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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믿음 (히 11: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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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믿음 (히 11:23-26)


어떤 사람들은 금은보화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가 가장 귀한 보배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보배는 무엇입니까?  물론 금은보화가 귀한 것은 사실입니다.  인생에서 명예가 귀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아침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인생의 보배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귀한 보배, 그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들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는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들이 붙잡아야 할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서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릇이라고 해서 다 똑 같은 그릇이 아닙니다.  그 그릇에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에 따라 그 그릇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좋은 것이 담겨 있으면 다 보배입니다.  반면에 그 그릇에 나쁜 것이 담겨 있으면 쓸모 없는 쓰레기통입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이라는 질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영원한 보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잘난척하지만 별 것 아닙니다.  또 우리의 그릇들이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풀도 마르고 꽃도 시들고 다 말라갑니다.  영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모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내 인생에 진정한 주인이 되게 하십시오.  내 인생의 질그릇에 영원한 보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은 그 안에서 영광스러운 힘이 나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때 우리는 모든 정욕과 썩어질 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주의 성품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릇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사용하시는 그분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사용해 주시기를 기도하셔야만 합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잘 믿든 못 믿든 우리 모두가 질그릇 같은 인생이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로부터 난 자들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안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키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비록 우리가 질그릇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땅 모퉁이에서 부르시고, 지명하셨기 때문에 세상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새 한 마리보다 더 존귀하고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 질그릇 같은 내 속에 하나님의 보배를 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늘의 보배를 담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이상 깨어지기 쉽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어떤 때는 더러워지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사방으로부터 한없이 우겨 쌈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넘어지려고 합니다.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이 말씀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렇습니다.  내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우리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영원한 보배이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역사의 한때 두려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인생과 역사의 사명을 훌륭하게 성취했던 한 부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모세의 부모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6장 20절에 의하면 이 부모의 이름은 아므람과 요게벳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살았던 그 시대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로운 통치자가 등장했을 때였습니다.  애굽의 새로운 통치자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을 애굽 민족의 위협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화시켜서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강가에 던지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그야말로 끔찍한 공포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런 바로의 명령에 불복하면 모세의 부모뿐 아니라 그의 친척조차 모두가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대적인 공포의 시대에서 아들을 낳게 된 부모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이 아이를 기르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모세의 부모가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믿음 때문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부모로 하여금 이런 결단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그리고 믿음을 잃어버리고 세상주의로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는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가 났을 때에 모세의 부모가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 때문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이었겠습니까?  본문에는 그냥 태어난 그 아기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그냥 피상적으로 읽는다면 이 아이가 잘생긴 미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아이를 살려야 하겠다는 단순한 보호 본능적인 부모의 신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비슷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7장 20절에 보면 오늘 본문이 기록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 화면을 통해서 사도행전 7장 2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여기에 보면 그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 아기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을 것임을 믿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아기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태어난 아기야.  그리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태어났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실 것을 확신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모세의 부모로 하여금 바로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용기는 좌절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된 믿음은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용기의 출처는 나 자신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출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신념과 신앙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신념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신념 그 이상의 사람인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념은 자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에게서부터 출발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건드려도 깨지기를 잘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깨집니다.  상처 잘 생기고 더러워지기를 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신념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처음부터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한계를 뛰어넘어 무한하신 하나님께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두려워한다면 세상과 사람을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올 때 상황을 분석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묵상해 보십시오. 

유명한 크리스챤 시인 애니 존슨 플랜트가 쓴 시 가운데 제목이 "그러나 하나님은"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네.
내가 모르는 미지의 날들이 그에게는 분명하고 확실함을 알기에
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복된 안식을 누린다네.
모든 수수깨끼 같은 당혹할 "왜"의 물음이 회의와 공포가 되어 커져갈 때,
난 이 생각으로  해답을 찾는다네.
난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고.

난 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으시다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짐도 그의 손길은 능히 들어올리심을 알기에
내 염려했던 일들은 오히려 유쾌한 일들일 수 있다네.
비록 독수리의 날개가 피곤해지고 내가 한 때 달렸던 길을
이젠 걸어야 할지라도 난 내게 주어질 능력을 알고 있다네.
난 할 수 없어도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으심을 알고 있다네.
나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보신다네."

"나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보신다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보십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런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그래서 그 상황이 나로 하여금 두려움 속으로 끌어갈 때 그 현실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낙심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지 말고 그럴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두려움의 상황에서도 승리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훗날 우리의 자녀들이 저와 여러분을 회상하면서 우리의 부모님은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사셨다고 고백되어 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모습은 급변하는 세상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대한 상황 분석력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바라보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의 부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야 합니까?
두 번째로, 최선을 다해서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아무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믿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믿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모세의 부모가 믿음으로 이렇게 최선을 다한 행동을 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모세의 부모가 믿음으로 아기 모세를 석달동안 숨겨서 양육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석달이 모세의 부모가 자기 아들 모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기간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석달이면 아기는 자율행동을 시작합니다.  손과 발의 움직임이 놀라울 정도로 활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개를 가누기 시작합니다.  감정표현이 완연해져서 혼자 웃기도 하고 울음소리도 커집니다.  출애굽기 2장 3절에 보면 바로 이 대목에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다시 말하면, 모세의 부모는 더 이상 숨겨서 이 아기를 기를 수 없을 때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의 최선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그 상자에 담아 나일강 하수가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이렇게 기록하지 않은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모세의 부모가 이 아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태어난 것을 확신했다면 그냥 아기를 강가에 갖다 놓으면서 "아가야, 하나님께서 너를 살려주실 거야.  그리고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아기를 강가에 갖다 버렸다"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그 상황 속에서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부모는 어떤 최선을 다했습니까?  출애굽기 2장에 보면 갈대 상자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그 상자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방수제 역할을 할 역청을 칠합니다.  그리고 나서 아이를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강가에 갖다놓습니다.  그 다음에 부모는 모세의 누이였던 미리암에게 멀리 서서 지켜보게 합니다.  이 대목을 출애굽기 2장 4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그러니까 저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가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최선의 믿음은 언제나 최선의 행동을 낳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이렇게 읽어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났을 때에 최악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진정한 행동을 낳습니다.  최선의 믿음은 최선의 행동을 낳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라고 느껴지십니까?  내 인생은 지금 끝자리에 서 있으며, 나로서는 이제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져있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믿으신다면, 믿는 대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다해 보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드라마를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녀들에게 슈퍼맨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언제 어디에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자녀들은 최선을 다하는 부모의 그 믿음을 보고 인생의 꿈과 비전을 키워갈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우리의 아이들이 저와 여러분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고백되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남들처럼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으로 때로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언제나 최선을 다하셨다"라고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부모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부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의 부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야 합니까?
세 번째로, 보상받은 약속의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부모는 갈대 상자를 잘 만들어서 사랑하는 아들을 그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일강가에 그를 두었습니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믿음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을까요?

이제부터 하나님의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입니다.  텔레비전의 드라마보다 훨씬 더 재미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모세의 부모들은 아기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고 하수가에 둔 다음 모세의 누이로 하여금 그 근처에 가서 지켜보게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때 바로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그 강가에 나옵니다.  우연이었을까요?  공주님께서 무엇하러 목욕하러 강가에 오셨겠습니까?

고고학은 그때 당시의 애굽에서는 이미 궁중 안에 훌륭한 목욕시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바로의 공주가 나일강가에서 목욕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서 시녀를 거느리고 강가에 나온 것입니다.  우연이었을까요?  또 하필이면 강가에 나오자마자 갈대상자가 공주의 눈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 히브리 노예의 아기가 있습니다.  재수 없다고 갔다 버리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자를 열자마자 그 아기가 울어대기 시작합니다.

이 대목에서 한 성경주석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바로 이 순간 아기의 울음소리는 공주의 가슴 속에 잠자던 모성애의 본능을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갑자기 이 아기가 측은히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이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연이었을까요?

드디어 공주는 이 아기를 궁중에 데려다가 자기의 양자로 기르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유모가 필요했습니다.  이때 모세의 누이가 출연합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아기를 위해서 좋은 유모를 구할 수 있다고 제안을 합니다.  이 대목에서 바로의 공주는 궁중 안에서도 얼마든지 스스로 유모를 구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이 미리암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유모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어머니는 이제 자기 아기를 가장 안전한 곳에서 그것도 양육비를 받아가면서 애굽의 왕자로 기를 수가 있었습니다.  우연이었을까요?

유명한 C.S. 루이스 교수가 어느 날 옥스퍼드 채플에서 기도의 응답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 마침 한 학생이 나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오늘과 같은 시대에 기도의 응답이 정말 존재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우연의 일치를 가지고 기도의 응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때 루이스 교수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기도가 우연의 일치라고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학생, 이상한 일이 있다는 말이야.  내가 기도를 그치면 우연도 그치거든."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우연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오직 필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기도의 필연을 믿으십시오.  믿음의 필연을 믿으십시오.  최선의 필연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런 놀라운 일련의 기적들은 모세의 부모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었습니다.  저는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간섭하시고 그들의 생애 속에서 경험하게 하셨던 드라마의 축복들을 하나님의 상급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히브리서 전체를 보는 중요한 열쇠는 히브리서 11장 6절의 말씀입니다.  앞에 있는 화면에서 히브리서 11장 6절의 말씀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상을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주 앞에 나올 때, 그리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갈 때 우리에게 반드시 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가 기도를 했지만, 내가 하나님을 신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마침내 그분의 상급은 내려지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문자 그대로 최악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녀에 대한 최선의 안전을 보장받고 그 자녀를 당당히 키울 수 있는 그런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다 죽여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어머니가 유모로 불려옵니다.  남들은 다 자녀를 죽이는 세상 속에서 돈을 받고, 안전을 보장받고, 그 자녀를 당당하게 키우고 있는 모세의 어머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는 마침내 민족을 구하는 위대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에 앞서서 모세의 부모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사실과 한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믿었던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저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믿고 기도하고, 믿고 최선을 다한 부모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도 모세의 부모와 같이 하나님의 상급을 경험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유모의 역할이 끝났을 때 아기 모세는 다시 바로의 공주의 품으로 돌아가 애굽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애굽에서의 40년간의 교육이 어머니의 품속에 있었던 불과 3, 4년여의 어머니의 신앙교육을 능가하지는 못했습니다.  유모요 어머니였던 요게벳은 아기 모세가 이해하지를 못했어도 끊임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모세야, 너는 히브리의 아이란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돼."

그리고 창 너머 히브리인들이 채찍에 맞아가면서 노예처럼 일하는 현장을 보여주면서 어머니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기 모세야, 저 사람들은 너의 동족 야훼 하나님의 백성이란다.  너는 커서 내 민족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

아마 어린 모세는 어머니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 그러나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이렇게 대답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엄마, 알았어요.  약속할게"

성경에 보면 모세가 드디어 나이 40이 되었을 때 자기 민족을 돌아볼 생각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육학자 앨런 블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억된 모든 것은 반드시 재생된다."  이 사람에 의해서 유아교육 운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조기교육이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어릴 때 저들의 기억 속에 무엇을 심고 계십니까?  무엇이 심겨지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이 무엇이건 분명한 것은 그것이 아이의 평생을 좌우하는 가치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구세군의 창설자 부드 대장은 자기 시대의 젊은이들이 타락하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면서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부모에게 이런 절실한 당부를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부모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빨리 손을 쓰십시오.  마귀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죄를 가르치기 전에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십시오.  마귀가 여러분의 자녀들의 가슴에 불신을 심기 전에 여러분의 자녀들의 마음속에 신앙을 심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가정만 바로 세워져도 이 땅이 이렇게 타락하거나 범죄에 허우적거리지는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솔직히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서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심기보다는 교회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룩한 교회를 향한 마음보다는 세상 성공을 향한 마음으로만 가득 채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학교에 결석하는 것은 마음 아파하고 야단을 치면서 그 아이가 교회에 빠지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서 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신 섭리와 뜻과 상급을 기대하고 계십니까?
성경은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의 부모들이 먼저 변함없이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꿈과 비전을 들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 되도록 격려하고 가르치십시오.  그리고 꿈과 비전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최선임을 함께 강조해 주십시오.  그리고 최선의 꿈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함께 이야기 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자녀들이 앞으로 자라서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얼마나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살아가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에는 행복한 천재보다도 앞을 향해 우직하게 달려가는 행복한 바보가 더 필요하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자녀들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하며, 얼마나 높은 명예를 가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침의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과 명예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다 사라졌을 때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장 작은 달란트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땅에 묻어두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의 상급을 기대하는 가운데 치열함이 묻어나는 최선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고, 가족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과 여러분의 가정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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