조미료가 들어간 것과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것의 맛의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주님이 들어간 일과 주님이 들어가지 않는 일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윤리적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 없이도 선한 생각을 할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고, 좋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주님이 빠지면 모든 것이 짝퉁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최근에 천주교의 교황이 된 프란시스 교황은 하나님 없는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고 설교했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신앙인이 하나님이 배제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네,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골 3:17에 보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없는 선한 생각, 주님이 없는 사랑, 주님이 없는 좋은 일, 주님이 없는 평화는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요셉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셉의 영성의 특징 세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첫째, 순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장하는 영성입니다. 영도 성장하고 관계도 성장하고 인격도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동행의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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