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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요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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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요 13:1)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치매로 고생하는 아내를 둔 남편이 아내를 요양원에 맡긴 것이 마음에 걸려 하루를 마다 않고 거의 매일 저녁 요양원에 들려 한 두 시간을 곁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양원을 찾을 때는 늘 아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갔다고 합니다. 

하루는 자녀들이 함께 와서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가르키며 이분이 누구냐고 묻자 남편을 몰라보는 아내는 “아이스크림 사다주는 좋은 아저씨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어느 날 남편이 아내 옆에 앉아 “내가 좋으냐”고 묻자 “아이스크림 사다 주니까 좋아”한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기다렸듯이 “그러면 나하고 결혼하자”고 하자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아이스크림 계속 사다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남편은 요양원에서 봉사하시는 목사님께 특별한 도움을 요청하고 자녀들, 그리고 요양원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탄절 오후 조촐한 결혼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주례가 치매 걸린 아내에게 묻습니다. “옆에 있는 이분을 남편으로 맞이하시겠습니까?”고 아내는 또박 또박 “예”하고 대답했다 합니다. 

남편은 주례의 허락을 받아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인사 시간을 갖고 준비해온 메모지를 읽어내려 갔다고 합니다. 

“오늘 저희들의 결혼식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저의 아내와 이런 번거로운 결혼식을 다시 준비한 것은 단 한번이라도 제 아내에게 ‘사랑하는 남편’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일 다시 제 아내가 저를 기억 못해도 저는 오늘만이라도 저의 사랑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저희들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이날 저는 저의 아내를 선물로 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저의 아내에게 오늘 하루라도 다시 한 번 남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식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오늘을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희에게 이 사랑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성탄절 우리 부부는 고귀한 사랑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분의 아내는 치매가 치유되지 못한 채로 약 6년을 더 살았는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자기 남편을 남편으로 부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남편은 아내의 장례식에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제 아내가 요양원 결혼식후 적어도 저를 남편이라고 불러준 것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고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남은 저의 인생을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제 아내보다 더 외롭고 아픈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위스컨신주의 Mr.Stillwater, Moody Monthly)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에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1절)셨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적인 표현으로는 '죽음'의 때를 아셨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죽을 때를 미리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30대의 건장한 나이에 죽음을 예지한다는 것은 그의 신성의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일반인의 죽음과는 달리 구속사적인 죽음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사역의 절정을 의미하며, 대속적 희생을 의미하며, 부활에의 과정임을 의미하며 말씀(로고스)으로의 환원을 의미하는 죽음입니다.

만유는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불은 태양을 향하여 올라가고 물은 바다로 흐르며 바람은 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해는 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갑니다(전 1:5-7).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며 생명의 원리는 귀환에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구속사적인 죽음이라고 할 때 이 죽음은 죄인들을 사랑한 대가로 치러야 하는 자기 부정과 자기희생을 의미하며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사역의 성취이기 때문에(3절) 그 죽음은 '영광'이 함께해야 합니다(요 12:23).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 관한 말씀을 하면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절)고 합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심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 대한 메시아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개'로 취급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히브리 민족으로서의 혈통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큼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에 대하여 적대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일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다만 예루살렘을 향해 가신다는 이유만으로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서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배척했으며(요 9:51-53), 수가성 우물가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으로부터 냉대를 받으시기도 했습니다(요 4:9).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마리아 사람은 이런 종족적 편견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이냐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거의 죽어가고 있고 이러한 사람은 급히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만을 한 것입니다.
모든 편견은 사랑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이 편견을 극복함으로써 사랑은 자기 능력을 확대해 갈 수가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은 기꺼이 희생을 지불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간과 돈을 강도 만난 자를 위하여 아낌없이 썼습니다. 그는 사람을 도와주되 형식적으로 도와준 것이 아니라 그의 성의를 다하여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그를 주막에 갖다 맡기고 완전히 회복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가 행한 일에 대하여 보답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 것만으로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순수한 인간애로 희생을 지불한 사랑,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이었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 강도 만난 자를 보고서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백성들을 대표하여 성전에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직접 그 사람의 도왔습니다. 지나가는 다른 사람을 시켜 도와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몸소 봉사한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한 자만이 참된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6. 37절)라고 합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를 도와준 사람은 외적인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의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말뿐인 사람보다 실천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은 마찬가지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말로 베푸는 선행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실천으로 보여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의미 있는 행동이 됩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진정으로 자비를 베풀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적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이 사탄의 공격을 받아 거의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구하시려 주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성육신하심으로 사랑과 겸비와 고난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되고 나병자와 귀신들린 자의 치료자가 되셨습니다.
선한 사람과 의인을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확증하기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섬기는 사랑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신 것처럼(요 13:4-11) 주님은 섬기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공생애 사역 기간에 주님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심으로써 병자와 불구자들을 섬기셨습니다. 모든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심으로써 병자와 불구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주님은 사랑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거리에서, 집에서, 산에서, 들에서, 바닷가에서 현실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그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생명을 버린 사랑입니다. 시간이나 돈을 희생한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목숨 자체를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주님은 하늘의 보좌를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영광을 희생하셨습니다(빌 2:6-8).

그리고 주님은 그 생명 자체를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세력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늘에서부터 땅에 이르기까지 실천하는 사랑이었으며 행동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은혜에 감사하는 모두가 됩시다.

감리교 선교사이면서 신학대학에서 가르쳤던 박대인 목사님이 동남아시아에서 열린 외국 선교사 회의에 참석했을 때 그 모임에서 일본인 선교사를 한 분 만나 일본인 선교사는 드문데 기이하게 여겨져서 '어떻게 선교사로 오게 되었는가?' 물어보았더니 그의 대답이 태평양 전쟁 말기에 도쿄에 살았는데 정부의 지시로 농촌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고 아는 이도 없는 낯선 곳에서 피난생활을 하는데 얼마나 외롭고 불편하고 서글펐는데 남달리 친절과 도움을 베풀어준 지방 사람이 있었다합니다. 

그렇게 그분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 달을 지내다가 전쟁이 끝나고 다시 도쿄로 돌아오게 되어서 그 친절한 사람을 찾아가 작별의 정을 나누게 되는데 그 농촌사람이 그때 비로소 자기는 조선에서 온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알려 주면서 헤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은헤를 빌겠다며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다 합니다. 그 후 이분은 도쿄로 돌아가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그 조선 사람의 사랑이 기억 날 때마다 교회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크리스찬이 되고 목회자가 되어 일본보다 후진국인 동남아시아에서 선교를 하게 되었다고 하더랍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절)는 것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를 사랑하심을 나타냅니다.

인간들이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과거의 삶', 즉 경험을 위주로 하나 예수님께서 선택하실 때는 '미래의 삶'을 보시고 선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눅 5:10)고 하십니다.

새로운 삶의 명령은 어제나 오늘이나 '생명을 얻게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다른 생명을 영양으로 섭취함으로써 그 삶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생명을 취하는 입장이 아니라 생명을 공급해 주는 새로운 삶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소외당한 이웃에게 친구가 되고 슬픈 자에게 위로가 되며 죽어가는 자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불꽃을 그 생명의 심지에 붙이라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삶이 주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최상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모두 다 자격이 없는 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자격이 없는 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은 은혜가 됩니다. 자격이 구비된 자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었으면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은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요 3:16).

죄를 짓고 뉘우치고, 뉘우치고 또 죄를 짓고 인간들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할 이유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부름받은 베드로도 신앙의 굴곡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주님은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마 26:31)하시고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하자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하자 예수님께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하나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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