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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을 피하는 2대 요소 (욜 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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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피하는 2대 요소 (요엘 3장 1-13절)

< 전쟁준비는 심판의 전조입니다 >   

어렸을 때 이웃 동네와 전쟁놀이를 하면 어떤 때는 새총과 나무 장총으로 살벌하게 싸웁니다. 싸움 지시는 동네 중학생들이 하고 실제 싸움은 초등학생들이 합니다. 저는 뭣도 모르고 졸병 노릇을 하며 열심히 다른 동네 아이들과 새총 들고 싸우면서 마음속에서는 새총에 눈이 맞아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중학생의 지시를 따라 싸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야비한 중학생들입니다. 순진한 애들을 싸움 붙여 놓고 자기네들은 전쟁놀이를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이 직접 싸우지 않고 남북을 싸움 붙일 때 냉철하게 대응해서 그들의 병정놀이에 순진하게 희생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은 이웃나라의 전쟁을 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처럼 남북이 붙기를 은근히 바라는 이방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즐겁게 하는 병정들이 되면 안 됩니다. 걸어오는 전쟁을 두려워해서 등을 보이면 안 되지만 힘을 기르고 지혜를 모으고 냉철함을 유지해 최대한 전쟁은 막아야 합니다.  

요새도 북한은 호전적인 말로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합니다. 북한보다 훨씬 잘 살던 이라크와 리비아가 얼마나 순식간에 무너졌습니까? 남북이 전면전을 벌이면 의외로 북한정권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조만간 무너질 가능성도 큽니다. 아무리 외부 소식을 차단하려고 해도 차단이 힘들어지니까 북한 정권의 스트레스와 초조감은 커지고 있고 그래서 언어도 더 거칠어지면서 입만 열면 위협과 공갈 등의 교양 없는 언어들을 내뱉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최후의 때를 앞둔 자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지금 북한 국제적으로 고립 상태입니다. 누가 고립시키지 않아도 외부의 영향력을 차단해야 하는 북한 정권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습니다. 그 정권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또한 진짜 승리를 원하면 은밀히 힘을 길러야 하는데 상대국들을 공개적으로 위협하고 들쑤시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불안하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북한이 호전적인 말로 위협하는 것은 요란한 빈 수레임을 자인하는 모습입니다. 

입으로는 전쟁을 외쳐도 미치지 않았다면 북한 정권은 전쟁을 일으키기 힘듭니다. 수십 년 간 주민을 세뇌하며 잘 살아온 1%의 상위 기득권층이 그들의 기득권을 순식간에 잃는 모험을 하겠습니까? 리더는 전쟁이란 말을 쉽게 내뱉지 말고 타당한 전쟁도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전쟁을 대비하되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처럼 최후의 수단인 전쟁을 그토록 쉽게 언급하는 것도 끝으로 치닫고 있는 모습입니다.  

지금 북한 지도층은 막말을 해도 막상 전쟁이 터지면 제일 먼저 도망칠 것입니다. 6.25전쟁 때 중국과 소련을 배경 삼아 훨씬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확실히 이길 줄 알고 벌인 전쟁에서도 못 이겼습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날은 북한 정권의 제삿날이 될 것입니다. 그처럼 결국은 져서 다 잃는 전쟁을 북한 기득권층이 일으킬까요? 결국 가만히 있으면 무능해 보일까봐 말로만 객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만약 김정은이 전쟁을 일으키면 기득권층의 반발로 갑자기 생포되거나 살해될 가능성도 큽니다. 그처럼 그들 정권은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기에 말로 위협하고 힘의 과시를 위해 핵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 북한은 사실상 전쟁 수행 능력도 없고 전쟁을 할 의지도 없습니다. 불안하니까 불안을 감추려고 호전적인 언행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격지심이 있으면 가벼운 말에도 큰 상처를 받고 열을 내며 달려듭니다. 지금 북한은 겉으로는 자립갱생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돈과 식량을 구걸하며 국가적인 문전걸식을 해서 국가적인 자격지심이 극대화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작은 말에도 크게 상처 받고 호전적인 말을 쏟아내고 힘을 과시하고 싶은데 50-60년 된 무기로는 안 되니까 핵 위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곧 멸망이 임박했음을 느끼게 됩니다.  

며칠 전, 북한 지도부는 한국을 ‘최종파괴’ 하겠다고 또 위협했습니다. 왜 ‘최종파괴’란 용어를 썼을까요? 그들은 자기들이 혹시 전쟁에 이겨도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을 가질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우리들이 이미 북한 정권의 실상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대한민국을 점령해도 통치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한국을 ‘적화통일의 대상’이 아닌 ‘최종파괴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얼마나 저주스런 말입니까?   

그런 저주스런 말을 너무나도 쉽게 내뱉는 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정치적 이념보다 국민의 생존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념을 앞세워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위협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러나 비겁한 기득권자는 너 죽고 나 죽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습니다. 전쟁이 나면 자신들의 기득권이 박탈될 것임을 잘 알기에 북한의 기득권자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쟁 날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합니다.  

이제 북한 정권의 끝이 점차 다가오고 있습니다. 앞뒤 퇴로가 다 막혀서 개방을 않으면 ‘북한’이 망하고 개방하면 ‘정권’이 망합니다. 안 망해 보겠다고 핵을 개발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북한 정권의 말로를 재촉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이 시기문제임을 북한 기득권층도 잘 알고 있기에 아무리 사상통제와 감시를 해도 기득권층에서부터 통일 후에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서 반정을 꾀하는 일도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 그 날이 갑자기 올 수도 있기에 그런 상황을 맞을 준비를 늘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 이방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은 대개 이렇게 진행됩니다. 처음에는 기근으로 찾아옵니다. 그래도 회개가 없으면 질병으로 심해집니다. 그래도 회개가 없으면 전쟁으로 발전합니다. 그래도 회개가 없으면 결국 이방의 노예가 됩니다. 그처럼 심판 때에는 이방인들이 심판의 도구로 이용되지만 회복 때에는 심판 도구로 활용된 이방인들이 오히려 심판 받습니다. 본문은 유다와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이방인들이 심판당하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구절에 나오는 ‘여호사밧 골짜기’는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압, 암몬, 에돔 연합군을 물리친 골짜기입니다(대하 20:26). 하나님이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유린한 나라들을 심판할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때 이방인들은 어떻게 이스라엘을 유린했습니까? 백성들을 잡아 인신매매를 했습니다(3절). 또한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상인들은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해 그들의 신전으로 가져갔고(5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 헬라 지역으로 노예로 팔기도 했습니다(6절). 그러나 회복의 때가 되면 하나님이 거꾸로 그들을 심판하는데 그때는 오히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의해 노예로 해외로 팔리게 된다고 합니다(7-8절).  

어떻게 이방인들이 노예가 됩니까? 힘을 키우고 전쟁 준비를 하다가 결국은 전쟁에 져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심판 전에 꼭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멸망할 사람들이 전쟁 준비에 광분하는 것입니다. 본문 9-10절 말씀을 보면 심판을 앞둔 민족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그것은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병사를 소집하고 보습으로 칼을 만들고 낫으로 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쟁 준비를 하며 교만한 언어로 호전성을 드러내는 것은 멸망의 전조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을 단번에 심판하려고 그들이 연합군을 이루게 할 때가 많습니다(11절). 그러므로 대적의 연합군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된 연합군은 오히려 더 오합지졸이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2절). 그처럼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추수 때가 가까이 왔다고 요엘은 선포합니다(13절).  


< 심판을 피하는 2대 요소 >   

이 말씀을 보면서 핵 개발을 하며 전쟁 준비에 광분하는 북한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느낍니다. 이때 민족의 장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본문 10절에서 호전적인 전쟁광들이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드는 것이 심판이 임박한 증거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면 거꾸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2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평화를 추구하는 삶  

전쟁을 두려워하지는 말되 전쟁은 최대한 막아야 합니다. 칼을 쓰면 대개 칼로 망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군대와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오자 베드로가 칼을 빼서 말고란 하속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마 26:52).”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교육의 최대 목표는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칼을 만드는 교육은 망하는 교육입니다. 스파르타의 교육은 칼을 만드는 교육이었고 아테네의 교육은 보습을 만드는 교육이었습니다. 결국 아테네가 이겼습니다. 지금 북한은 증오와 살기로 보습을 만들어야 할 재원으로 핵을 만들며 동족의 가슴을 겨냥해 칼을 만들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무리 통일이 절실해도 전쟁을 통한 통일은 없어야 합니다.  

물론 분단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분단은 정치와 경제 발전을 크게 막습니다. 또한 강대국에 기대면서 민족의 주체성도 약해지고 칼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내세우면서 민족의 양심도 약해집니다. 자세히 보면 퇴폐문화와 한탕주의도 대개 칼을 든 자로부터 옵니다. 결국 민족의 장래를 막는 제일 원흉은 분단의 비극이기에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민족이 되려면 분단의 비극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극복합니까? 월남은 무기로 통일했고 독일은 돈으로 통일했지만 우리는 평화의 복음으로 통일해야 합니다.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마침내 해방의 때가 된 줄 알고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주님!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가 이때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는 알 필요가 없다. 오직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 성령을 받고 로마를 향해 갈던 칼을 보습으로 바꾸고 그 보습으로 로마를 점령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성령이 임한 마가 다락방은 제자들의 가슴을 쳐서 칼을 보습으로 만들고 창을 낫으로 만든 영적인 대장간이었습니다. 당시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계속 칼을 품고 있었고 말고의 귀를 칠 때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칼을 칼집에 꽂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었고 그 보습을 들고 로마로 가서 로마를 정복한 것입니다. 

그처럼 성령을 받아 칼을 보습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공산주의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폐단과 타락도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자본주의와 짝하며 외적인 성장신화에 사로잡혔던 교회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삶을 앞서 실천하며 방어적인 전쟁대비는 하되 호전적인 마음은 최대한 자제해야 합니다. 그처럼 칼을 보습으로 만들려고 해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2. 평안을 추구하는 삶   

외적인 평화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 안에서 평화를 이루어내는 내적인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언제 얻습니까? 기본적으로 일단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는 평안을 빼앗습니다.  

요새 사랑의 교회 사건으로 한국 교회가 또 큰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지금은 건축 문제에서 담임목사의 박사논문 표절 문제로 옮겨졌습니다. 그 문제로 요새 많은 박사 목사님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언제 논문 검사하자고 할까봐 장로님들 앞에서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있다고 합니다. 큰 교회 담임목사라면 당연히 걸쳐야 한다고 생각해서 편법으로 받은 외국 신학교 박사 학위가 부메랑이 되어 지금 많은 박사 목사님들의 표정이 이런 표정이라고 합니다. “나 떨고 있니?” 죄는 평안을 빼앗습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실수로 아빠가 키우던 거위를 새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그러자 야단맞을 것이 두려워서 그 거위를 땅에 파묻었습니다. 나중에 아빠가 물었습니다. “철수야! 거위 못 봤니?” 그때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습니다. 그때부터 철수는 아빠의 눈치를 보고 슬금슬금 피했습니다. 죄 때문에 평안을 잃은 것입니다.  

그 상황을 파출부 아줌마가 보고 일을 시켰습니다. “철수야! 설거지 좀 해라!” 철수가 말했습니다. “아니? 왜 아줌마 일을 저 시켜요?” 그때 아줌마가 말했습니다. “너 거위 죽이고 땅에 파묻었지?” 그때부터 약점이 잡힌 철수는 부모님만 없으면 파출부의 종이 되어 설거지와 청소를 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결국 사탄의 종이 됩니다.  

어느 날, 종처럼 지내던 철수가 너무 힘드니까 맞을 각오로 아빠에게 울며 고백했습니다. “아빠! 사실은 제가 거위를 죽였어요. 그리고 겁나서 땅에 파묻고 거짓말을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때 아빠가 말했습니다. “얘야! 다 알고 있었단다. 아빠에게는 거위보다 네가 더 중요해.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죄를 숨기면 더 고통스럽단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그렇게 말하며 등을 두드려 주자 철수는 대 자유를 얻고 마음의 평안도 얻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평안을 잃고 사탄의 종이 됩니다. 사탄은 못된 파출부처럼 우리 죄를 들먹이며 협박합니다. “아무개야! 너는 어찌 그리 양심이 없냐? 네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생각해 봐! 네 주제에 무슨 교회를 다녀? 너 정말 철면피구나!” 그때 고백하십시오. “사탄아! 네 말대로 나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어! 잘못도 많이 했어!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이 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어! 저리 비켜! 나는 교회 나갈 수 있어!”  

죄 사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합리화나 회피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심령의 자유와 평안을 찾으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생각은 사람 기준에 의한 바른 행동을 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못된 행동을 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물론 행동도 잘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보다 사람의 중심을 더 살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목사님 교회에 심한 골초가 있습니다. 주일 예배 때 교우들은 그분 근처에 가서 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담배 냄새가 확 풍기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아멘!”도 잘하니까 목사님은 그 성도도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담배를 피면서도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는 것이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때로는 부족한 모습을 노출해도 예배하는 마음 한 가지만 있다면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제일 고마운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는 사람이나 은밀하게 헌신하는 사람도 고맙지만 술 담배를 하면서도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도 고맙습니다. 자신은 “술 담배를 해서...”라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을 목사는 “술 담배를 해도...”라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생각과 목사의 생각이 그렇게 다르듯이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 다를 수도 있습니다. 주일아침에 부부싸움을 했거나 다른 일로 속상해서 예배드릴 기분이 아니어도 변함없이 주일성수를 하면 본인들은 잘 체감하지 못해도 목회자는 그분에게 얼마나 고마움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목자장 되신 예수님도 똑같이 고맙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처럼 부족한 모습이 있어도 꾸준히 예배에 나오는 사람은 제일 복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예배하다 보면 언젠가 부족한 것을 극복하고 대 평안을 노래할 때가 올 것입니다.
  

< 살면서 분명해 해야 할 것 >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내적인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죄의 문제를 해결한 성도가 내적인 평안을 얻으려면 살면서 분명히 해야 할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자기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추구하는 일이 자기에게 맞는 정당한 일이라고 확신하면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평안과 행복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이 고난 중에도 평안과 기쁨이 잃지 않았던 것은 삶의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한 사람에게 매이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길임을 아는 사람만이 결혼 자격도 있고 행복과 평안도 얻습니다. 고귀한 대상에게 스스로 매이는 것은 고귀한 자유를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 매이고 교회에 매이는 것은 고귀한 자유와 대 평안을 얻는 최대 전제조건입니다. 그처럼 마음과 몸과 삶을 모두 예수님의 손에 맡기면 환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셋째, 천국 소망이 분명해야 합니다. 종말이 불확실하면 아무리 소유가 많고 권세가 있어도 평안이 없고 그때는 몸이 조금만 아파도 겁이 덜컥 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과 머리에는 복음과 천국 소망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처럼 늘 천국을 사모하며 살았기에 어떤 환경에서도 천국의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천국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면 다른 문제는 다 작게 느껴지면서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얻습니다.

넷째, 나눔의 삶이 분명해야 합니다. 평안은 나눔과 비례합니다. 나눌 줄 모르면 마음이 궁핍해지고 결국 삶도 궁핍해지지만 잘 나누면 마음이 풍성해지고 결국 삶도 풍성해집니다. 그러므로 잘 나누려는 마음도 구하고 잘 나눌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도 구하십시오. 가난하면 잘 나누기도 힘들고 삶이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또한 가난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청빈한 삶이란 최선이 아닌 차선의 삶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차선의 삶이 최선의 삶에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종 셋에게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 결산할 때 다섯 개 맡은 자가 말했습니다. “주님! 열심히 일했더니 다섯 개가 더 생겼습니다.” 주인이 칭찬했습니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두 개 맡은 자도 말했습니다. “주님! 저도 열심히 했더니 두개 더 생겼습니다.” 역시 주인이 칭찬했습니다. 그때 한 개 맡은 자가 와서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이 주신 것을 잘 보관하려고 땅에 묻어두고 저는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야단쳤습니다.  

청빈(淸貧)이란 말에서 ‘맑을 청(淸) 자’는 좋아도 ‘가난할 빈(貧) 자’는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결국 청빈한 삶은 최선의 삶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는 “많이 벌어 많이 나누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열심히 벌어 좋은 일에 많이 쓰게 하소서.” 하늘나라 장부에는 번 돈은 나와 있지 않고 쓴 돈만 나와 있습니다. 축복의 샘은 퍼내야 계속 솟아납니다. 그처럼 퍼내지 않으면 조금씩 썩다가 나중에는 물 근원까지 썩습니다.  

돈을 사랑해서 나누지 않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돈은 ‘잘 쓰는 도구’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돈을 잘 나눌 때 기쁨과 행복과 평안도 최고치로 올라갑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삶은 돈을 너무 쌓아놓아서 하나님이 안중에 없을 정도까지 되는 삶입니다. 그래서 나눌 줄 모르는 부자는 천국 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습니다. 항상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께 온전히 매이고, 천국 소망을 가지고, 나눔의 모델을 꿈꾸며 최대한 나눔으로 심판의 손길을 벗어나 대 평안을 노래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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