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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믿어라(2) : 염려하지 말아라 (마 6: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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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믿어라(2) : 염려하지 말아라 (마 6:25-30)

염려와 생각이 차이

윌리엄 오슬로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이며, 미국에 있는 유명한 존 홉킨스 의과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가 풋내기 의대생이었을 때, 앞날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이러한 어둠에서 끌어낸 것은 우연히 읽게 된 토머스 칼라일의 글 한 토막이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먼 곳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똑똑하게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잘 알 수 없는 내일을 염려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오늘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몬트리올 제네럴 병원에서 근무하던 무명시절부터 그렇게 살려고 애썼던 사람이죠. 그가 훗날 예일 대학에서 연설을 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미래는 오늘뿐이다. 미래 안에 내일이란 없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날은 바로 오늘이지 내일이 아니다.”‘지금’이라는 시간을 주님께 계속 드린다면, 주님 안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오늘을 산다면 우리의 미래를 주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잘 생각해 보라!”라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염려’라는 말과 ‘생각’이라는 말이 동시에 나옵니다. 흥미롭죠? “염려지 말라!” 그리고 “생각하라!”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내일 일을 생각하면 염려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내일을 생각하셨기 때문에 참고 견디셨으니, 십자가라는 무거운 짐이 있지만, 내일을 생각하며 불안하기보다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미래를 맞으셨습니다. 안달하는 불안한 자세가 아니라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내일 일을 대할 것을 바라십니다.

왜 염려하는지 잘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글에서 보았는데 흥미롭게 정리를 해두었네요. 첫 번째로 큰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큰일이 없으면 아주 하찮고 작은 일로 걱정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큰일이 벌어지면 그런 걱정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사람은 참 묘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근심하고 걱정하는 일을 보면 참 시시한 것들로 걱정합니다.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는다고 걱정합니다. 성적이 떨어졌다고 애를 태웁니다. 아이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그 아이를 붙들고 앉아서 혼내면서 집안 망하는 것같이 걱정합니다. 그것이 그렇게 걱정하고 근심할 일입니까? 그러다가 아이가 덜컥 병이 나서 누우면 지금까지 하던 걱정거리는 한순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공부 못해도 좋다, 그까짓 5등 하다가 10등으로 밀리면 어떠냐, 앞으로는 거짓말해도 좋다, 그러니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고 하면서 근심 걱정에 싸여 있던 마음이 순간적으로 너그러워집니다. 큰일이 생기면 그렇게 쉽게 너그러워질 것을 아주 시시한 문제들을 가지고 아옹다옹하며 얼굴을 펴지 못하고 살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또 집집이 보면 형제들이 별것도 아닌 문제로 서로 다투고 따지고 아옹다옹하며 살아갑니다. 그것도 큰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덜컥 병이 나서 입원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동안의 일은 싹 사라져 버립니다. 큰일이 있기 전에 문제들을 해결하면 좋았을 것인데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가끔 큰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소한 문제 가지고 아옹다옹하는 일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이 너무 편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너무 편하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움직이지 않고 앉아만 있으면 편할 것 같아도 걱정이 많아집니다. 잡념이 많아집니다.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며 살아가야 하는데 일하지 않고 너무 편하니까 염려가 많고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집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하나인데 “거룩한 일에 분주하라!” 자신의 삶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가함’이 근심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요즘은 ‘건강 염려증’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죠. 물론 우리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염려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재미있는 통계입니다. 정신병 환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고 합니다. 여자 중에서도 자녀가 많은 여자보다 자녀가 적은 여자가 많다고 합니다. 아이 하나 있는 여자보다는 아이가 하나도 없는 여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아이가 없는 여자보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가 더 많고, 바쁜 사람보다 한가한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사람이 시간이 많고 한가하면 쓸데없는 문제를 가지고 근심하게 되고 걱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의 흉을 보거나 남의 일에 참견하게 되지요.세 번째로 결단력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매일매일 결단을 내려야 하는 문제를 많이 가지고 살아갑니다. 

옛날 사람은 생활이 단순했고 단조로워 까다로울 것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가전제품을 사고, 핸드폰을 사고, 학교를 결정하고, 직장을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해졌나요?

자기가 사는 마을에 태어나 서당에 다니고, 가업을 이어가는 사람들, 농사를 지어도 남들이 하는 대로 하면 되었지 특별히 결단 내리고 할 일이 없었습니다. 장가를 가도 동네에 처녀가 한둘밖에 없어서 선택하느라고 고민할 것도 없었습니다. 시장에 가서 넥타이를 하나 사도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몇 개 걸린 것 중에서 하나를 사면되니까 살아가기가 아주 쉬웠습니다. 자동차 사고 날 염려도 없었고 경쟁이 심한 것도 없었습니다. 마차를 타고 가다 전복이 되거나 바퀴 하나가 빠져도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매사에 결단이 요구됩니다. 장가를 가도 여자가 많아서 고민입니다. 미스 김을 선택해야 잘 살 것인지 미스 리를 선택해야 잘 살 것인지, 넥타이 가게에 가면 넥타이가 수백 개 걸려 있는데 그 많은 것 가운데 어떤 것을 고를지 몰라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다 보면 우물쭈물하게 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교회도 워낙 많으니까 어디를 가야 좋을지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결단력이 없어서 우물쭈물하는 사람에게 고민이 많습니다. 결단력이 있어야 매사를 시원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일본 격언에 보면 그런 말이 있습니다. “갈까 말까 하는 길은 가지 말고, 먹을까 말까 하는 음식은 먹지 말고, 만날까 말까 하는 사람은 만나지 말고, 죽을까 말까 할 때는 죽으라.” 

지극히 일본인다운 아주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단력이 없어서 더 많은 근심과 걱정 가운데 사는 것도 맞는 것 같습니다.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해도 늘 근심 가운데 합니다. 평생 가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고민합니다. 

모든 것을 주께 맡겨 놓고 시원스럽게 믿고 나가는 사람이라야 은혜를 입고 주님을 만나기도 하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모자람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우리에게 언제 염려가 찾아오나요? 우리가 원하는 것 만큼 채워지지 않을 때가 아닌가요?
사실 우리의 염려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것이죠.
산상수훈이 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의 깊이를 조금만 더하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평범함을 넘어서는 신앙이 바로 산상수훈의 말씀이죠.

모자랄 때 염려하며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신앙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채워주실 때 감사를 알고,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상식적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너무나 당연한 신앙의 행위를 넘어서서 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의식주의 문제가 다 생명을 위한 것인데, 생명이 하나님께 있는데, 지금 모자라는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역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염려거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사용하시고, 우리를 높이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특별히 사도 바울은 그의 삶에서 ‘모자람’ 때문에 고민하며 기도했던 사람이죠. 그가 목회자로서 가능하면 완벽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완벽함으로 우리를 사용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몸의 가시를 가지고 기도할 때, “그것이 너에게 은혜다!”라고 말씀하실 때, 사도 바울이 감사로 그것을 받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가시를 가지고 있으므로 평생토록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사도가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우리의 삶에서 모자람 때문에 찾아오는 곤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장에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 무엇인가요?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모자람으로 당황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염려를 기적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완벽한 준비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주님이 계시느냐를 생각하도록 하신 것이죠. 포도주가 모자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만드신 기적의 포도주를 맛볼 수 있었던 역설 말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모자랄 때 주님이 함께하심으로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을 기대하십시오.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갈까요?
요한복음 6장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만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나옵니다. 발단은 이 많은 무리를 어떻게 먹일까? 고민할 때, 한 어린아이가 가지고 나온 오병이어였습니다. 
턱도 없이 모자라는 것, 정말 하찮은 것,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축복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자라다고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강준민 목사님의 책에 보니까, 아주 멋진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체하실 때 더욱 큰 기적을 에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잠시 거절하실 때 더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믿어라!
우리의 삶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없이 질문을 하죠. 아니 하나님께 따져 묻기도 하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염려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문제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분을 믿어야만 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강준민 목사의 책 [기다림은 길을 엽니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코리 텐 붐은 자신이 열 살이나 열한 살에 불과할 무렵, 아버지와 함께 암스테르담에서 하렘으로 기차를 타고 가는 주에 일어났던 사건을 ‘주의 피난처’라는 책에서 이렇게 들려줍니다. 
나는 어느 글에서 성범죄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버지에게 느닷없이 물었다. “
아빠, 성범죄가 뭐예요?”
아버지는 질문에 대답할 때 늘 하시던 것처럼 나를 쳐다보셨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마침내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 위에 있는 여행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셨다.
“코리, 이거 들고 내리겠니?”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어 보았다. 가방은 아버지가 아침에 산 시계와 부품들로 가득했다.
“너무 무거워요.”

내가 말했다.
“그렇지? 어린 딸에게 이런 짐을 들라고 시키는 아버지는 아주 이상한 아버지일 거다. 코리, 지식도 마찬가지란다. 어떤 지식은 아이들에게는 너무 무겁단다. 네가 나이가 들고 더 튼튼해지면 그때는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그저 아빠가 너를 위해 짐을 들 거라고 믿어야 한단다.”

나는 만족했다. 만족했을 뿐 아니라 너무나도 평안했다. 이 질문과 내가 하는 모든 어려운 질문에는 해답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것들을 아버지가 갖고 계시게 하는 데 만족했다.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의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고난은 신비에 속합니다. 고난 속에서 보배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교훈하시고, 성장시키시고, 축복하십니다. 고난의 이유에 대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만 고난을 통해 성장하십시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도록 하십시오. 요셉처럼, 다윗처럼 기다림을 통해 축복을 받도록 하십시오.
염려보다는 기다림과 인도하심을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어느 비행사가 이런 일을 경험하였답니다. 두 시간 가량 비행을 한 후 그는 기체에서 나는 소음을 들었으며 곧 이 소음이 쥐가 무엇을 갉아 먹는 소리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비행기가 착륙하는 사이에 쥐가 기체내로 들어 와서 그의 비행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쥐의 날카로운 이빨이 정밀한 기체를 얼마나 갉아 먹을지를 몰라 그는 몹시 두려운 생각에 잠겼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떠나온 지점으로 되돌아 그는 데도 두 시간이 소요되고 앞으로 착륙할 지점에 도착하는 데도 두 시간이 소요되는 그런 위치에서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쥐는 설치동물이기에 높은 곳에서 적응력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이 사실을 상기한 비행사는 비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1천 피트 상공으로, 또 1천 피트 상공으로, 이런 식으로 상공을 비상하여 고공 2만 피트 높이로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쥐가 갉아 먹는 소리가 멈추었습니다. 두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그가 다음 착륙지에 안전하게 착륙하였을 때 기체의 구멍에 쥐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염려는 마치 쥐처럼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을 갉아 먹습니다. 그러나 이 염려는 하나님의 영역에서 살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은 이의 비밀스러운 영역으로 염려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염려하지 않는 법에 대하여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않는 법

첫째, 염려가 아닌 생각하는 것이죠.

본문 28절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라고 말씀하죠. 여기에서 생각하라는 말은 원어로 ‘카타 만다노’입니다. ‘카타’라는 말은 철저하게, ‘만다노’라는 말은 배운다는 말입니다. ‘철저하게 배운다.’ 

이 말은 믿음으로 생각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염려로 들의 백합화가 자랍니까?

제가 성지순례에서 찍었던 사진인데,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 있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습니다. 제철이 지나면 꽃이 떨어지고 아름다움이 사라지지만, 여지없이 때가 되면 다시 핍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단지 아직 보이지 않을 뿐이고,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꽃이 졌을 뿐입니다. 들의 백합화도 잘 자라는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염려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32~33절에 보면 그 염려를 극복의 방법으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에서 ‘구하라.’라는 말은 ‘계속적으로 구하라.’라는 말입니다.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하며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며 염려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내일로 염려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불공평하고 불의한 일로 인하여 불평하기보다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면 해결될 문제라는 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스케일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오늘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 가운데 하나는 34절에 나오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며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한때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이게 최선입니까?”
최선을 다했으면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합니다. 왜냐하면, 염려의 날이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사람들의 염려는 지금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그것이 끝나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래서 분노하고 해결되지 않는 일들 때문에 염려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의 인생을 보면 너무나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는 정말 억울한 일과 예기치 않은 일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일, 게다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 당한 일이었습니다. 

요셉의 삶의 최고봉은 창세기 50장 20절의 고백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

그가 살아가는 순간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지금 당하는 일을 보면 장래가 얼마나 불투명하고 염려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순간순간마다 ‘형통함’을 경험합니다. 그가 당하는 일이 마지막이 아니라 “이 또한 지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종국에는 하나님께 선하게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 많은 고통의 순간을 경험합니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기는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가다 난기류에 휩싸여 흔들리는 시간도 있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시간입니까?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참는 시간이 문제지 지나갑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염려거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염려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염려를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착하고, 선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 또한 지나가고” 이전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이 임할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 수 있어 행복하다]라는 책에서 유정옥 사모님이 참 멋진 글을 썼습니다. 먼저 염려의 시간을 지나온 누군가의 신앙이 우리에게 힘이 되지요.
나는 요즈음 내 삶의 모든 경기에 임하면서 두려움이 없어졌다. 그것은 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이름 대진표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다윗도 그 경기의 대진표의 이름을 바꿀 수 있었기에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다.
소년 다윗 VS 골리앗 장군 (누가 보아도 다윗이 진다)
하나님 VS 골리앗 장군 (누가 보아도 골리앗이 진다)

모세도 그 경기의 대진표의 이름을 바꿀 수 있었기에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다.
양치기 모세 VS 애굽의 바로 왕 (누가 보아도 모세가 진다)
하나님 VS 애굽의 바로 왕 (누가 보아도 바로 왕이 진다.)
나는 요즈음 내 삶의 대진표를 다시 짜고 있다. 내 이름을 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꾸는 일이다. 예를 들면,
유정옥 VS 말기 암 (누가 봐도 유정옥이 진다)
하나님 VS 말기 암 (누가 봐도 말기 암이 진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 우리의 삶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피할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하여 염려의 방법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맡기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대진표를 다시 짜야합니다. 우리가 누구와 싸우며 염려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결국, 염려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염려의 먹구름 속에 가려진 찬란한 태양과 같은 하나님의 뜻이 보여야 합니다. 먹구름은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먹구름을 주신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란한 태양을 주실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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