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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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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히 4:1-11)


요즘 '진짜 사나이'라는 예능프로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 밤에 잠이 통 오지 않아서 'TV 다시 보기'를 찾다가 우연히 그 프로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는데, 1회를 보고 나니 너무 재미있고도 감동적이어서 그 다음 회, 또 그 다음 회 하는 식으로 가다 보니 결국 하룻밤에 제5회인지 6회인지까지를 연속으로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실제 군대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무반의 군기가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신병은 휴식 시간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침상에 드러누울 수도 없으며 PX도 마음대로 혼자서 갈 수 없고 심지어는 화장실조차 허락을 받고 가야 하는 기간도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선임병에게도 마찬가지로서, 비록 한밤중의 취침 시간이라 하더라도 비상 사이렌이 울리면 즉시 근무 상태로 돌입해야 하며, 휴가 중일 때에도 비상사태 따위가 선포되면 당장 부대로 복귀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군대에서는 자유 시간은 물론 휴가 기간조차 결코 완전한 휴식이 될 수는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군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휴식이란 오직 '제대'일 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안식'은 바로 그런 완전한 휴식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수고와 고생과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 있는 진짜 휴식이며 영원한 안식입니다. 
그러니 기독신자는 바로 그 '완전한 안식'에 들어가게 될 날, 즉 이 고난의 인생을 끝내고 저 천국에서 영원토록 평안히 쉬게 될 그 행복한 시간을 훈련병이 10분간 휴식을 기다리고 사병이 첫 휴가나 제대 날짜를 기다리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학수고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그처럼 완벽하고도 또한 영광스러운 하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 시간에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복음의 말씀을 확실히 믿는 신앙인'만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1절부터 6절 말씀에 "1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3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4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라고 한 것은 바로 앞의 3장 마지막 절을 받는 내용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출애굽 세대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믿지 아니하면 능히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신약 성도들 역시 본을 삼아서 스스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는데, 그렇다면 '들어가지 못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의 안식" 즉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안식이었습니다. 
이 안식은 출애굽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바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복지는 결코 '참된 안식'은 아니었으며 어디까지나 참된 안식에 대한 '예표'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올 것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진짜 실체'는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복지, 즉 천당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천당 입성의 약속이 오늘날 이 말씀을 받고 있는 신약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약속'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 중에" 바로 그 진짜 안식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처럼, 교인이라 해도 다 자동적으로 천당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안식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를 결정짓는 시금석은 과연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두고 2절에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복지'를 약속 받았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복음"이었던 것처럼, 신약 성도 역시 '천당'이라는 진짜 복지에 대한 "복음"을 듣고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 그 약속이 자신에게 "유익되지 못한" 자, 다시 말해서 그 약속 성취를 실제적으로 받지는 못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좀 더 쉽게 번역하자면 '그 듣게 된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즉 복음이라는 것은 '듣기만' 한다고 해서 효력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듣고 난 다음에 반드시 '믿어야'만 그 약속이 '유효'하게 성취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원칙 역시 신약 성도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확신 중에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믿는 우리"란 지금 현재 그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는 신자를 가리키며, "들어가는도다"라는 동사의 헬라어 원어는 현재진행중인 상태를 강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즉 천당은 믿는 자에게는 이미 성취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또한 장차 완성될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말로 하자면, '믿음'은 하나님의 그 고마우신 '천당 약속'에 대하여 사람이 마땅히 나타내야 할 최소한의 기본적인 반응이며 필수적인 의무인 것입니다. 

3절 하반절 이하에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라고 시작되는 내용은 바로 지금까지 말씀했던 사실을 구체적인 성경 인용으로써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라는 말씀은 시편 95편 11절의 인용으로서, 출애굽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결국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재삼 확증시켜 줍니다. 
  
3절 끝에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고 한 것은 그처럼 출애굽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안식의 약속'이 다 끝난 것은 아님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안식은 '가나안 복지'가 아니라 천지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또한 약속해 놓으신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4절은 바로 그 안식의 약속이 제일 처음 선포된 창세기 2장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라고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5절과 6절 상반절에서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에서 첫 안식을 선포하신 후에 그 안식에 "저희"는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그 '저희'에 해당되지 아니하는 사람들 즉 "거기 들어갈 자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뜻입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며, 거기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 하는 것은 순전히 "복음 전함을 받은 자"가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 하는 여기에만 달려 있다는 사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처럼 가나안 복지를 약속 받고도 그것을 믿지 않은 자들은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도대체 뭐가 아쉬우셔서 당신의 말씀을 믿지도 않는 자들에게 그 축복을 내려 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처럼 좋은, 그처럼 행복한 안식을 아주 조건도 없이 공짜로 약속해 주셨다면, 최소한 그 약속을 믿는 믿음만은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은커녕 아예 '믿음'부터 보여 주지 못했으니 하나님께서 그런 무례하고 교만한 인생들에게 '가나안 복지 입성'의 축복을 허락해 주실 리가 만무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안식' 즉 '천당 구원'의 약속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는 당연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보지 못하는 것'이 '실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즉 지금은 '바라는 것'에 머물러 있는 천당의 안식을 실제로 누리기 위해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 안식이라는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연인에게 "내가 서프라이즈 선물 준비한 것이 있으니까 지금 좀 나와 줄래?"라고 말하는데도, "네가 무슨 선물을 나한테 준다는 거야? 날 속이려 들지 마."라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이는 결코 참된 연인 사이가 아니며, 그렇게 자기가 선물 주겠다는 말도 못 믿는 상대방이라면 선물을 주고 싶던 생각조차 싹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아빠가 오늘 저녁에 집에 갈 때 맛있는 것 사 가지고 갈게."라고 약속해 주는데, "아빠, 우리한테 거짓말 하지 마세요."라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자녀가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최고로 좋은 것을 약속해 주시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 '안식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이 믿지 않음'으로써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실패를 거울삼아서, 창세 때부터 선포되고 예수님을 통하여 확증된 이 놀라운 안식의 약속을 꼭 믿음으로써 저 영원한 하늘 복지의 안식에 함께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다 마친 충성인'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7절 이하 11절에 "7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8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11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의 글"이란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편 95편 7절과 8절을 가리키는데, 이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라고 그 시편 내용 중에서도 특히 "오늘날"이라는 단어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라고 시편의 원문을 요약해서 인용했습니다. 
즉 이 히브리서 기자는 그처럼 '하나님의 음성' 즉 말씀을 듣고도 강퍅하여 순종치 아니한 자들이 당했던 일을 '오늘날' 신약 성도들 역시 자기에게 주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는 경종으로 삼아야 한다고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히브리서 기자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바로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준 안식'이란 바로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물론 출애굽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아니함으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광야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그 '가나안의 안식'에는 분명히 들어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후' 즉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다시 '안식'을 언급하시면서 '거기에 들어가려면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나안 복지란 '참된 안식', '영원한 안식'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 히브리서 기자가 논증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어지는 9절에서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가나안 땅이 아닌 안식, 모세 시대 때뿐 아니라 다윗 시대, 또한 지금 이 히브리서의 말씀을 듣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과 모든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진짜 안식'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안식할 때"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의 생을 다 끝낸 후에 천당에 입성하게 되는 때'입니다. 

10절 말씀이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란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먼저 천당에 간 성도를 가리키며, 동시에 똑같은 믿음을 가지고 이미 천국을 소유하고 있는 지상교회의 성도 모두를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라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후 제7일에 스스로 안식하시며 그날을 안식일로 제정하셨던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바로 그처럼 "자기 일을 쉬느니라"고 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천당에 들어간 성도는 이제 모든 세상 수고를 그치고 완전한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천당에 들어가게 되는 성도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자기 일'을 했던 사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창조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이레째 '안식'하셨던 것처럼, 기독신자 역시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사명의 일'을 완수한 후에 비로소 그 모든 수고로부터 '쉬게' 되는, 정말 행복한 안식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결론적으로 강조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그 천당의 영원한 "저 안식"을 믿는 신자라면 바로 그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애를 쓰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 동원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놀고먹으려' 하는 사람은 결코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천당 구원을 믿는 자에게는 그가 천당에 입성하기 전에 반드시, 필연적으로,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통과하게 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믿는 그대로 행하는 신행일치의 삶, 주님께서 각자에게 맡겨 주신 '달란트'와 '고을의 권세'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여 '더 많은 것'을 남기는 충성의 족적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바로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는",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 복지의 약속을 받고도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함으로써 그 안식을 얻지 못했던 자들과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될 뿐인 것입니다. 

사실 '노는 사람'에게는 안식이란 개념 자체가 적용될 수 없습니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사람에게 '휴식'을 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게으름의 연장일 뿐이며, 평안한 휴식이나 기쁨의 안식이 아니라 오히려 더 허리가 아프고 몸은 좀이 쑤시게 될 수밖에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휴식이란 오직 '일한 사람'만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일해야 할 시간에 땀을 흘리며 열심히 수고한 사람에게만 '안식'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고 행복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고라고는 별로 한 것도 없는 사람에게 '이제 수고를 그치고 쉬라.'고 위로와 치하를 해 주시겠습니까? 
사람이라면 그냥 상대방 체면 세워 주느라고 그런 속에도 없는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매사가 분명하신 예수님께서 그러실 리야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는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은 천당의 안식에 아예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 '수고'란 것이 '천당 입성을 위한 공로'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신행일치의 '수고'가 없는 사람은 그 '신앙'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천당에서 꿀 같이 달콤한 안식을 누리게 될 순간을 바라보면서 오늘 지상교회에서 죽도록 충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바로 '천당 복음을 믿는 믿음'이 없는 것이 분명하니 당연히 천당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직 '자기 일'을 다 하고 그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성도는 그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더 이상 수고가 없는 영원한 안식, 그것도 그처럼 그립던 예수님을 만나서 그 주님께로부터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과 상급을 받으면서 완벽하게 누리게 되는 안식이니, 그것이 바로 천당에서 누리게 되는 최고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몸된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고 있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천당의 안식을 반드시 누리게 될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고 보증해 주는 은혜로운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치게 될 수고' 자체가 아예 없는 사람은 결코 들어갈 수도, 들어갈 리도 없는 저 안식의 나라, 오직 그날을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선한 싸움을 열심히 싸운 '하나님의 백성'만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는 저 진짜 안식의 자리에까지 한 명도 도중 낙오하지 않고 꼭 함께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옥은 안식이라고는 단 1초도 없이 영원히 '불로 소금 치듯 하는' 고통만 받는 곳입니다. 
그 곳은 '손가락 끝으로 찍은 물 한 방울로 혀를 서늘하게 해 주는' 휴식조차 없는 것입니다. 
천당은 그와 정반대로 단 1초의 슬픔이나 고통도 없이, 영원토록 기쁨과 행복만 있는 안식의 처소입니다. 
그 곳은 다시는 '사망'은 물론이요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릴 일이 없는, 문자 그대로 완전무결한 유토피아의 시공간입니다. 
그러니 참된 신자는 바로 그 멋진 안식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간절히 사모하면서 거기에 들어가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소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 '괴로운 인생길'을 가면서 때로는 이대로 영원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중생인의 삶을 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죄의 저주가 작용하고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까닭에 이 멍에를 완전히 벗고 평안히 안식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때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버지로서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이 매순간마다 압박해 오는 생활고의 중압감과 한숨만 가지고서는 해결될 길이 없는 온갖 마음고생으로부터 좀 해방되고 싶은 생각이 가끔 들지 않습니까? 
아내와 어머니로 사느라고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고 가슴 한 켠에는 항상 아프고 무거운 응어리를 안고 살아야 하는 이 괴로운 인생에서 한시라도 빨리 자유하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들지 않습니까? 
  
청년들은 실업자면 실업자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느낄 수밖에 없는 온갖 스트레스와 경제적 자립과 독립과 결혼에 대한 부담감을, 학생은 학생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입시지옥이라는 고통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그저 시원하게 벗어던지고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싶은 생각을 꿈에서도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놀랍게도 바로 그 꿈이 이루어질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 모두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 주시고 우리 각자의 어깨에서 그 인생의 얽매어 있는 멍에를 완전히 벗겨 주신 후에 저 영원한 하늘나라의 안식에 들어가서 푹 쉬게 해 주실 한 날이 하루하루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드러누워서 휴식할 때가 아닙니다. 
그 안식의 날은 분명히 가까워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저앉아도 될 때는 아닌 것입니다. 
현재라는 시대는, 오늘이라는 날은, 지금이라는 순간은 아직까지는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빌립보서 2장 12절에 기록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대로 '구원 완성'에 이르는 그날까지 아직은 오로지 '믿음을 지키고 맡겨 주신 사명에 힘써 충성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에게는 옛날에 유행했던 어느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었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 주시는 내 주님께."라는 꿈같은 일이 우리 눈앞에 실제로 벌어지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도 '믿음에 화합지 아니하고' 약속을 받고도 '순종치 아니함'으로써 주님 재림의 날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가 되지 말고, 천지창조 때에 안식일을 제정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재림 때에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마고 약속하신 이 '완전하고도 영원한 진짜 안식'에 꼭 들어갈 수 있도록 '천당구원에 대한 믿음'과 '복음전파의 사명'에만 끝까지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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