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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하는 교회는 건강합니다 (행 10:3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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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하는 교회는 건강합니다 (행 10:34-48)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행복하고, 우리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함으로 행복하고, 교제함으로 행복하고, 묵상함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훈련하고, 사역하여, 전도하여 더욱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 서쪽, 지중해 해변에 가이사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지금은 로마식 도시의 유적만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총독이 거주하는 행정중심지였습니다. 당연히 로마 군대가 주둔하였습니다. 

이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으로써 백 명의 부하를 지휘하는 고위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늘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날 오후 세 시쯤에, 그에게 천사가 들어와서, “고넬료야!” 하고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네 기도와 자선 행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서,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신다.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데려오너라.”

이에, 고넬료는 하인 두 사람과 자기 부하 가운데서 경건한 병사 하나를 욥바로 보내 베드로를 초청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놓고,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들어올 때, 엎드려서 절하여 맞아들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베드로를 통하여 로마 사람에게, 그것도 로마군의 지휘관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전도되었습니다. 
  

I. 전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전도에 관하여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전도란 무엇입니까?

34절과 35절 말씀입니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 들어간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하였던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베드로의 놀라움이 베여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로마 사람을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서 로마인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것도 로마 군인 백부장에게 전도가 되었습니다.

1. 전도는 경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경계를 넘어간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 들어가서 첫 번째로 하였던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행 10:28). 

유대인이 유대인 아닌 사람과 사귀거나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 되어있다는 것을 유대인 베드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인 고넬료도 이런 유대의 풍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으뜸 제자라고 불리지만 아직 유대인이라는 인종의 벽을 넘어서는 것이 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유대인이라는 인종의 벽을 허물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넬료 만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베드로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네가 무할례자, 즉 유대인 아닌 사람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행 11:3)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벽을 넘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베드로는 그 벽을 넘어갔습니까? 

베드로는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그의 앞에까지 드리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다시 그에게 들려진 음성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령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시기를 아무 의심 말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행 11:12).

베드로에게조차 유대인은 정결하고 유대인 아닌 사람은 부정하다는 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선을 허무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이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유대 종교로써는 유대인의 선을 넘어서 로마인에게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인종의 선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유교라는 종교로써는 양반의 벽을 넘어서 상인에게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신분의 벽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선을 긋고 벽을 쌓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전도는 이 벽을 허물고 선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누구에 대해서든지 벽을 쌓고 선을 그어서는 안 됩니다. 전도는 경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의 약속으로 얼마든지 부르시는 분이십니다(행 2:39).

사람의 편견을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 전도란 무엇입니까?
36절 말씀입니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유대인 베드로가 로마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설교한 복음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화평의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고넬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님의 복음, 화평의 복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종교인이기는 하였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하여 베드로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화의 복음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 


2. 전도는 평화를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예수님을 통하여 누리는 평화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 방도 평화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지난 번 스리랑카를 방문하고 충격 받은 것이 있습니다. 

스리랑카는 150년 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습니다. 포르투갈은 가톨릭 국가입니다. 당시에는 억지로 성당에 나가야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150년 간 네덜란드가 다스렸습니다. 네덜란드는 개혁교회가 지배하는 나라였습니다. 이번에는 예배당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150년 간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영국은 성공회가 국교인 나라입니다. 이번에는 성공회 예배당에 나가야 했습니다. 

스리랑카는 도합 450년간, 유럽 기독교 제국의 식민 지였습니다. 그런데 1948년 독립하여 식민지 시대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60여년이 지난 오늘 스리랑카는 국민의 70%가 불교신자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가톨릭이든, 개혁교회이든, 성공회이든 모두 십자가를 내세웠습니다. 450년간이나 십자가를 휘날렸는데 식민지 통치가 끝나자마자 불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어찌된 이유입니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아주 중요한 이유는 총과 대포를 앞세우는 식민지의 정책으로는 신앙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과 함께 들어간 종교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오히려 반감만 살 뿐이라는 것입니다.

전도(conversion)는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강제로 예수님을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 생긴 종교를 억지로 믿도록 강요하는 개종(proselytism)’은 안 됩니다.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데 폭력을 사용하면 결과는 평화의 복음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고스라니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전도는 겸손히 십자가를 지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되기를 소망합니다.  

또 전도란 무엇입니까?
42절 말씀입니다.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전도를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의 방법은 증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증언하다[diamartuvromai/디알말튀로마이]’는 증인이 되는 것을 통하여 진지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증인은 자신이 본 것을 보았다고, 들은 것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증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직접 경험입니다. 전도는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3. 전도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증인’과 관련된 말이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39절은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40절은 “나타내시되”라고, 41절은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문제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이었다 나은 사람의 부모에게 따졌습니다. 정말로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는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부모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요 9:20-21)

부모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이 증인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먼저 행복을 이야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는데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위증입니다. 행복한데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도 역시 거짓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하다고 증언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여, 그 행복을 증언하시기 축원합니다.  

전도는 경계를 넘어서 평화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건강이 있습니까?
  

II. 건강  

우리는 전도를 통하여 진정으로 건강하여 질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정의하고 있는 건강은 ‘질병이나 손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건강은 그 이상입니다.

43절 말씀입니다.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경험하고 전하여야 할 내용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건강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것을 넘어서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1. 죄 사함을 받습니다.

마음속에 죄 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죄의 응어리가 풀어져야 건강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무당들은 굿을 통하여 한을 풀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속의 응어리뿐만 아니라 숨은 죄까지도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것은 십자가의 보혈뿐입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이것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것을 믿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여 그 사람도 행복하게 하는 전도를 멈출 수 없습니다.

용서 받은 행복을 경험하였기에, 용서받는 행복을 전하는 건강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건강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것을 넘어서 영적인 것이라는 이유가 여기에서 다시 분명해집니다.

44절과 45절 말씀입니다.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리셨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갔던 유대인들은 로마사람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부어 주신 사실에 놀랐습니다. 성령 받는 이들은 방언을 말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였습니다. 진짜 건강은 그 사람의 영에 하나님의 영이 머무시는 것입니다.

2. 성령이 함께하십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건강은 1차적으로 질병이나 손상이 없는 신체적인 능력입니다. 2차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건강한 것입니다. 몸은 건강한데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그러나 몸은 건강하지만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여 사회에 끔찍한 해악을 끼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몸이 건강한 그 이상 마음이 건강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건강하기 위하여 영적으로 건강하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스마음에 원하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마음을 지배하는 영이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그 영이 건강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들어와 계셔야 건강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 생길르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되게 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계셔야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계셔야 영혼이 잘 되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인정하십시오.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여러분에게 있어 영과 혼과 육이 모두 건강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건강한 사람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47절과 48절 말씀입니다.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자기들과 함께 며칠 더 머물러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유대인과 로마인이라는 선이 없었습니다. 모두 성령을 받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전혀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함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3. 소속이 생깁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소속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건전한 집단에 소속하여 바람직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은 건강한 교회에 소속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성탄절 예배를 끝낸 목사님이 예배당 출구 앞에 서서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교회에 가끔 나오는 한 젊은이와 악수하면서 말했습니다.

“형제님, 하나님의 신실한 군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이미 저는 하나님의 군인입니다.” 
“그래요? 그런데 왜 성탄절을 제외하고는 볼 수가 없지요?”
“저는 하나님 나라의 특수부대 비밀요원이거든요!”

비밀 요원이 많은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비밀 요원처럼 꼭꼭 숨어있는 교인도 건강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건강한 교회에 속해야만 합니다. 영적 건강인 죄 사함과 성령의 임재는 인간의 기준으로 잴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에 소속하여 성장하여 갈 때 행복한 성도가 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성도임을 세상에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자랑스러운 교회의 가족임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하여 행복한 성도가 되십시오. 그런 성도가 많아 질 때 우리교회는 더욱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가족으로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경계선을 넘어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경험한 행복을 증언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전도해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습니다. 전도해야 성령 받는 사람이 있게 됩니다. 전도해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소속하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이것이 전도의 온전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은 자신의 행복을 전하는 더욱 건강한 우리교회와 모든 한국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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