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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다시 서라! (창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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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다시 서라! (창 17:1-8)


우리는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수많은 실망과 염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낙심과 실망은 결국 자신을 황폐한 광야의 한 가운데로 몰아내고 우울증과 무기력으로 자신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병자 아닌 병자 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 그와 같은 모든 삶의 실망을 뒤로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진실로 사모해 보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은 환경적인 실망이 자신을 삼키지 못하도록 믿음으로 버텨야 합니다.  믿음이란 환경적인 실망이 자신을 삼키지 못하도록 하늘의 능력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나 능으로 되지 않고 여호와의 영으로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마다 때마다 육신의 법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 속에는 실망과 분노가 파도처럼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는 하나님의 믿음의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 믿음을 붙들어야 됩니다.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운 때일수록 더욱 내 영혼에 성령으로 채움을 받아야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믿음의 꿈은 절대로 가짜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온전히 맡기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지만 그러나 아직도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당시의 고대 사회에서는 자식이 미래였습니다.  그런데 약속된 자식을 얻지 못하고 99세가 된 아브람, 이제 자신의 인생의 모든 꿈을 접어야 하는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가리켜 "엘 샤다이"(EI Shadday)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여기에서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을 히브리 원문에 보면 "엘 샤다이"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엘 샤다이"라는 이름으로 계시되신 하나님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그의 모든 인생은 바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건들 앞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다시 서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내 힘만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어떤 위기를 겪어 보셨습니까?  그때 정말로 필요한 하나님이 바로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인생 최대의 희망은 아들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아브람에게 다가오셔서 이런 희망을 꺾지 않으시고,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후 숫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들 소식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브람의 나이 99세, 그의 부인 사래의 나이 89세가 되었습니다.  이 부부의 나이에 이제 무엇을 더 기대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이 시기의 아브람과 사라의 몸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 19절에서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그렇습니다.  자녀의 생산에 관한 한 그들의 육체는 이미 죽은 몸이었습니다.  아브람의 부부는 이제 모든 희망을 접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브람 부부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바로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구약에서 엘 샤다이란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대목이 바로 오늘 본문의 창세기 17장 1절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앞에 다시 서는 그 순간, 그것은 바로 아브람에게는 죽었던 희망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은 그냥 단순한 능력의 하나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 샤다이, 이 이름은 따뜻한 가슴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전능자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 샤다이'는 '엘'과 '샤다이'라는 두 단어의 결합입니다.  엘(EI)만으로도 능력의 하나님, 강하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샤다이라는 단어가 붙었습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샤다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인 '샤드'에서 왔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샤드'는 본래 어머니의 젖가슴이나 깊은 계곡이 있는 높은 산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단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샤다이, 혹은 샤드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쓸 때 그 알파벳의 첫 자인 "쉰"이라고 합니다.

앞에 스크린에 "쉰"이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가만히 보면, 어머니의 젖가슴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보일 것입니다.  혹은 산 같이 보이지도 않습니까?  여기 좌절과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 아브람 부부를 이해하시고 그들 곁에 따뜻하게 다가와 그들을 건져내시는 어머니 같고 태산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처해 있는 위기가 무엇입니까?  가정의 위기입니까?  직장의 위기입니까?  관계의 위기입니까?  자식들의 위기입니까?  경제적인 위기입니까?  미래의 위기입니까?

나아갈 길이 없어 보이십니까?  당신의 위기를 아무도 몰라준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만나야 할 하나님은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다시 서십시오.  아브람의 나이 99세, 모든 꿈을 버려야 했던 절망의 끝자락에서 찾아오신 전능하신 하나님, 그 따뜻하신 능력의 하나님의 품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십시오.

여러분, 혹시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제일 많이 등장하는 성경책이 어떤 책인지 아십니까?  욥기입니다.  엘 샤다이라는 단어가 구약에 모두 48회나 나오는데 그 중에 무려 31회가 욥기에 나옵니다.  고통의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하나님이 바로 전능하신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욥기 5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아픈 자들을 싸매시고, 고쳐주시는 하나님, 그가 바로 전능하신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고통받는 자녀들에게 다가오셔서 싸매어 주시고,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엘 사다이!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고통의 터널에서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새 아침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도 그 사랑스런 능력의 이름, 엘 샤다이를 불러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온전히 다시 서 보십시오.  그러면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올라가는 것과 같은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위기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그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다시 서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그는 위기를 넘어서는 미래의 축복자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냥 문제의 해결자로만 이해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너무 좁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냥 내가 위기를 만나고, 문제를 만났을 때에만 필요한 해결사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기의 상황에서 구출해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끝나버리고 맙니다.  이런 하나님으로만 이해한다면 어쩌면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일찍이 철학자 니체가 비판한 것처럼 약자를 위한 지팡이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비단 우리를 과거와 현재의 위기에서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미래를 약속하시고, 그 미래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희망의 세계에로, 비전의 세계에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가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본문을 대하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단순히 아브람에게 평생의 숙제인 아들 한 사람을 얻게 하시려고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지금 하나님께서는 낙심하고 좌절에 빠져있던 아브람에게 찾아오셔서 언약을 맺자고 하십니다.  어떤 언약입니까?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번영의 미래를 향한 언약을 제안하십니다.  그리고 그 미래가 틀림없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서 그에게 펼쳐질 새로운 미래를 상징하는 새로운 이름을 아브람에게 허락하십니다.
본문 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라함의 본래 이름은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이라는 말은 "높으신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도 좋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이름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번영의 미래를 약속하시면서 주신 새 이름은 아브라함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많은 민족들(무리들)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생애는 단순히 존경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가족과 종족을 뛰어넘어, 심지어 자기 민족을 뛰어넘어 여러 민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자로 그를 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의 이름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역사를 통해서 실현된 약속이 아닙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도 이스라엘인이 아닌 이방인에 속한 한국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자처합니다.  영적으로는 적어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그를 가리켜서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더 이상 아브람이 아닙니다.  "높으신 아버지", "존경받는 아버지"라는 이름도 아주 좋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세상에서 존경받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인생은 단순히 존경받는 것으로만 끝내야 하는 인생이 아닙니다.  존경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좁은 삶의 테두리를 뛰어넘어 그보다 훨씬 더 넓은 환경 속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좁은 삶의 영역을 벗어나 저 열방을 향해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는 훈련을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 민족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생애를 아브라함에게만 기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삶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이름만 바꾸신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 사래의 이름을 바꾸어주신 것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이 이어지는 15절과 1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동일한 약속을 그의 아내에게도 주십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을 사래에서 사라가 되게 하십니다.  "사래"라는 이름은 "공주"라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신데렐라 공주의 인생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여성들의 목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당신의 딸들이 그냥 공주 인생에서 끝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 모든 민족들의 어머니, 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어머니의 인생을 살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여인들은 단순히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공주로서의 인생에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그보다 훨씬 더 차원이 높은 인생의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공주 인생이 아니라 전도하고 선교하는 인생을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여성분들에게 이렇게 권면해 보시기 바랍니다.
"공주가 되기 보다 전도하는 어머니가 되세요."

사전에 보니까 일종의 과대망상증이라 할 수 있는 심리현상을 가리켜서 공주병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한참 공주병 시리즈가 유행할 때 여러 가지 공주들이 출현했습니다.  백설공주: 백만인이 설설 기는 공포의 주둥아리.  자신이 어떤 공주병에 걸렸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증세입니다.  백설공주는 사과만 먹으면 어쩐지 죽을 것 같다.  신데렐라공주는 자정만 되면 왠지 나는 불안해 진다.  인어공주는 바다만 보면 헤엄치고 싶다.  낙랑공주는 북만 보면 찢어버리고 싶다.  평강공주는 바보만 보면 나는 결혼하고 싶다.

공주병 말기 증상입니다.  어떤 여자가 공주병이 너무 심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전 너무 예뻐서 고민이에요."  의사가 이 여인에게 묻습니다.  "자, 이걸 상상해 보세요.  정말로 예쁜 여자를 봤어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여인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계속 쳐다 볼 거예요.  계속요.  그렇게 쳐다보다가 팔이 아프면 거울을 내려놓을 거예요."

우리는 전공을 살려야 합니다.  전공, 전도하는 공주 말입니다.  전도하는 공주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전도하는 공주는 사람만 보면 나는 전도하고 싶다.  좋지 않습니까?
옆에 있는 분에게 이야기합니다.  "전도하는 공주가 되세요."
그러면 옆에 있는 분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니나 되세요."
그래서 이렇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제가 전도하는 공주가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는 존경 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공주 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세상 속에 나아가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아버지, 영적인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새 이름 속에는 열방을 향한 당신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많은 무리들, 많은 민족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도구로 많은 무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을 사는 것, 심지어는 우리 민족의 영역을 뛰어넘어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지구촌에 사는 인생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그 마지막 바램, 하나님의 마지막 비전을 아십니까?  요한계시록 7장 9절과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마지막 비전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민족들과 백성들이 마지막 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와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바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선교와 전도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복음을 붙잡고 세상 속에 나아가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그 결과는 선교와 전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보시는 것은 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긍휼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앞에 펼쳐지는 인생의 현장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냥 하루 하루, 날마다 다가오는 급박한 문제만을 해결하다가 인생을 끝내시겠습니까?  아니면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다가 여러분의 인생을 마무리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다가, 어떻게 사시다가 주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분명히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은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그 위기를 넘어서서 미래의 축복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축복을 나누며 이웃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인생을 살도록 우리를 돕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다시 서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드리며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의 온전한 믿음을 시험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 밖에 없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 때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99세가 되도록 자녀가 없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모든 꿈이 포기되었을 뿐 아니라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점이었습니다.  아마 이 시점에서는 그의 믿음도 흔들렸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품어왔던 그의 꿈도 깨어졌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그의 인생에 즐거움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 나타나신 하나님이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여전히 내 앞에서 살아야 한다.  내 앞에서 행하라."  나를 보고 나를 의식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완전하라"는 말을 단순히 우리말로 완전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이나 공동번역과 새번역에서는 "완전하라"는 말을 "흠 없이 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blameless"  적어도 결정적인 흠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너의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의 인생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서교재사에서 발간한 현대어 성경에 보면 이렇게 의역하고 있습니다.
"너는 언제나 내 앞에서 살아가도록 하여라.  내가 항상 너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도록 하여라.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아라.  그리고 바른 길만 걷도록 하여라."

어둠 속에서도,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의식하는 가운데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신뢰하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인생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의식한다고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실망을 주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내가 부모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부모님께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면 함부로 살지는 못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의식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릇된 길로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결코 시험에 들거나, 허우적거리면서 방황하거나, 거짓되고 망령된 행동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영원히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언제나 내 앞에서 살아가도록 하여라.  내가 항상 너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도록 하여라.  그리고 제발 믿음 없는 자의 삶을 살지 말고, 믿음 있는 자의 삶을 살아라."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다시 서는 순간부터 완전히 변합니다.  그 전에 아브라함은 상당히 조급했습니다.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다시 서면서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인내합니다.  그리고 이런 인생의 연단을 통해 마침내 그는 인내하는 믿음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근대 역사에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유명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입니다.  그에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며 묵묵히 갈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아주 좋은 대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링컨은 유달리 자기 꿈의 실패를 많이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정치가로 입문하고 나서 그는 무려 일곱 번이나 연속적으로 정치가로서 낙선의 고배를 마시게 됩니다.  1832년 주의회 선거에서 낙선, 1838년 국회 하원의장 선거에서 낙선, 1843년에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패배, 1848년 다시 하원의원 진출에 낙선, 1855년 상원의원 선거에 낙선, 1856년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해서 낙선, 1858년 다시 상원 진출에 낙선, 연이어 일곱 번이나 실패한 끝에 그는 드디어 1860년 미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야말로 7전 8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참모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까?"  링컨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내 꿈은 더 자라났고,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내 믿음은 더 온전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인내하는 신앙을 통해서 그는 마침내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경받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런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그의 부인은 신경증 환자였는데, 그래서 신경질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의 아내가 건어물 가게에 가서 물건을 흥정하다가 상점 주인과 대판 싸우고 무려 15분간이나 주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다음 날 가게 주인이 링컨을 만나서 "당신 부인이 정치가의 부인으로서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나에게 무려 15분간이나 욕을 퍼붓고 갔습니다."  링컨은 정중하게 그 주인에게 사과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저는요 15분이 아니라 15년간이나 인내하고 살았거든요.  제 아내에게 15분간 당하신 고통을 참고 잊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링컨도 그렇고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은 한 순간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인내하는 믿음을 통해서 그들은 마침내 믿음의 사표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의 상황이 어렵다고 느끼십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하신 분은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능하고 사랑이 많으신 전능자 그분을 만나지 않으시겠습니까?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보십시오.  그리고 정결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서십시오.  그러면 전능자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인생의 길이 어두우십니까?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십니까?  미래가 안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만나야 할 분, 그분은 바로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들어야 할 이름은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엘 샤다이, 당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면 어둠은 물러갈 것입니다.  새 아침은 밝아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내가 너에게 약속했고 그 약속을 내가 너의 생애를 통해서 이루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너무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너무 초라하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한계에 갇혀서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초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네 한계를 벗어나서 내가 네게 지시한 인생을 살아라.  나는 너의 전능한 하나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마다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을 의식하는 가운데 그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십시오.  그리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름 앞에 내 생애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애로 나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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