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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고후 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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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고후 8:1-15)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해 줄 것을 권면하는 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생각해달라고 부탁을 받은 바 있습니다(갈2:10). 그렇지 않아도 본래부터 그런 일을 힘써 행해왔던(갈2:10) 사도 바울은 그 목적으로 이방 땅의 교회들에게서 모금하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하면서도 그 일을 언급하기를 잊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남을 위해 놀라운 자기희생을 보여준 두 가지 사례를 들며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헌금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례는 마게도니야 지방의 교회들 즉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의 교회들입니다. 먼저 본문 1-2절을 다시 보면 사도 바울은 쓰기를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렇게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한 것이 그들의 삶이 평안하고 풍요로웠기 때문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써 보낼 당시의 마게도냐 교회들이 처해있던 상황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이라는 말로 묘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쁨이 넘쳤고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도 풍성하게 넘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의 이러한 모습을 알림으로써 사도 바울은 물질적으로 비교적 부요했던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큰 도전을 받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증언은 계속됩니다. 본문 3-5절을 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능력 이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자원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크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먼저는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바울의 권면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은 가난하면서도 남을 위해서는 풍성히 베풀 줄 안 마게도냐 교회들의 신자들을 소개한 사도 바울은 모든 면에서 풍성하고 뛰어난 고린도 교회이니만큼 남을 위한 사랑을 증명함에 있어서도 뛰어날 것을 권면합니다. 본문 7-8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연보를 하도록 독려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든 남을 위한 놀라운 자기희생의 두 번째 사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9절을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뜻이 곧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하늘의 영광을 소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가난하게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하심과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버리시고 자기를 비우셨으며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가난한 자였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의 노예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안에서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를 믿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한 모든 죄가 대속되는 은혜를 입었고 죄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되었으며 구원과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부요해질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사랑을 거저 받은 사람이라면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을 베풀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사도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것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그 놀라운 사랑을 되돌려 갚는 방법이며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아낌 없이 그 연보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면한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사랑을 베푸는 사람 자신에게 유익이 됩니다. 사도 바울도 본문 10절에서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합니다.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보내기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보내지만 사실 그 연보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11절 끝과 12절에서 썼습니다: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기꺼이 돕고자 하는 의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하나님은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그들은 평안하게 해주고 막상 돕는 이들은 어려워지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고통의 짐을 함께 나누어 모두가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14절을 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지금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여유가 있어서 가난한 이들을 돕지만 거꾸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가난해질 때는 또 다른 교회 성도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됨으로써 언제나 모두가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의 또 다른 유익함이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출애굽 한 옛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매일의 양식으로 주신 만나를 거둘 때의 일을 상기시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모두가 필요한 대로 골고루 나누는 삶임을 하나님께서 일찍이 가르쳐주셨음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은 바로 예루살렘 교회가 유무상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본을 보인 교회임을 상기시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교회가 겪는 어려움을 다른 교회들이 함께 나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임을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알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게도냐 교회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치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한 일을 가리키며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했다는 사실을 주목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환난과 시련을 경감시켜 주셨다거나 그들의 극심한 가난을 없애주셨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그들이 오히려 기쁨이 넘치고 다른 교회를 위한 연보를 풍성히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와 고난과 물질적 가난 가운데서 오히려 영적 부요함과 너그러움의 부요함을 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물질의 부요함은 도리어 영적 빈곤함을 불러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새 성전 건축을 해야 하는 요즈음 나라경제가 어려워서 맘껏 헌금하기가 어렵다는 말들을 듣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실 은혜 받은 사람에게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새 성전 건축을 앞두고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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