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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내 아들 요셉이 살았으니 (창 45:21-46:7)

첨부 1


내 아들 요셉이 살았으니 (창 45:21-46:7)


'부모자녀'의 관계는 그렇게 '네 글자의 한 단어'로 정의되기는 하지만, 좀 더 자세하게 세분해 보면 '부자(父子)', '부녀(父女)', '모자(母子)', '모녀(母女)'의 관계로 나누어집니다. 
이 네 가지 관계들은 그냥 '부모자녀'라고 정의되는 것 외에 각각의 특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넷 중에서 가장 어려운 관계는 무엇일 것 같습니까?
일단 '아버지와 딸'이나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가장 무난할 것 같고, 나머지 둘 중에서 생각해 본다면 역시 '어머니와 딸'보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이것은 아들 하나밖에 없는 제가 그냥 혼자서 느끼는 것이니까 객관적인 신빙성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거의 완벽하다시피 모범적인 경우가 나오는데, 바로 야곱과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낯선 외국으로 팔려와 종이 되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맡은 일에 충성하는 청년 시절을 보내었고, 또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몸이 되었을 때에 거기에서조차 또 인내하며 여전히 만사에 성실한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후에 자기 형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도, 과거에 형들이 자기에게 행한 나쁜 짓에 대하여 일절 따지지도 않고 용서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진 섭리였다고 감사하는 훌륭한 신앙 인격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 요셉이었으니 또한 자기 아버지 야곱을 공경하는 면에 있어서도 그야말로 모범생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 또한 오히려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준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젊었을 때에는 좌충우돌하면서 파란만장한 생을 보내었지만 인생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백발의 영광'을 정말 멋있게 나타낸 아버지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이 '아버지 야곱'과 '아들 요셉'의 관계를 통하여 아무리 시대가 흐르고 사회가 바뀌어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결코 변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자녀는 '부모를 물질적으로 봉양하는 효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45장 21절로부터 28절에 "21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22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23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비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비에게 길에서 공궤할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24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노중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25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26고하여 가로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기색하더니 27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28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고 기록했습니다. 

모든 것이 나쁜 쪽으로만 흘러가던 것처럼 보였던 요셉의 인생이 하나님의 실로 오묘하신 섭리로 인하여 극적인 전환을 맞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외국인이요 노예요 더욱이 죄수였던 그가 일약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면서 그저 생존에 급급했던 그의 인생이 이제는 온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요셉은 자기 앞에 제 발로 찾아와서 머리를 숙이는 형들과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됩니다. 
두어 번의 테스트를 통하여 그 형들이 옛날의 일을 회개하고 변화되었음을 확인한 요셉은 당장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모셔 오려고 했습니다. 
여기 요셉의 형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야곱에게 전해 주었던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이란 바로 본문 앞의 11절에 나와 있는 대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고센 땅에 모시고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봉양'이란 말은 '공급' 혹은 '보살핌'이라는 뜻입니다. 
즉 요셉은 이제부터 자기가 아버지의 노후에 필요한 물질을 다 조달하고 그 모든 육신 생활을 돌보아 드리겠다고 형들을 통해 아버지 야곱에게 전달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요셉과 야곱의 사이에 일어난 커다란 반전입니다. 
이전까지는 아버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고 보호해 주던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거꾸로 된 것입니다. 
아들 요셉이 적어도 물질적, 육신적인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주도권을 가지고 아버지 야곱을 보살펴 드리는 관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양자에게 있어서 각각 그럴 수밖에 없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육신적으로는 점점 더 약해져서 이제 오히려 다른 사람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와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이제 돌봄을 받던 처지로부터 어엿이 독립한 성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부모를 돌보아 드릴만한 능력도 넉넉히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치 어릴 때 부모가 자기를 돌보아 주셨던 것처럼, 이제는 자기가 아버지 야곱의 노후를 돌보아 드려야 함이 지극히 마땅한 것임을 요셉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노년의 인생을 그야말로 아무 낙도 없이 살고 있던 야곱은 그처럼 요셉이 형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을 듣고 또한 자기를 태워 모시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야곱으로서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소식이야말로 최고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요셉이 이제부터는 자기가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애굽으로 초청한 것은 야곱에게 그런 금상(錦上)에 첨화(添花)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은 이처럼 물질적인 봉양이 동반될 때 더욱 부모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자녀에게는 그 부모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모든 자녀들은 이제 거꾸로 부모를 보살펴 드려야 할 의무를 지게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 자녀라면 그런 때를 결코 그냥 넘기지 말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자녀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존재하게 된 사실부터 전적으로 부모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로목사님께서는 저와 석기성 장로를 낳으신 후에 이제 셋째는 딸을 두고 싶으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셋째는 기다리셨던 딸이 아니라 석기신 목사라는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결국 원로목사님 내외분께서는 한 번 더 자녀를 가지셨는데, 그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바로 우리 형제들의 유일한 여동생 석기향이었습니다. 
그래서 석기신 목사는 그 막내 여동생에게 "내가 니(네) 생명의 은인이다."라는 농담을 자주 했는데, 왜냐하면 만약 자기가 딸로 태어났더라면 원로목사님께서 넷째 자녀를 두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농담이고, 실상은 모든 자녀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란 바로 부모입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생명의 주인이시지만, 육신적으로만 따져 보자면 오로지 부모 덕분에 그 아들과 딸로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생명을 가지게 된 이후에 그 자녀가 세상에서 잘 된 것들 역시 모두 다 부모의 덕임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오직 부모님 덕분에 태어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부모님 덕분에 공부도 하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면서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었으니, 그 부모의 노후를 자식이 봉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도리인 것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결코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물질적으로 부모를 돌보는 봉양'이 따라야만 합니다. 
자녀가 어릴 때 부모들은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돈을 쓰고 시간을 바치고 땀을 흘립니다. 
자녀를 위해 '물질적, 육체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은 그 부모에게는 자신의 자녀를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순서에 와서는 '물질'은 빼 버리고 '마음'으로만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녀가 장성하고 독립하게 될 즈음까지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쏟아 부은 것들을 다 돈으로 환산하자면 정말 엄청난 액수가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부모가 이제 은퇴하고 연로하게 되어 경제적 능력이 없어지게 되었을 때에도 자녀에게 용돈을 좀 달라고 당신의 입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정말 차마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정말이지 자녀 쪽에서 알아서 먼저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그 부모를 위해 돈을 쓰는 것에는 인색하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고르반'의 외식인 동시에 십계명 제5계명을 어기는 명백한 범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부모를 물질적으로 잘 봉양하는 것이야말로 그 자녀가 '약속 있는 첫 계명'대로 육신적으로도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인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바로 그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당신의 모든 사랑과 힘을 다하여 우리를 키워 주시고 돌보아 주신 부모님께서 진정 기쁜 노후를 보내실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보살펴 드리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모는 '자녀를 영적으로 인도하는 권위'를 지켜야 합니다. 

46장 1절로 7절 말씀에 "1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2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5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발행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의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비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웠고 6그 생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7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기쁘기만 했을 것 같은 그 때에, 야곱은 자기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일에 대하여 그 마음에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니, 자기 아들이 그토록 출세를 해서 이제 먹고 살 걱정이 없어진 정도가 아니라 남은 평생을 총리대신의 아버지로서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런 애굽을 향하여 지금 바로가 보내 준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내려가는 길에 도대체 그 무슨 주저할 것이나 망설일 일이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미국에 이민을 간 아들이 좋은 직장을 얻고 저택까지 마련해 놓은 후에 부모님의 여생을 잘 모시겠다고 초청해 주어서 지금 비행기 일등석에 앉아 태평양을 건너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저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지 그 무슨 뒤숭숭한 느낌 같은 것이 들었겠습니까?

하지만 야곱은 그런 상황에서도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 야곱을 초청하는 요셉으로서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애굽에만 모셔 오면 행복하게 살도록 해 드릴 수 있겠다는 이 한 가지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머릿속에서는 그저 애굽에서 육신적으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이 아니라 이 애굽행의 미래에 대한 아주 고차원적인 영적 질문 하나가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애굽으로 내려가는 걸음이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 자손에게 내려 주신 언약과 어떻게 관계가 되는가 하는 궁금증이었습니다. 
즉 그는 이것이 혹시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상충되는 행동이 아닌지를 염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가나안' 땅에서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하고 축복받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자기는 온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브엘세바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의 남쪽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는 브엘세바에서 야곱은 자기 발이 정말 가나안의 지경을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야곱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아셨던 까닭에 그에게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그 야곱의 걸음이 하나님의 뜻과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확인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확인을 받은 후에 그제야 야곱은 안심하고 온 가족을 이끌고 드디어 국경을 넘어 애굽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시점에 와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그 아버지 야곱보다 우위에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는 인생의 절정기에 있었고 당연히 힘도 더 세었을 것이며 머리도 훨씬 더 명석하게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지만, 야곱은 이미 백 세 넘은 몸으로 기운도 많이 빠졌을 것이고 기억력도 쇠퇴했을 것이며 어쩌면 이미 무슨 노망기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요셉은 지금 애굽의 총리대신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엄청난 연봉을 받고 있는 사회 최상류층 인사가 되어 있었지만, 야곱은 자기 생계 하나 스스로 꾸리지 못하고 흉년을 당해 굶어 죽기 직전에 이제 전적으로 아들 요셉에게 의존함으로써 먹고 살 걱정 하나는 겨우 덜게 된 처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은 그 아버지 야곱을 결코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고 인도를 받으면서 걸어가고 있던 자세였습니다. 
그런 영력에 있어서만큼은 아직도 아버지 야곱이 아들 요셉보다 월등한 우위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죽기 전까지 바로 그런 영적 권위로써 요셉을 지도했습니다. 
나중에 47장 30절에 보면, 야곱이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고 요셉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런 아버지 뜻에 순종했을 뿐 아니라, 자기도 똑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바로 50장 24절로 25절에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대로입니다. 

어쩌면 요셉은 애굽이 앞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영영히 살 곳이라고 나름대로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그런 유언을 듣게 되자 요셉도 하나님께서 그의 조부들에게 주셨던 언약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즉 비록 애굽이 풍요한 곳이기는 하지만 자기 후손이 대대로 영원히 살 곳은 결코 아니며 언젠가는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이 중대한 영적 비전을 그도 공유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요셉이 야곱의 유언대로 아버지의 유해를 메고 가나안 땅에까지 가서 '선영'에 장사한 것은, 바로 언젠가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고야 말 것임을 상징하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영적 유산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살았던 430년 동안 자자손손 이어져 갔으며, 그 결과 나중에 그들이 모세의 지도하에 출애굽하게 되었을 때에도 '요셉의 유해'를 가지고 떠났던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급속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페이스북에 올라온 한 동영상을 보았는데, 지하철 안에서 어떤 20대 청년이 할아버지 한 분에게 큰소리로 욕을 퍼붓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지하철 좌석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곁에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비좁은 지하철 안에서 다른 승객들에게 방해가 되니 바로 앉으라.'고 한마디 충고를 하신 것이 사건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할아버지에게 '일어나서 다음 역에서 내리라.'고 하면서 정말 문자 그대로 '쌍욕'을 해대는데, 최소한 5분 이상 그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나중에 어떤 중년 아저씨가 그 청년을 달래다시피 해서 겨우 떼어놓았는데, 조금 있으니까 다시 할아버지를 찾아와서 또 욕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청년은 그렇지 않은 줄 잘 알지만, 적어도 제가 자랄 무렵에는 그야말로 '보지도, 듣지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는 그리 드물지 않게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오늘날의 연로하신 부모님 세대는 이 사회에서 마땅한 '공경' 대신에 그와 같은 '봉변'을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교회야말로 부모 공경의 윤리가 끝까지 지켜지고 있는 마지노선과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경을 받기 위해서 부모 쪽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바로 '영적 권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자녀들은 자기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할수록 더욱 공경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유업으로 물려주는 부모를 그 하나님의 말씀을 똑같이 믿는 자녀라면 실로 재벌부모보다도 훨씬 더 소중히 여기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손을 들어 축복해 주는 부모 앞에 적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자 자녀라면 머리를 숙이며 감사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부모가 나이가 들게 되면 육신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씩 둘씩 자식에게 밀리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부양자'(provider)와 '부양가족'(dependant)의 위치까지 완전히 뒤바뀌는 때가 오게 됩니다. 
하지만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끝까지 부모가 자녀를 리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숨을 거두고 소천하게 되는 그 순간까지 그 자녀를 말씀으로 훈계하고 그 후손들을 위하여 기도할 줄 아는 '백발의 영광'을 자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부모만이 자녀들로 하여금 '센 머리 앞에 일어서서' 공경하지 않을 수 없는 영적 권위를 끝까지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겉사람'은 후패해 갈지라도 '속사람'은 늘 어린아이같이 순전하고도 청년같이 강건한 영적 기상을 간직하는 가운데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남기고 언약의 비전을 전해 줄 줄 아는 부모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과거에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에 제일 먼저 아버지를 찾아가서 선관위에서 보내온 당선통지서를 보여 드리며 아버지께 절을 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명실 공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었던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해도 가나안 촌로에 불과했던 아버지 앞에서는 머리를 숙여야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아들과 아버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이 순서는 아들이 왕이나 대통령이 된다 해도 결코 바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가까운 친구'(best friends)처럼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비단 자녀들뿐 아니라 부모들 가운데서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망조'입니다. 
아무리 아버지는 꾀죄죄한 할아버지가 되고 아들은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의 임원까지 된다 해도 여전히 그 아버지의 '센 머리' 앞에서는 일어서서 경의를 표해야 마땅합니다. 
아무리 어머니는 쭈글쭈글하고 꼬부랑하기까지 한 할머니가 되고 딸은 '피부 미인'이니 'S라인'이니 하면서 미모를 자랑한다 해도 그 연로하신 어머니 앞에서는 늘 머리를 숙여야 할 뿐인 것입니다. 
부모자녀의 관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어디까지나 '종적 관계'로 창조해 놓으신 것이지 결코 '횡적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과 '아들 요셉'의 관계는 바로 그 '종적 관계'의 완벽한 역할모델과 같지 않습니까?
'요셉이 살아서' 아버지를 봉양하게 된 것은 야곱의 노년에 최고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라는 언약을 야곱에게서 전해 받게 된 것은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대신으로서 누린 그 어떤 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들은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경제적 생산력을 가질 수 없게 될 때 당연히 물질적으로 봉양을 해야 하고, 아버지는 육신은 쇠할지라도 끝까지 영적 권위를 발휘함으로써 자녀 앞에서 노년의 영광을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회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결코 변치 말아야 할 이 부모자녀 간의 관계를 지키면서, 가정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주셨던 '약속 있는 첫 계명'을 따라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와 신앙의 가정에 대대로 이어져야 할 '영적 유업'을 전해 주는 부모가 됨으로써 진정 지상의 천국 같은 행복한 가정을 세우는 경향의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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