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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양면성을 지닌 신앙공동체 (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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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양면성을 지닌 신앙공동체 (행 6:1-7)


교회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에로 택하신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곧 하나님나라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는 세상보다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인들의 신앙이 다 바로 서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며 교회에 나아와 앉아있기는 하지만 생각은 세상에 가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신앙고백을 하는데 삶은 신앙적이기를 기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는데 자기를 부인하기를 싫어하고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주님의 말씀인데도 자기를 부인하지도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도 않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교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의 모습을 보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삶을 보여주는 거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싶어도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당장 그 삶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먹기도 힘들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더더욱 힘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용서를 받고 의롭다고 인정은 되었지만 실제로 우리의 인격과 삶이 의롭게 변화하는 것은 단시간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삶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직 성도로 완전히 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도이며 동시에 죄인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입니다.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 이중성 또는 양면성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의인들의 무리임과 동시에 죄인들의 무리라는 양면성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양면성의 어느 하나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으며 또 소홀히 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한 삶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무리입니다. 따라서 의롭고 거룩한 삶을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 죄인들의 무리임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며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유혹과 악의 공격과 세상의 비방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으며 넘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자각하는 가운데 항상 말씀 위에 바로 서고 기도에 힘쓰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건강한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지닌 양면성은 또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교회가 지닌 양면성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했습니다(행2:41, 47, 5:14). 대제사장과 그 측근들이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기도 하며(행5:17-18) 공회 앞에 끌어다 세우기도 하고(행5:27) 채찍질 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기도 했지만(행5:40)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행5:42). 그 결과 교회는 더 커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더 많아진 것입니다(본문 1절). 그런데 그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가 급성장하다 보니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돌보는 데에 사도들의 눈과 손이 미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빠짐없이 골고루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교회 안에는 크게 두 무리의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이긴 하지만 헬라문명권인 지중해연안에 흩어져 살다가 조국 땅에 돌아와 살게 된 사람들인 헬라파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서 살며 히브리말이나 아람어를 사용하는, 말하자면 본토 유대인들인 히브리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연히 이 두 무리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고 서로 오해하기도 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갑자기 많아진 교인들 사이에 서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매일의 구제”란 “주간 구제”와 함께 전통적인 유대인사회의 구제방식의 하나였습니다. 

본래 “주간 구제”가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빈민에게 열네 끼를 먹기에 충분한 돈을 매 금요일에 지급하는 것인 반면, “매일의 구제”는 상주하지 않는 궁핍한 사람에게 양식과 음료를 그가 머무는 집으로 매일 찾아가 배급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 가운데 이 구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생기자 히브리파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들이나 사도들을 도와 이 구제 일을 하던 히브리파 사람들이 일부러 헬라파 사람들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서로 말이 달라 의사소통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같이 만나 교제할 기회가 없거나 적다 보니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뜻하지 않게 일부 헬라파의 과부들이 구제를 받는 일에서 빠지는 경우가 생겼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사태를 가볍게 보아 넘기지 않고 곧 그 대책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교인들을 불러 말하기를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구제하는 일에만 매달려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서 교인들이 교인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에게 구제하는 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본문 2-4절). 사도들의 이 말을 온 무리가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웠으며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본문 5-6절). 이렇게 교회 안의 문제를 해결하자 교회는 더욱 크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본문 7절). 

우리는 여기서 사도들이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십시오. 그러면 구제하는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본문 4절) 한 말에 주목합니다. 교회에 두 가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념해야 할 기도와 말씀 사역이 있는가 하면 또한 집사들이 맡아야 해야 할 구제사역도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본래 구제사업 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서고 성장하게 되면 자연히 그 사역이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역을 소홀히 하거나 잘못하면 교회 안에서부터 문제와 분쟁이 발생하고 원망하며 시험 드는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다 성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에 대한 오해와 나쁜 소문과 그릇된 인식이 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말씀과 기도라는 고유하게 영적인 사역과 함께 구제와 같은 봉사 사역이라는 사역의 양면성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 두 가지 사역을 다 잘 해야 성장하는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음을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준 것입니다. 

교회는 또 다른 양면성을 지닙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서의 사역의 양면성을 보여주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교회가 지니는 또 다른 사역의 양면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무리로서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을 힘써야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또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방황하며 몸부림치는 세상의 형편에도 눈을 돌리고 세상 사람들의 무지와 고통을 해결해주며 근본적으로 사회의 불의와 부조리와 질병을 치유하여 복된 세상을 만드는 일에도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한 가장 근원적인 사역인 복음전도의 사역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 외에 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의 신자들끼리만 서로 돕고 사랑하며 기뻐하고 만족하는 데 그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혜를 세상에 전하고 증언하며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두 가지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수직적이면서 또 수평적이어야 하는 교회의 사랑의 양면성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그 두 가지 사랑을 다 실천할 때 교회는 진정한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의 신앙, 경건, 영성은 뜨거운 이웃사랑, 성실한 사회적 책임, 건강한 정치참여로 나타나야 합니다. 또 교회의 모든 봉사, 사회참여, 정치활동은 바른 신앙, 경건, 영성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 양면성 중의 어느 하나에만 치중하고 다른 한 면을 망각한다면 교회가 성숙한 신앙공동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는 또 다른 한 가지 양면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오늘과 이 세상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무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은 이들의 무리입니다.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빌3:20) 그리스도인들의 무리가 교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늘 분명히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나라 백성이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상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관심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현재의 삶에만 몰두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에는 관심 없이 그저 오늘 이 세상의 삶을 즐기기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사는 교인들이 허다합니다. 또 이 세상의 삶 속에서 겪는 일시적 실패와 낙심과 좌절과 분노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의 복된 삶의 소망과 확신으로 다스리며 극복하지 못하고 한숨짓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만사를 주장하시며 일시적인 악의 창궐과 불의의 만연을 내버려두시며 세상을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오묘하며 결국은 당신의 선한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시는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의심하고 괴로워하며 방황하는 심령들에게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확실한 도래와 그 복된 완성에 대한 소망을 주고 위로와 삶의 의욕과 기쁨을 되찾게 해주는 사명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합니다. 지금 실패한 자리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한숨짓는 이들이 찾을 수 있고 그들을 품을 수 있는 교회이어야 함과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다시 머리를 들고 멀리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게 하며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의롭고 복된 나라에 대한 믿음을 품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지니는 사역의 또 다른 양면성입니다. 교회는 허구헌 날 모여서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일들과 오늘의 이 세상 이야기만 나누다 돌아가는 사람들의 무리이어서는 안 됩니다. 함께 내일을 이야기하고 영원한 세상을 꿈꾸며 변함없는 진리를 나누는 하나님의 백성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는 신앙공동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오늘 이 세상의 문제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궁극적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교회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며(마6:33)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라는 관점에서 오늘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며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책임감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 가운데 그 나라를 앞당겨 살며 거기에서 모든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제시해줄 책임감이라는 교회 사역의 양면성에 대한 의식이 또한 항상 우리 안에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 이 세상을 살며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사는 백성의 무리입니다. 그런 교회가 진정으로 소망이 있는 신앙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지닌 여러 가지 양면성을 깊이 이해하고 그 모두를 온전히 실천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우리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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