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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뜻 (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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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뜻 (눅 22:39-46)


I. 내 삶이 아플 때

강화도 앞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갔던 고깃배 한척이 갯벌에 좌초되어 있었습니다. 동리 청년들이 그배를 끌어내기 위해 온갖 애를 써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동리 어르신 한분이 말합니다.
“내버려둬. 새벽에 밀물이 쏟아져 들어올게여!
 그러면 배는 저절로 밀려오게 돼 있어!”

한 나라가 좌초되어 있을 때, 어느 가정이 진흙탕에 빠져있을 때, 
한국교회가 갯벌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을 때 우리는 어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은혜의 밀물이 밀려들어 오면 됩니다.
기도의 밀물이 쏟아지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삶의 상황이 어려워져만 갈 때에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입니까? 집안이 기울어져 갈 때에 사업이 어려워 질 때에 직장생활이 불안할 때에 내 앞 길이 매우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보일 때에 세상 사람들은 이 삶의 상황을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갑니까?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태도는 불평하고 원망하는 일입니다.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는 일들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태도입니다. 
혹자들은 문제를 덮어버리고 잊어버리고 문제를 부인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합니다. 가면을 쓴체 마치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삶의 뒷골목에서는 마냥 불안해하고 공포를 더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문제로부터 도피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잠 또는 술에 몸을 맡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 어떤 방법도 우리 삶에 전혀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법을 택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쩔 수 없는 난관과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때 이런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바로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하면 상황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II. 기도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기도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첫째,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기도에 가장 영광스러운 결과는 기도하는 내가 변화하는데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잘못을 깨닫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불순종했던 나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우리 자녀들이 속을 썩여서 기도하다보면 나 자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속썩이던 자식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신랑되신 우리 주님 앞에 나 자신이 얼마나 순결하지 못한 신부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업문제를 놓고 기도하다 보면 나 자신은 하나님의 도움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해줍니다.  

둘째,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문제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언제나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역사하실 기회입니다. 

셋째, 기도는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나에게 부여해 줍니다. 

물이 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영을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문제가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풀 수 있는 실력 없음이 문제입니다. 이때 기도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 풀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기도는 만사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넷째, 기도는 감사와 찬송을 가져다 줍니다.

찬송은 가장 신령한 차원의 기도요 곡조가 붙은 기도입니다. 

세계 수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에만 찬양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의 찬양은 흉내지요. 왜요?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눈을 만든 자가 보지 않으랴. 귀를 만든 자가 듣지 않으랴” 

초대교회를 고발하는 한 상소문에는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정한 날 정한 시간에 모여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그 시간을 마쳤다.” 
기도는 불평하던 입술에 감사를 가져다 줍니다.
기도는 원망하는 가슴에 찬송을 가져다 줍니다.

III. 자는 자여 어찜이뇨?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목전에 두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 문제를 대면하셨나요?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불평이나 원망이나 자학하지 않았습니다. 가면을 쓴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문제로부터 도피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겟세마네동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문제를 알고 있었던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도 어렴풋이 다가올 시련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에게 중요한 어떤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바로 자기 자신들의 고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근심하고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45절에 보면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제자들은 슬픔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미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슬픔과 불안의 순간에 저들은 오히려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요나라는 선지자가 나옵니다. 니느웨를 위한 소명을 거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 그 밑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망각으로의 도피!  “에라 잠이나 자자.” 일종에 도피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요나를 향한 구약의 외침은 무엇이었습니까? “자는 자여 어찜이뇨?”  
슬픔에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음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어찌하여 너희들이 자고 있느냐?”한국교회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라고 문제가 없겠습니까? 
우리들의 삶의 정황과 무엇이 다릅니까? 지금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사순절은 이 땅에 모든 그리스도인들 이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때입니다.
3월 11일부터 40일동안 황홀한 복음과 함께 걷는 40일 새벽여행 특새가 펼쳐집니다. 저는 한소망교회 목사로서 전성도들에게 기도전쟁에 소집령을 내립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기도해야 할 때라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지구촌의 위기, 경제적 위기, 군사적 위기, 영적 위기, 가정적 위기, 어디다 “위기”를 붙여도 동의가 되어지지 않습니까? 총체적 위기, 전방위적 위기라는 겁니다. 
이미 2004년 미 국방부는 기밀문서 공개했습니다. 
한반도 핵전쟁 시뮬레이션을 작성해 놓은 것입니다. 
낭만적인 사람들 가운데는 북한이 핵을 가지면 통일이후에 우리가 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북한의 유일한 목표는 적화통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철없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사정거리가 가장 짧은 핵탄투 미사일 하나에 북한의 조그만 핵을 장착하여 남한을 향하여 쏜다고 가정했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미 국방부가 시뮬레이션을 해 본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모른긴 해도 북서풍이 부는 북한에서 남한으로 바람이 부는 겨울철에 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미 국방부는 예상하고 있습니다. 

사정거리가 가장 짧은 탄두미사일 한방을 쏘았을 때 어디에 떨어지는가? 
용산에 떨어집니다. 그곳에 한미연합사, 국방부, 미군본부가 있기 때문입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1.8km내에 있는 모든 건물과 사람과 동식물들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재가 되어서 날아가 버립니다. 
한두번 더 깜짝거리고 나면 4.5km내에 있는 모든 시설들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집니다. 
마포, 반포, 상도, 여의도 일대가 쑥밭이 되어집니다. 
처음 1.8km내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40만명이 죽어갈 것이고, 다시 무너지는 건물과 핵진에 의해서 22만, 바람에 의한 낙진에 의해서 합쳐 125만 서울시민이 순식간에 죽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것은 곧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과의 싸움도 아니었고 제사장들의 문제도 아니었고 헤롯이나 빌라도의 문제도 아니었고 바로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정말 이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이 고난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어 가실까?
이 고난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정말 나는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IV. 함께 기도 할 때 입니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일원으로서 가장 큰 숙제가 있다면 함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물론 혼자서 골방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 같은 특별한 기간엔 온 성도들이 온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때입니다. 교회에 특별한 Mission - 사명이 던져졌을땐 온 성도가 함께 모여 기도할 때입니다. 

예수님도 가끔 혼자 기도하셨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홀로 기도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남모르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눈물지으며 기도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골방에 문을 걸어 잠그고 땅을 치며 홀로 울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티내지 않고 금식하며 전능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속에 동일한 과제가 있을땐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모여 기도할땐 특별한 능력과 은혜가 있습니다. 
이럴땐 자리에 앉아있기만 해도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도의 물결에 합류하기만 해도 은혜가 밀려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가정의 어린 자녀들을 함께 불러 모아 놓고 가장된 사람이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가 일제히 일어나 한국교회를 살려달라 외치며 임박한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온민족이 일어나 이 연약한 민족을 살려달라고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 

성령받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하늘문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가장 연약한 사람들이 손에 손을 붙들고 기도하게 될 때에 하늘의 신비한 권능을 체험하고 맛보게 될 것입니다. 

V.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예수님 기도하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고난이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 
내가 직면하고 있는 고난을 통하여 내가 어떻게 순종해야 될 것인가?
기도하는 소극적인 이유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가장 적극적인 뜻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기도했을까요? 아니요. 지금 예수님은 기도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종종 많은 장을 할애하며 “시온의 회복”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백성들이 지금 신음하고 있다. 저들의 신음소리를 내가 들었다. 저들의 시온성을 내가 회복시켜 줄 것이다.” 지금은 저들이 끌려가 피흘리며 신음하며 고통 가운데 빠져있지만 내 백성들이 시온성을 향하여 돌아오게 될 것이다. 시온을 회복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36절에도 보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이 시온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황폐하고 황무한 그 땅을 다시 일으켜 세우게 될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반드시 이룰 것이다.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 
“내가 약속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 기도로 그 약속을 이루어 가야 한다.”

그 다음절에 이어지는 37절을 경청해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그래도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참으로 묘한 대목이 아닐런지요. 하나님께서 시온을 회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으면 회복시키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복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으면 하늘문을 여시고 복을 내려 주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기적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면 기적을 맛보게 하시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보십시요. 그래도 내 백성이 내게 나아와 기도해야 할 것이니라. 시온의 회복을 이루는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 
여기 “그래도”의 신비를 아시겠습니까? 3년6개월동안 배가 내리지 않던 땅에 비를 주시겠다고 약속했지만 엘리야는 무릎이 닳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러분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사회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는 공동체를 향한 이 민족을 향한 각 가정을 향한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이 이루시겠다고 하는 음성, 약속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시온이 회복되고 있지 않는 것입니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정안에, 목장안에, 교회안에, 역사 한가운데 펼쳐져가게 될 것입니다. 시온의 회복은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이루어 진다.”

이제 기도에 대한 놀라운 정의가 가능해 졌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쳐가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여기 겟세마네 기도의 절정은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나의 뜻이 하늘로부터 꼭 이루어지게 하소서”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그의 고전적 명저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악인은 세상을 즐기고 싶어 하나님을 이용하려 든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하나님을 즐기기 위해 세상을 선하게 사용한다.”

우리의 기도의 목적은 내 안에서 혹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사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자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연약하고 한없이 모자라는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남북전쟁때 아브라함 링컨은 남군의 명장 리장군의 전략에 대단히 곤혹을 치루곤 했습니다. 이때 교회지도자들이 모여 아브라함 링컨과 북군을 위해 기도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한분이 “이럴 때 하나님이 확실히 우리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이 말에-
“목사님,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우리가 하나님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지요. 목사님보다 대통령이 더 훌륭한 신학자였던 게지요.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내 편이 되고 내 뜻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동부이촌동 충신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어린나이에 마포에 있는 한교회에서 저를 초청해 주었습니다. 담임목사로 그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제가 섬기던 목사님께서 
불혹의 나이가 되기 전에 평생 섬길 교회를 찾아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크게 일하는 기회를 가지라고 충고해 주셨습니다.
그 처녀 목회지에서 생명걸고 목회를 하는 가운데 어느덧 내 나이 30대 후반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어디로 갈까요? 기도하는 가운데 
그당시 우리교단 가운데 서울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팀사역의 일원으로 일해줄 것을 초청해 주었습니다. 포항에 있는 가장 큰교회 가운데 한 교회가 저를 담임목사로 초대하는 논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제게 제3의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척에 대한 길을 자꾸 감동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가고 싶은 곳은 포항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곳이 아니면 서울에 있는 큰교회 팀사역을 하고 싶습니다. 점점 더 내 확신이 깊어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쉽게 순종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불안해져 왔습니다.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환경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가진 것이 없습니다. 예배드릴 곳도 없습니다. 사람도 없습니다. 100일, 40일동안 두 차례에 걸쳐 진지하게 기도하는 사이에 점점 더 상황이 어려워져만 갔습니다.
섬기던 교인들 사이에 우리 목사님 다른 교회 간데. 우리목사님 우리교회 떠난데. 떠난다메~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에는 제가 갈 수가 없다고 제가 응답을 한 다음이었습니다. 포항에서 초청하기로 했던 교회는 점점 시간을 끌고 있었습니다. 제가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쫓겨나듯 3M교회로 맨손, 맨몸, 맨땅으로 시작된 교회가 한소망교회입니다. 

VI. 기도 비상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믿기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기에 적당히 기도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의 기도를 통해 당신의 큰 뜻을 이루시겠답니다. 
비상한 축복을 위해서는 비상한 기도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지금 처절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조금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시며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유대인들은 종종 기도할 때에 서서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에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고 영광스런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은 일어서서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곤 했습니다. 감사할 때에 찬양할 때에 삶이 평범하게 잘 펼쳐져 갈 때 우리는 그렇게 품위를 지키며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멋지게 폼을 갖추어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몸부림하며 절규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1절에 보면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자리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여겨져서 43절에 보면 “천사를 보내 기도를 도왔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44절에 보면 얼마나 처절하게 매달려 하나님앞에 몸부림하며 기도했던지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어서 뚝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는 이 말은 막연한 과장법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극한의 고통과 아픔 속에서는 정말 땀이 붉은 피가 되어 흐른다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나라를 위해, 한국교회를 위해, 나 자신과 가정을 위해, 우리 인생에서 생명을 거는 기도, 땀이 피가 되는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다고 하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핏방울이 땀방울이 되도록 절규하며 비명이라도 질러야 되는 때가 아닐런지요? 한국교회가 한계가 없는 부흥을 보길 원한다면 비상한 기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민족을 살려 주소서. 
한국교회에 부흥을 주소서. 몸부림해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비범한 상황은 비범한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필사적인 기도를 역사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말고 문득 짓궂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토록 처절하게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먼 훗날 시간이 흐른 다음에 성경을 기록하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기도의 장면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잠들어 있던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보았을까요? 잠들어 있던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기도를 이토록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소리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몸부림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잠속에서 언듯언듯 예수님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이 잔을 내가 마시지 않고 다른 길이 없겠습니까? “하오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잠속에서도 예수님의 절규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저들은 성경을 기록할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절규하던 예수님의 기도소리를 똑똑하게 전해줄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분이 있다고 하면 바로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기도하셨습니다. 매달려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이 아버지께 기도하셨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기도가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잠들면 민족이 잠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민족이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가정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한국교회 – 이대로 주저앉지 않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죤 웰슬리의 기도문을 읽고 말씀을 맺습니다.
(웨슬리가 1775년 리쳐드 얼레인 Richard Alleine이라는 사람의 글을 인용한 기도문)

나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며 당신의 것입니다.
나를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 두시며,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과 있게 하소서.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의 모든 삶이 당신의 손안에 있게 하소서. 
고용되고 실직하는 것,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이 모두 당신을 위한 일이 되게 하소서.
배부르거나 굶주리는 것도 당신을 위한 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소유하게 하시고 당신을 위해 내 모든 소유가 쓰임받게 하소서.
나는 이 모든 것을 당신의 기뻐하심과 처분에 기꺼이 맞깁니다. 
오 영화롭고 거룩한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님이시여,
이제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 웨슬리의 기도처럼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네게 맡긴 나의 뜻을 잘 이루고 내게 돌아왔구나. 
잘하였도다. 나의 아들아!”

하나님 아버지의 칭찬을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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