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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한 사람들 (요일 4: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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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한 사람들 (요일 4:7-19)
     
세계적인 심리학자로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이며, 교육학 교수이며, 지능 연구의 대가인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 박사가 있습니다. 그 분의 유명한 저서인 ‘사랑의 기술’이란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그 분은 사랑을 연구하면서 “사랑의 삼각형 이론”을 발표하였습니다. 사랑은 정삼각형처럼 삼각 균형이 잘 잡힐 때에 참 사랑이 가능하다는 이론입니다. 

사랑의 첫 번째 요소는 ‘친밀감’(Intimacy)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친밀감을 느껴야 한다고 합니다. 함께 있으면 평안합니다.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집니다. 서로가 아껴주고 도와주고, 감정적으로 친밀함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행복을 느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랑의 두 번째 요소는 ‘열정’(Passion)이라고 합니다. 이성을 잃을 정도의 열정이 생겨야 합니다. 열정이 없으면 연애도 못합니다. 

세 번째 사랑의 요소에는 약속과 의무(Promise and Responsibility)입니다. 서로에게 헌신하리라고 약속합니다. 

사랑에는 세 가지 요소가 삼각형의 구조를 이루어야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 됩니다. 아내가 실수한 것은 내가 실수한 것이요, 내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곧 일체감입니다. 동일시하는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한번 일독하면 좋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한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드럽고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헝클어진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영혼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 전부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우리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 곧 연애편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가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기독교는 위대한 사랑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으로,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위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다가오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으로 호소하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희생의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완악한 한 사람의 금강석 같이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고, 단절된 신뢰를 회복시키고 사람 살만한 사회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그는 사랑할 줄도 모르고, 또 사랑받을 줄도 모르면 얼마나 삭막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것도 알아야 하고, 사랑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인간존재의 본질이며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가 됩니다. 사랑을 받을 줄만 알고 주는 것을 모른다면 절름발이 인생을 사시는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요, 자기만 아는 사람이요, 이런 사람은 한 두 번은 사랑받으며 살아갈 수 있지만, 영원한 사랑을 받을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그 사랑은 힘이 있고 영원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들입니다. 

7-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셨습니다. 7절에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하셨고, 8절에서도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10절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라고 하셨습니다. 11절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는즉”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사랑이시고, 그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배너는 미국 조지아주의 애플랜타에 설립된 심리영성치료연구소의 대표이며, 심리학연구소의 심리학과 영성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분이 몇 권의 책을 쓰셨는데, 대표작으로 ‘Surrender to Love’ 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사랑에 항복하다”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의 책에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데이비드 배너의 글을 조금 인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놀랍게 발전한다. 단순히 말해 하나님은 당신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사랑하신다. 그 분은 당신을 향한 사랑을 멈출 수가 없다. 그 분은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깊이, 무모하게 사랑하신다. 사랑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 분의 사랑에 자신을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모든 말을 다 인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깨달아야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발전합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나에게 하나님은 나의 전부요, 나의 생명이요, 나의 살고 죽는 이유가 되신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나의 열정의 50%도 안 된다고 하면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너무나 부끄럽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현기증이 날 정도로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깊이 사랑하시고 심지어는 무모하게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인을 보내주셨습니다. 

 “나마저 사랑하지 않으면”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작은 소녀가 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인형을 사랑하세요?” “그럼 사랑하고 말고” 그 말을 하자마자 아이는 뛰어가서 인형을 한 아름 안고 나왔습니다. 손님이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을 제일 사랑하니?” “예, 아저씨 제가 말해도 웃지 않는다고 약속해주세요” “그럼 약속하지” 그런데 소녀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코가 깨어지고, 한쪽 뺨에는 상처가 나고 한 다리와 팔이 없는 인형을 골랐습니다. “이것이에요” “아니, 왜” 손님이 묻자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나마저 이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이 인형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적인 입장으로 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부족한 사람들, 상처 나고, 장애 입고, 이기적인 허물과 죄악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어린 소녀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코가 깨어지고, 한쪽 뺨에는 상처가 나고 한 다리와 팔이 없어 내다버려야 하는 인형을 그래도 버리지 않고, 사랑하는 그런 마음과 같습니다. 

시103:14에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시78:39에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해주십니다. 우리가 본래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계시고, 기억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제목이 잘못되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비유의 이름을 달리해야 합니다. 주체하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사랑, 무조건 받아주시는 아버지, 매일 같이 기다리시는 아버지, 사랑을 소진하시는 아버지, 그런 이름을 붙여주어야 하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시고, 책망하시고 심판을 즐기시는 엄위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측은히 여기시는 아버지, 맨발로 달려오시는 아버지, 하인으로 생각하는 아들에게 인장 반지까지 내어주고, 소를 잡고 춤추시고,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마을의 사람들을 불러 잔치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의 진리를 잘 알고 있어야 하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창조된 인간은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독립하였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에게 벗어나면 자기도 하나님이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사탄의 속삭임에 그만 속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범죄한 영혼은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셨는데, 죽음을 우습게 알았습니다. 

 자유는 이제 속박으로 변하였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자기애, 자기 사랑, 이기적으로 자기만 아는 애착으로 변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고 보니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웃을 섬김과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적대시하고 지배하려는 관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지만 아주 제한된 사랑입니다. 이기적인 사랑, 자기애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큰 사랑에 비하면 이웃에게 베풀어야 하는 사랑은 인색하고 변덕스러웠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서는 죽음이라는 형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두려움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벗었음으로 몸을 가리고 나무 그늘에 숨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 두려워졌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9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하여금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였습니다. 

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속량하고 대속하시고 구속하시려고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화목제물이요, 속죄제물이 아들을 십자가의 심판에 내어주시고, 그 아들 안에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화목제물이라고 했는데, 헬라어 ‘힐라스몬’이라는 말은 달래는 제물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속죄를 전제로 합니다. 진정한 속죄가 없이는 화목한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2.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11절입니다.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그의 요한일서 강해에서 “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판별하는 궁극적인 시금석이 서로 사랑하는 문제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의 신앙을 드러내는 시금석이라고 합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습니까? 진솔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그의 신앙은 성숙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요, 주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 아니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알고 사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전도폭발을 일으키신 제임스 케네디 박사는 “예수가 만약 태어나지 않았다면”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는 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태평양의 외진 섬에서 미국병사가 영어를 할 줄 아는 원주민을 만났습니다. 그 원주민은 손에 성경을 들고 읽고 있었습니다. 그 미군 병사는 성경을 든 손을 가리키며 뭘 좀 안다는 듯이 씩 웃었습니다. “우리 문명 세계 사람들은 이제 그 책을 더 이상 믿지 않소.” 그러자 그 원주민이 씩 웃으며 되받아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손에 들고, 이 말씀을 믿는 것은 당신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리고 배를 두드리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아미 내 뱃속에 들어가 있을 거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누리는 사람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정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식인종이 변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처럼, 우리의 완전히 뒤집어지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식인종이 변한 것만 변한 것은 아닙니다. 이기적인 사람, 다른 사람을 죽어라고 미워하면서 살던 사람이 진정한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2절에 “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이요,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전해집니다. 


3. 사랑의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13절입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면,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보니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 죽으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고, 나는 주님 안에 주님은 내 안에 거하시고, 성령님이 나를 위하여 나와 함께 사역하시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서 나의 주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16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인류는 범죄 타락한 후로 두려움이 쌓여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두려운 존재입니다. 어두운 밤엔 어떤 짐승보다도 사람이 더 두려운 존재입니다. 마지막 죽음이 두렵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가 두렵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어 줍니다. 

17-19절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사랑의 완성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사랑하며 희생하며 내어주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합니까? 그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들 예수님을 주님으로, 구속의 속죄제물로 받고 보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요, 자매들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요, 나치군에 의하여 순교한 본 회퍼는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안 믿는 사람들이 알아들 수 있는 언어로 바꿀 줄 알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A라는 문법으로 말하고 대화를 하는데, 우리 교회는 B라는 문법만 고집하고, A라는 문법을 알려고 아니하고, 아예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불신자가 모처럼 마음을 비우고 우리 크리스천들과 이야기를 하려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니 알아들을 수 없고 화가 납니다. 불신자들이 말합니다. “기독교인- 당신네들은 왜 알아들 수 없는 당신들의 언어로만 말을 하느냐”고 항변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믿음의 언어를 이 사회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랑의 언어로 말을 할 때에, 저들은 사랑의 언어를 들으면서 믿음의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언어는 논리적이지 않아도 됩니다. 사랑의 언어는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을 깨드리기고 합니다. 사랑의 언어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몸짓이 있고, 자기 헌신이 있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도 있습니다. 한 사람을 섬기는 것은 사랑의 언어에 속합니다. 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고, 끝까지 돌아보는 것은 사랑의 언어에 속합니다. 

요일3:18에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언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귀한 것은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귀한 존재입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사랑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받은 사랑을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 헤아려보셨습니까? 사랑의 사람은 수용을 잘 합니다. 사랑의 사람은 관용합니다. 사랑의 사람은 모든 상황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죽겠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소녀를 구출한 사람”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에 들어 있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없는 어린 소녀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이층의 자기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어느 날 밤 소녀의 집에 불이 나서 할머니는 어린 소녀를 구하려다가 화마에 그만 숨을 거두었습니다. 불은 순식간에 번져갔고 벌써 아래층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소녀는 이층 창문에 나타나 울부짖으며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때 군중들 사이에는 소방대의 도착이 늦어지리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다른 곳에도 큰 화재가 일어나서 소방대원들이 다 그곳에 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갑자기 한 사람이 사다리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것을 집 벽에 기대고는 번개같이 올라가 집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그의 팔에는 소녀가 안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녀를 인도하고 밤의 어두움 속으로 흔연히 사라졌습니다. 그 소녀에게는 살아 있는 친척이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몇 주일 뒤 마을회관에서는 누가 이 소녀를 집으로 데려가 길러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소녀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한 선생님이 일어나 자기가 그 소녀를 맡아 키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교사는 자신이 소녀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줄 수 있다는 장점을 강조하였습니다. 한 농부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넓은 농장에서 이 소녀를 키우겠다고 했습니다. 농장에 사는 것이 어린 소녀에게 있어 건강하고 되고 안정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을 농부는 강조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름대로 소녀가 자신들과 함께 살면 좋은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마침내 마을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나는 이 아이에게 여러분 모두가 지금까지 말한 좋은 조건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다 돈과,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소녀는 시선을 땅에 떨어뜨린 채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 사람들이 자기가 어린 소녀를 돌보아준다는 말에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네 같으면 경제적으로 짐이 되고, 귀찮은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사회인 서양의 이야기는 그래도 다른 것을 봅니다. 

회의를 맡아 사회하는 의장이 말했습니다. “그럼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은 안 계십니까?” 그 때에 한 남자가 회관 뒤쪽에서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는 걸음걸이가 느렸고, 어딘가 아파보였습니다. 맨 앞으로 걸어 나온 남자는 어린 소녀 앞으로 곧장 다가가 두 팔을 내밀었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멈추었습니다. 그 남자의 두 손과 두 팔은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소녀가 외쳤습니다. “이 분이 바로 저를 구해주신 분이예요!” 소녀는 펄쩍 뛰어 올라 자신의 생명을 의지하듯 그 어른의 목에 두 팔을 안았습니다. 그 운명적인 날 밤에 그렇게 매달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소녀는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몇 분간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런 다음 고개를 들고 그 어른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의장이 모두에게 말했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글은 이것으로 그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짧은 글을 읽고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녀는 말할 것도 없이 자기를 구해준 어르신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좋은 조건과 환경보다도 자기를 구해준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사랑을 받아보셨습니까? 여러 분 한 사람을 위하여 화상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사다리를 타고 불길을 헤치면서 구해주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그런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죄악 세상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보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도 보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성홍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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