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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가까이 (눅 8:1-3,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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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가까이 (눅 8:1-3, 19-25)


예나 지금이나 제자는 자기 스승과 가까이 지내면 지낼수록 더 잘 배울 수 있습니다. 
대학교 강의실에서 제일 뒤쪽 구석 자리만 골라서 앉는 학생들은 십중팔구 졸기만 할 것이지만, 제일 앞줄에 앉는 학생들은 강의 시간 내내 눈을 또렷하게 뜨고서 교수의 가르침을 경청하게 됩니다. 
운동선수 역시 정기적인 연습 시간이 끝난 후에도 감독이나 코치를 개인적으로 또 찾아가서 조언을 듣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선수가 당연히 더 빨리 성장하게 됩니다. 
  
요즘에 와서는 매우 드물어졌지만 바둑 기사의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아예 스승의 집에서 숙박을 하면서 배우는 '내제자'라는 제도가 있는데, 유명한 조훈현 9단이나 이창호 9단 같은 사람들도 다 그런 '내제자' 과정을 통과한 후에 지금에 와서는 세계적인 기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인 성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 아예 숙식을 함께 하면서 보고 들었던 열두 제자들이 결국 사도가 되었듯이,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면 지낼수록 더 훌륭한 제자가 될 수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더 가까이 교제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겠습니까?
오늘날 현실적으로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친히 찾아가 뵙고 육체적으로 가까이하면서 동행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 옛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적에 그 곁에 가까이 모시면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 비하면 매우 불리한 조건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며 동행한다는 것은 그런 물리적인 거리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몇 사건들이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주신 말씀을 통하여 비록 오늘날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몸으로는 가까이 못할지라도 영적으로 훨씬 더 가까이 모시고 동행하며 사는 길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복음 사역을 위하여 우리의 몸과 물질로 봉사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더욱 가까이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동행하며 수종들었던 여인들이 보여 준 모범이었습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 기록하기를 "1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물질적인 필요를 어떻게 충당하셨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3년 동안 당신과 제자들의 일용할 것을 위하여 어떤 기적적인 보급통로를 사용하지 않으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가 제자들 사이에서 "돈 궤를 맡았다"(요 13:29)는 사실에서도 또 알 수 있습니다. 
회계를 맡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그 단체에 물질적인 수입과 지출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하여 헌금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본문에 기록된 여인들이 그 대표적인 예였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여인들이 예수님의 전도 여행길에 "함께 하여" 즉 동행하며 섬겼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만한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 당시의 여자란 존재는 사회적으로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 수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아무 권리도 없었으며 그저 아버지나 남편의 재산 목록 중에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 랍비들 역시 여자를 매우 열등한 존재로 여겼으며 여자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가르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에 대하여 전혀 달리 대해 주셨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나셨던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개인 특강을 해 주기도 하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야말로 당연히 죽을 길밖에 없어 보였던 여인을 오히려 감싸 주시는, 실로 기상천외한 태도를 보여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여인들도 바로 그처럼 예수님께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을 내어보냄"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녀가 특별히 죄악이 가득한 생활을 했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혹은 그녀의 병이 지독히 심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요안나의 남편 구사는 "헤롯의 청지기"라고 했는데 이는 상당히 높은 관직을 뜻합니다. 
즉 이 여인들은 그 출신이 천하든지 아니면 상류사회였든지 간에 상관없이 각자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체험이 넘치고 있었던 까닭에 자원하여 이 특별 봉사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자기들의 "소유" 즉 돈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충당했을 뿐 아니라 그 전도 여행길에 "함께" 동행하면서 여러 가지 일에 봉사를 했습니다. 
그녀들이 그처럼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하여 섬길 때에 그것을 두고 조금이라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았을 것은 너무나도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데서는 사람대접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자신들이 이처럼 예수님께로부터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또한 요긴한 존재로 쓰임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늘 감격과 보람이 넘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 역시 바로 이처럼 예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물질로써 그 주님의 복음 사역을 위하여 봉사할 때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을 지척에서 섬기는 길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섬긴다고 할 때에는 그것은 받은 만큼 주는 소위 'give and take'의 관계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것을 도저히 같은 양으로 돌려 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그래도 그 상대방을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조금이라도 무엇을 꼭 해 주고 싶어 하는 관계입니다. 

'저 사람이 내 아들 결혼식 때 얼마를 해 주었으니 나도 체면을 세우려면 저 집 딸 결혼식에 얼마는 해 주어야 하겠지.'라는 생각에서 돈이 오가는 관계란 정말 치사하고 부담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효성스러운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봉양하려 할 때에 거기에는 아무 복잡한 계산이 있을 수 없으며, 그저 자기는 부모로부터 그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는 '하늘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은 사랑'을 이미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 섬김에는 무슨 '뒤에 숨어 있는 계산'이나 '체면에 대한 부담' 따위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그처럼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자식도 부모에게서 받은 내리사랑을 안다면 평생을 두고 가까이 모시면서 효도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면, 하물며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는 성도라면 그 주님을 위해 몸과 물질을 다 바쳐 '함께 하며 섬기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이미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일만 달란트'의 사랑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이제 자신의 전 인격과 전력을 동원하여 그 주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봉사 충성함으로써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우리는 그 분과 더욱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실을 아주 깊고도 오묘한 말씀으로 친히 선언해 주셨습니다. 
19절부터 21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9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친이 마리아라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에게는 육신적인 혈육으로 "동생"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마리아가 동정녀로서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 요셉과의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통하여 낳은 자식들입니다. 
로마 천주교는 소위 '영원한 동정녀설'을 지어내어,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이후에도 끝까지 처녀로 지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동생들이란,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가졌던 다른 결혼 관계에서 얻은 아들들이든지 아니면 예수님의 친동생들이 아니라 사촌동생들이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소리는 물론 아무 성경적, 역사적 근거가 없는 억측에 불과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마리아 숭배는 여신 숭배하기를 좋아하는 이방 종교의 심리를 그대로 모방함으로써 비롯된 것으로서, 최악의 이단 교리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역시 다른 성도들보다 결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똑같은 위치에 두고 있을 뿐이며, 오늘 본문의 말씀 역시 이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그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찾아 왔습니다. 
마가복음 3장 21절에 보면, 예수님 공생애 초창기에 예수님의 친속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집과 가족을 다 떠나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데다 온갖 이상한 풍문들만 전해지고 있었으니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 찾아온 것도 예수님을 어떻게 설득해서 집으로 데려가려는 목적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먼저 찾아온 무리들이 이미 가득 집을 메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밖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그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들 앞에서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2장 4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셨다'고 했습니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관계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특별한 지연이나 타고난 혈연 등을 통한 관계보다 훨씬 더 가까운 관계로서 곧 '영적 혈연으로 통하는 예수 가족'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실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보다도 예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한집안에서 성장기를 함께 보내었던 예수님의 친동생들보다도 예수님과 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당신과 영적 핏줄로 통하는 한 가족이 될 수 있는 길이라고 명백히 천명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관계는 그저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 한 가지 때문에 쉽게 성립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취미생활을 함께 나누다가 각별한 친구 사이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아니 그저 함께 술 몇 잔을 마시고 나면 마치 십년지기인양 금세 가까워지는 술꾼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예수님의 사이란 것은 과연 어떤 연고로 성립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한 가지에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달게 듣고 힘을 다하여 따르는' 이 피가 자기 속에 흐르지 않으면,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자증하신 대로 성경 말씀만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는 성경의 선포대로 예수님의 본성 자체가 태초의 천지창조 때부터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말씀이야말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 실제로 교제할 수 있는 예수님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오직 말씀에 은혜를 받고 서로 간증하는 것이 대화의 주제가 되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때에 그런 성도만이 예수님 안에서 진정 '한집안 식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명하는 율례와 법도에 순종하는 것이 공통의 관심사요 함께 손발을 맞추는 공동의 목적이 될 때에 바로 그런 성도 사이에 예수님만을 '같은 주로 모시는' 형제자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록된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함'으로써 실로 '진한 영적 핏줄'로써 교제하는 '예수님의 직계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환난 중에서 오직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더욱 가까이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몸으로는 예수님과 한 배에 있으면서도 그 마음은 오히려 가깝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22절 이하 25절에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 지더라 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던 중에 배 안에서 곤히 잠들고 계셨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사역으로 인하여 주님께서는 매우 피곤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광풍이 호수에 내리쳤다"고 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지형적으로 볼 때 해수면보다 더 낮은 분지에 있어서 때로는 급한 하강 기류가 몰아칠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작은 호수이지만 일시적으로 아주 강한 폭풍을 일으키곤 했던 것입니다. 
특히 그날 닥친 광풍은 반평생을 고기잡이하면서 그 갈릴리 호수에서 살다시피 했던 숙달된 어부 출신의 제자들조차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은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잠에서 깨셔서 곧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고" 그 결과 갈릴리 호수의 광풍이 곧 "그쳐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이라는 비생명체를 가리켜 마치 사람을 대하듯이 '꾸짖으셨다'는 사실은, 마치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 위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온 자연 만물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명백히 보여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찾고 계시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줄 아는 믿음'입니다. 

광풍이 배에 덮쳐 왔을 때 제자들은 자기네들의 생명이 오직 그 자연의 힘에 달려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운명'이나 '재수'가 곧 자기네들의 생명을 결정짓는 주인이고 그들 자신은 그 앞에서 전혀 무력한 존재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제자들이 예수님까지도 자기네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줄로 생각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이 탄 배가 광풍에 뒤집히면 자기네뿐 아니라 예수님까지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엄청난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꾸짖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온 세상 만물까지도 마음대로 복종시키실 수 있는 전능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적어도 당신의 제자라면 믿어야 마땅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같은 배를 타고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자기네의 생명은 순전히 운명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이 그 얼마나 부끄러운 불신앙인지를 깨우쳐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 역시 그 제자들처럼 세상의 '바람과 물결'에 압도당하고 말 때가 자주 있습니다. 
경기가 좀 침체되면 그 때문에 곧 굶어 죽게 될 것처럼 야단법석을 떱니다. 
'혜성의 충돌로 지구가 멸망할 위험이 있다.'라고 어떤 천문학자의 발표가 나오면 당장 그런 공상과학영화를 만들어내면서 난리입니다. 
마치 이 세상의 재수나 운명이 바로 우주 만물과 인류를 주장하는 주인인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착각과 공포의 도가니에 스스로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정말 잔잔해져야 할 것은 '바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꾸짖음을 받아야 할 것은 '물결'이 아니라 바로 우리 속에서 '두 마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흔들리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아무리 광풍이 몰아쳐도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배를 타고 있으면 그것이 뒤집힐 리가 있겠습니까?
내 인생 주변에서 그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해도 우리가 예수님 바로 곁에 딱 붙어 동행하고 있으면 그 인생이 결코 망할 리가 없는 사실을 좀 든든히 믿고 자신의 마음부터 잔잔하게 가라앉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 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우신 배 뒤엎어 놓을 능력이 없도다"(찬 419장)라는 믿음을 가진 자만이 실로 주님과 가까이 밀착해서 동행하며 살 수 있습니다. 
바로 내 눈앞에서 '폭풍'이 휘몰아치고 내가 타고 있는 '배'가 물이 가득 잠기게 되어도 나의 생명은 오직 전능하신 주님께 달려 있음을 철저히 의지하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인생의 광풍으로 인하여 오히려 예수님과는 더욱 가까워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대학부 SFC에 있을 때, 어떤 한 친구가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라는 490장을 두고서 자기는 이 찬송에서 "날마다 더 가까이, 주께로 더 가까이, 주 예수 앞으로 더 가까이"라고 반복되는 가사들이 참 은혜로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어느 한순간에 큰 은혜를 받고 즉시 완전한 믿음에 이르게 되기도 하겠지만, 그것만이 사람이 믿음을 얻게 되는 유일한 길은 아니라는 것을 이 찬송이 잘 보여 준다.'고 했습니다. 
즉 아직까지는 온전하지 못하고 약한 믿음이지만 그래도 '날마다 더', '조금씩이라도 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가고 있는 믿음도 있는 것이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찬송의 가사가 자기에게는 더욱 뜨겁게 공감된다고 간증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한순간에 불같이 뜨거운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을 보면서 흠모하고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그런 확신 있는 믿음을 단번에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지며 그 때문에 불안스러워지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도무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의 간증대로, 이 지상교회 안에서는 한순간에 온전한 믿음에 이르는 경우보다는 날마다 예수님과 조금씩 더 가까워짐으로써 결국 구원의 완성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훨씬 더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와 여러분은 살아 있을 동안에 날마다 주님과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 '경건의 연습'과 '은혜의 체험'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래야만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우리는 그 주님을 정말 반가이 맞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고백하기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 19:27)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오늘 이 자리에 당장 재림하신다면 여러분께서는 그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 것 같습니까?
그 주님이 자신의 눈에 낯설게 보이겠습니까, 아니면 친숙하게 보이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평소에 주님과 친하게 지내지 못한다면, 재림하신 주님 역시 마치 잘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서먹서먹하게 여겨질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그런 사람을 구원의 반열에 세워 주실 리가 만무합니다. 

오직 '날마다 더 가까이'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만이 그 주님 보기를 결코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 세상에 살 동안 자신의 땀과 물질로써 주님을 섬기고, 그 말씀을 새겨듣고 철저히 따르며, 그 주님의 능력에 자신의 전 생명을 완전히 맡기고 평안히 살 줄 아는 성도만이 결국 그 예수님과 영원토록 함께 살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예수님과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처럼 '헌신적인 충성'과 '성경중심의 순종'과 '매사에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으로써 주님과 평생토록 동행하며 살다가 장차 저 천국에서 그 주님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영생의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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