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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 (호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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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 (호 11:1-4)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한 기도원 사모님이 쓴 『내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들에게 ‘지하실에 가서 양파를 가져 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캄캄한 지하실에 내려갔다 오는 일은 무섭기도 하고 결코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가기 싫은데 왜 그런 일을 자기에게 시키느냐’고 불평하거나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변명하지 않고 ‘예, 엄마’하고 대답했습니다. 

아이는 지하실에 내려가면서 저도 무서운지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라는 찬양을 부르며 가는 것이었습니다. 무서움을 달래려고 큰 소리로 찬양하는 모습을 보니, 아이가 기특하기도 하고 엄마 마음이 여간 흐뭇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무섭고 두려울 때 그렇게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 엄마로서는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 때 엄마의 마음속에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렇게도 좋으냐?’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대답했습니다. “네 주님, 너무 좋아요, 무서움을 달래려고 아이의 입술에 찬양이 넘쳐나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네요.” 그러자 다시금 하나님께서 그의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나도 그렇단다. 네가 힘들 때, 지칠 때, 외로울 때, 기가 막힌 수렁에 빠졌을 때, 네 입술에 찬송이 마르지 않고 나를 향하여 고개를 들면 나도 기쁘단다. 너보다 더 많이...” 

여러분, 지금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이 느껴지십니까?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고 계십니까? 지금도 내 마음에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음성을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리에 귀를 막고 조금만 더 하나님께 집중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들러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은 대부분 우리를 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하고 죄를 범할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책망하시다가도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고, 꾸짖으시다가도 감싸주시고 위로하시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오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짓된 우상 앞에 절을 하는 패역한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사랑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200여년의 역사 가운데 19명의 왕이 통치를 했고, 8번에 걸친 쿠데타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왕은 즉위를 하면 죽을 때까지 왕노릇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은 왕들이 평균 10년 정도 밖에 통치를 하지 못했고, 그것도 8번이나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그 역사는 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역사였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나면 전 왕조를 위해 충성했던 모든 신하들과 그 가족들은 다 처단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왕조가 든든히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평균 25년마다 한 번씩 일어난 쿠데타로 인해서 이스라엘 땅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야 시대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호세야 1:1절에 보면 호세야 시대를 ‘여로보암이 왕이 된 시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을 창건했던 여로보암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의 제 13대 왕인 여로보암 2세를 말합니다. 그 때는 예후로부터 여로보암 2세까지 100여년 동안 쿠데타 없이 지나왔습니다. 200년의 북 이스라엘 역사상 쿠데타 없이 100여년을 지내왔다는 것은 그 당시가 얼마나 평온했고, 또 부유했는지를 말해줍니다. 북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번영을 누렸고, 가장 부유했던 시기가 바로 여로보암 2세 때입니다. 

그렇게 100여년 동안이나 평화가 지속되면서 나라는 부강해졌고 백성들은 그 부유함을 누렸지만, 반대로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는 극심하게 타락했습니다. 백성들은 사치를 즐기게 되었고, 쾌락과 자기만족만을 추구했습니다. 권력을 쥐고 있고 있이 있는 사람은 가지지 못한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고 약자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정의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돈의 힘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바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바알은 다산과 풍요의 신입니다. 그리고 바알 종교에서는 공공연하게 매춘을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등지고 풍요의 신이라고 여기는 바알을 섬기며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의 결혼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생활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일 것을 명령하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고멜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 자식들의 이름이 이러했습니다. 

첫 번째 낳은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르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흩어 폐하실 것임을 경고한 말씀입니다. 

두 번째 낳은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로루하마라는 말은 ‘은총을 입지 못한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멸망할 것임을 경고한 말씀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낳은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로암미라는 말은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죄악의 길에 서 있는 한 하나님은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않으실 것이고,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음을 경고한 말씀입니다. 
  
이 세 아이를 낳고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가출을 해버렸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바람이 나서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여전히 네 아내를 사랑하고 가서 그녀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고멜을 데리고 옵니다. 보리 한 호멜 반은 은 15세겔과 비슷한 값입니다. 

그렇다면 호세아가 자기 아내를 데리고 오면서 준 것은 은 30개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은 30개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보통 노예 한 사람의 몸값입니다. 아이 셋을 낳고 바람이 나서 호세아를 떠나버린 고멜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겼지만, 사실 노예나 다름이 없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 상태를 암시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의 품을 떠나 바알의 품에 안겼습니다. 자기들은 바알이 좋아서 바알을 섬긴다고 하는데, 사실은 바알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상의 노예로 전락한 비참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이 다시금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떠나버린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앞부분에서는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아내로 이스라엘을 표현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아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인간이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아무리 서로가 마음이 상해서 ‘호적에서 네 이름을 지워버리겠다’고 말해도, 또 자식이 ‘나 이제부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혈육으로 맺어진 관계는 서로가 합의 하에 관계를 끊는다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관계를 정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관계가 끊어질 수 없습니다. 
  
간혹 아버지 가운데 자식을 버린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자식이 잘 되는 것입니다. 자식 망하기를 바라는 아버지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특별히 성서시대에 아버지는 자식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존재였습니다. 양육하는 것도 아버지의 몫이었고, 가르치는 것도 아버지의 몫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말씀합니다. 1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아버지와 아들’로 관계맺음을 했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말씀한 것입니다. 

광야 40년 동안의 생활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삶에 개입하시고 그들을 돌보아주셨습니다. 광야에서는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주셨고, 마실 물이 없을 때에는 반석을 깨뜨려서라도 물을 주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뜨거운 사막의 태양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추운 사막의 밤에 고통당하지 않도록 불기둥으로 그들을 덮어 주셨습니다. 

애굽의 군사들이 뒤쫓아 올 때에는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셨고, 요단강물이 넘쳐흐를 때에는 그 물을 멈추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팔로 그들을 도우셔서 그들이 그 땅에 정착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사사를 보내주셔서 고통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구해주셨고,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에는 선지자들을 보내주셔서 그들이 가야할 길을 보여주시며 바른 길을 걷도록 도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들의 삶에 개입하시고 그들의 삶을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을 4절에서는 ‘사랑의 줄’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소나 말 등은 코뚜레를 꿰고 거기에 줄을 달아서 끌고 갑니다. 말을 듣지 않고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코뚜레에 연결된 그 줄을 잡아당겨 소나 말에게 고통을 주어 그 길로 가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방법은 그렇게 소나 말을 끌듯이 끌어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잘못된 길로 갈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의 줄로 인도하셨습니다. 때론 채찍으로 고통을 주실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그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등지고 바알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바알에게 ‘당신이 내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고 아프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인데, 그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도 모르고 자꾸만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합니다. 아무리 꾸짖고 나무래도 그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를 등지고 거짓된 것에 가서 ‘당신이 내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도 아닌 것에 가서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아들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바로 이어 나오는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던 성읍입니다. 

그런데 그 성읍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당할 때 함께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신명기 29: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하나님께 범죄하고 등을 돌리고 우상을 따라간다 하더라도 그런 성읍들을 멸망시킨 것처럼, 그렇게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도, 아버지는 그 아픈 마음으로 자식을 여전히 사랑합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떠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려갈지라도, 아버지는 그 자식이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여전히 자식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을 모른 체 하고 우리의 욕망을 따라 살아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서운한 마음속에도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때로 세상의 유혹을 따라 세상의 것을 즐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향해 빨리 돌아오라고 부르시며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탕자와 같이 아버지 품을 멀리 떠나 세상에서 방탕하게 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 때까지 묵묵히 참고 기다리십니다. 아버지의 손을 놔버리고 어두움과 불안 가운데 울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포근히 감싸안아주시며 우리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그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의 부모님입니다.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아버지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부모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똑같은 사랑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부모님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부모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부모님의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세상을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열 달 동안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한 생명을 찾으시면 천국에서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춤을 추시는 하나님처럼 우리의 부모님도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고통을 겪으시면서 어머니는 우리를 이 세상으로 내어보내셨고, 몇 시간의 고통과 온 힘을 다한 노력 끝에 진이 다 빠져버린 상태에서도 태어난 우리를 가슴에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할 때 걷다가 넘어지고 넘어져도 잘한다고 박수를 쳐주며 기뻐하셨던 분이 우리 부모님입니다. 우리에게 ‘엄마 아빠’를 시작으로 말을 배울 수 있도록 한없는 인내를 가지고 가르쳐주신 분도 부모님이시고,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수 있도록 인생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주신 분도 부모님입니다. 자라면서 우리 몸에 상처가 나 우리가 아프다고 눈물 흘리며 울 때, 부모님은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며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자식이 힘들어할 때 대신해 주지 못해 안타까워 하셨고, 우리가 삶의 고통에 짓눌려 아픔을 안고 살아갈 때 우리보다 더 큰 인생의 짐을 진 것처럼 우리 부모님은 우리보다 더 아파하셨습니다. 좋은 말을 해주고 싶어도 자식의 마음에 짐이 될까봐 망설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그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도 간섭한다고 역정을 내며 더 잘못된 길로 갈까봐 그저 지켜보시기만 할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부모님의 사랑을 먹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닫고 그 사랑에 보답하려고 마음먹을 때에는 부모님은 너무 늙어 우리의 효도가 무의미할 때도 있고, 이미 우리 곁을 떠나버린 후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보답을 전혀 바라지 않으시고, 무엇 하나라도 더 주시고 싶어 하시는 분이 우리의 부모님입니다. 

우리는 그런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을 통해서 지금도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깨달았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시도록 우리에게 보내주신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통해서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부모님께 맡겨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육하시기 위해서 부모님께 사랑의 마음과 헌신의 마음을 주셔서 우리를 위해 수고하며 양육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기 위해서 먼저 부모님께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심으로 우리에게 나눠주도록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이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때로 부모님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나 자란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의 집은 가난했지만, 아버지께서는 별로 공부도 잘하지 못하는 아들을 대구에 있는 중학교로 유학을 보내셨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어려운 가정 형편상 큰 도시로 공부하러 보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니긴 하지만 이 아들은 공부하기가 무척이나 싫었습니다. 그래서 받아든 1학년 성적은 68명 중에 68등, 꼴등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으로 가는 중학생 어린 아들의 마음에 그 성적표를 부모님께 보여드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서 풀고자 대구로 학교를 보내셨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고 소작농을 하시면서 자식을 중학교에 보내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그 성적표를 그대로 내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성적표를 고쳤습니다. 68/68이라는 성적표를 1/68로 고친 것입니다. 보통학교도 다니지 못하신 아버지가 1/68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대구에 유학을 갔던 아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 친지들이 집에 몰려와서는 ‘찬석이가 공부 잘 했더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가 1등을 했는가 배’라고 대답하셨습니다. 1등을 했다는 말에 친지들은 아버지에게 축하를 해 주셨습니다. ‘명순이는 자식 하나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 해야제.’ 

그렇게 말하는 친지들을 위해서 아버지는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돼지는 가난한 그 집에 재산목록 1호였습니다. 강가에서 멱을 감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돼지를 잡았다는 말을 듣고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아들을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은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부끄럽고 겁이 나서 강가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아들은 달라졌습니다. 항상 그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17년 후 그 아들은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서 말을 꺼냈습니다.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네 아들이 듣는다.”
  
아버지는 그 때 아들이 성적표를 위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재산 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학교수가 되신 분이 바로 경북대학교 제13대와 14대 총장을 지낸 박찬석 총장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잘못하고 실수해도 그것을 모르신 척 하시며 여전히 우리를 믿어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런 사랑 때문에 오늘까지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고 유예된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님을 통해서 이미 경험했습니다. 이미 그 사랑을 풍족히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늘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사랑이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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