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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알지 못하는 신에게 (행 17: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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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신에게 (행 17:22-34) 

본문은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그가 베뢰아에서 전도하면서 많은 열매를 거두었는데 데살로니가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방해를 하는 바람에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두고 혼자서 아테네에 갔습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아직까지도 철학계에 영향을 미치는 현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물론 바울이 아테네에 왔을 때는 과거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서 영향력은 여전하였습니다. 또한 지성과 문화를 자랑하는 아테네는 우상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팀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도시를 둘러보았습니다. 바울이 아테네로부터 받은 첫 인상이 어떠합니까?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습니다. 태양의 신, 달의 신, 바다의 신, 대지의 신, 우레의 신, 바람의 신, 포도주의 신에 이르기까지 기능별로 다양한 신들을 섬기면서 행여나 빠진 영역이 있을까 우려하여 방어 장치로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설치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Pantheon(萬神殿)의 여러 신들의 제단을 돌아 마지막으로 ‘알지 못하는 신’ 제단에 향을 피운 후에 신전을 나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의지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알지 못하는 신’의 정체를 밝혀주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도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국 장로교회 초대 목사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교회를 대표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길선주 목사. 기독교인이 되기 전 그는 도교에 심취하여 오랜 기간 선도 수행에 전념하고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도사로 불렸습니다. 웬만한 시내는 건너뛰었고 통나무 목침도 한 주먹에 부술 정도였습니다. 따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1893년 경 선교사와 조선인 전도자들이 평양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도교를 비롯한 동양 종교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길선주가 이를 배척할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는 새 종교를 알아오라며 제자 김종섭을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김종섭이 기독교인이 되어 돌아와서는 오히려 길선주에게 전도하였습니다. 김종섭은 교회신문인 <그리스도신문>과 전도책자 <이선생전>, <천로역정>등을 길선주에게 갖다 주면서 읽어보라 하였습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길선주는 예수교에 대해 ‘닫혔던 마음’이 조금씩 열렸습니다. 바뀐 김종섭의 생활태도를 보고 ‘어쩌면 예수교가 참 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20년 넘게 신봉해온 선도를 버리고 새 종교로 옮겨가자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김종섭은 고민하는 길선주에게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길선주는 자신이 섬기고 있던 삼령신군(三靈神君)에게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예수도가 참 도인지 거짓 도인지 알려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없었습니다. 

김종섭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삼령신군께 기도하니 어떠하오?” “번민만 날뿐이오.” “그러면 이번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보시오.” “어찌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리오?” “그러면 아버지란 칭호를 빼고 그저 상제(上帝)님이라 부르며 그분께 기도해 보시오.” ‘상제’로 바꾸어 기도한 지 사흘 때 되는 날, “예수가 참 구주인지 알려 주소서” 기도하던 중에 옥피리 소리와 총소리가 방 안에 진동하고 공중에서 “길선주야!”하는 소리가 세 번 들렸습니다. 

그 순간 길선주는 자신도 모르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나를 살려 주소서”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방성대곡하며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교인” 길선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예수의 도’를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고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교 심성 밑바닥에 있으면서도 그 정체를 몰라 모호하게 섬기던 신이 누구인가를 밝혀주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 마음속에 익명으로 존재하던 신이었습니다. 그분은 ‘삼령신군’이 풀 수 없었던 의혹을 해결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이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던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제일 먼저 회당을 방문하여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아테네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을 벌이는데 그중에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금욕적이고 범신론적이며 사후의 심판과 내세를 부정한 반면,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을 삶의 최고의 선으로 여기며 창조를 부인하고 생명의 발생이라든가 운명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역시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며 비꼬았고 또 몇몇은 “외국의 낯선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면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말쟁이로 번역된 spermologos라는 단어는 ‘씨앗을 줍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씨앗을 주은 다음에 집에 가져와 분류도 하지 않고 여러 곡식이 뒤섞인 추수를 거두는 어리석은 농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을 체계 없이 여기저기서 조금씩 주워 모은 지식을 말하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 바울을 붙들어 그가 전하는 새로운 가르침에 대하여 토론을 하기 위하여 아레오바고로 갔습니다. 아레오바고는 그리스인들의 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을 의미합니다. 로마인들은 이 신을 마르스라고 부릅니다. 

아레오바고는 아고라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 도중에 있습니다. 아레오바고가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만약 바울이 동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말을 했다면 각종 신을 섬기는 파르테논을 마주 보면서 설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약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지 살펴보면서 우리의 전도사역에 적용하기 원합니다. 

아레오바고 설교

사도행전에는 9편의 바울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데, 오직 아레오바고 설교만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행해졌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상황과 그곳 사람들의 관심사에 맞게 설교를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1) 맹목적인 종교성과 우상숭배 지적(22-23절)

바울은 아테네에서 그가 관찰한 내용을 가지고 설교를 시작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종교심이 많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볼 때는 종교를 향한 열심이 있다는 뜻이고 부정적으로 볼 때는 지나치게 미신적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한 자기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신에 대한 지식이 있으며 그것은 복음의 진리로 승화되기 전에는 언제든지 미신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이 가진 신에 대한 지식을 설교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바울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단을 언급하자 아테네인들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 낸 우상에 비할 수 없는 참신이심을 하면서 그들의 우상숭배의 잘못됨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우상이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들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를 가지고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는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우상을 아울러 섬길 수 있습니다. 그 우상이 취미, 도박, 정욕, 마약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녀나 일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끌려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를 종교적 다원주의 세대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세상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 기독교를 편협하다고 비판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관용을 베푸는 듯한 자세를 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베드로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전에는 각종 이방신을 섬기는 죄를 참으셨으나 이제 더 이상 우상 숭배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부터 삶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2)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소개(24-29절)

헬라인들은 많은 신들을 섬깁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한분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우주과 그 가운데 존재하는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시며,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는 주재자가 되신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이 알고 있는 그런 신들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올림피아의 신들은 항상 무엇인가 부족합니다. 사람처럼 서로 질투하고, 사람처럼 자기의 부족한 것을 상대에게서 빼앗는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신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하고 증거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태초에 한 사람을 만드시고, 그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있는 모든 민족과 족속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과 족속의 연대를 정하시고, 그들의 삶의 영역을 정하셨습니다. 민족과 족속의 연대를 정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민족의 흥망성쇠를 정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거주의 영역을 정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기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특정한 민족을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찾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고 부르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기에 그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교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시 이방종교의 신관과 하나님을 비교하면서 공통점을 찾아 청중을 설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절대 주권자이심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에 대하여 인간들은 마땅히 순종해야 된다는 것을 밝힙니다. 

창조주와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우리가 할 것은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섬겨야 하는데 이는 심지어 그리스 시인들조차 그 진리를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는 부분은 Epimenides의 ‘Cretica’에서 인용하였고,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부분은 Aratus가 쓴 ‘Phaenomena’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두 구절 모두 제우스신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지만, 바울은 그것들을 창조주 하나님에게 적용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민족들을 다스리시고, 자신을 계시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을 구하도록 하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요구하신 것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과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라 하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그 복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까지 달리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한 심판 선언(30-31절)

바울은 하나님을 먼저 소개한 후 자연스럽게 구속사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증거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참된 길은 오직 예수의 사역을 믿는 것이며, 그를 생명의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함으로써 생명을 얻습니다. 이제까지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바로 알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으니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시기에 범한 죄를 회개하라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만약 회개하고 그분을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합니다. 부활이 심판의 근거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전합니다. 

비록 바울이 성경을 인용하지 않고 십자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헬라 문화의 심장부에서 복음을 상황에 맞게 전파합니다. 종교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만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실 참 신임을 선포한 바울의 믿음과 열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께서 죽으신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 확실한 일인 것처럼, 주께서 세상 만민을 심판하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이 확실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주님의 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레오바고 설교의 특징

바울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이루어진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구속사를 성취하신 분이요,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 온통 널려진 우상을 보고 흥분은 했지만 정작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는 듣는 이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지혜롭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종교성을 인정하고 그곳 시인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폭넓은 접근을 했습니다. 복음전파는 영적인 전투이므로 말씀으로 강하게 도전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상대방을 이해하며 부드럽게 다루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이라는 놀라운 보배를 상황이라는 질그릇에 담아 청중들의 상황에 맞도록 적절한 변화를 주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은 복음적인 설교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와 죄를 정죄하고, 회개의 필요를 보여주며, 심판의 확실성을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구원을 제시했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성공적입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보통 호의적인 반응을 가진 무리와 적대적인 반응을 가진 무리로 나뉩니다. 아테네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조롱을 하였는데, 이는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는 악하다는 헬라사상에 젖어 있어 낯선 부활 교리를 잘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미련한 것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을 더 요구하며 결단을 미루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학문처럼 이해하고 배우려고 했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심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아레오바고 관리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인과 그 외 몇몇이 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이름만 거론되니 숫자로만 보면 바울의 아테네 사역은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그의 사역은 실패한 것일까요? 실패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고린도 전서 2장 2절을 근거 삼아 그러한 논리를 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노라” 

바울이 아테네에서 논쟁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다가 별로 열매가 없었기에 자기의 사역의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는 쓸데없는 논쟁을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겠다는 것으로 추측성 해석을 합니다. 

문론 회심한 사람의 숫자만 보면 바울의 사역이 대단치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기에 숫자에 상관없이 그 사역은 효과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회심한 이후로 언제나 성령이 충만하여 사역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의 사역을 통하여 복음이 얼마나 놀랍게 확산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

울의 전도로 회심한 디오누시오는 아테네 교회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가 40여년 후인 96년 도미티안 황제 때 순교를 당했습니다. 바울의 아테네의 전도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네네 사람들은 바울의 하나님을 부인하고 무익한 우상들로 가득 찬 그들의 판테온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언덕 위에 선 그 날 이래 복음에 반응하는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을 버린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불신자들도 그렇게 행동합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과 부의 우상, 술과 마약의 우상, 정욕과 부도덕의 우상, 권력의 우상, 힘과 건강의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같은 설교를 기대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설교만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설교를 듣기를 원합니다. 감동을 주는 설교, 자기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설교를 원합니다. 죄를 지었으니 회개하라는 설교는 별로 환영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선포되는 메시지를 아멘으로 화답할 뿐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모든 성경을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해석하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현실이나 청중과 타협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현세기복적인 메시지나 철학적, 윤리적 메시지를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을 아침마다 묵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한때는 풍미했으나 그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시켰습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 가에 달려 있지 않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적인 목표의 성취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떻게 전합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전해야 합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삶의 필요나 관심을 접촉점으로 삼아 주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바울처럼 항상 성령에 인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전하려는 열정과 지혜가 균형을 이룬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먼저 각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면서 구원을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전도의 열매를 많이 거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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