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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손으로 일, 한 손에는 병기 (느 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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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으로 일, 한 손에는 병기 (느 4:1-23)


'참된 용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냥 '용기'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사물을 겁내지 않는 씩씩한 기개' 정도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용기'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되겠지만 '참된 용기'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데에는 좀 부족합니다. 
'참된 용기'를 정의해 보자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상황이 불리할 때에 해내는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길가에 서 있다가 지금 저쪽에서 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데 갑자기 차도에 뛰어들어 그 차 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서 건너편으로 갔다고 합시다.
그것을 두고 '참된 용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아닐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사물을 겁내지 않는 기개'에는 해당될지 몰라도, 실상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일 뿐인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차도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주변에 아직 아무 차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다가가서 "얘들아, 여기서 놀면 위험하다."라고 경고해 주면서 그들을 인도로 이끌어 낸다면, 그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용기 있는 행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상황이 조금도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막 커다란 트럭이 맹렬한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을 때에 차도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서 그들을 인도 쪽으로 밀어낸 후에 자신도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왔다면, 그것은 누가 보아도 '참된 용기'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상황이 불리할 때'에 해내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바로 그런 '참된 용기'가 꼭 필요한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느헤미야가 바로 그런 용기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하여 제3차로 고국 유다에 돌아온 총독 느헤미야는 아직까지 폐허로 남아 있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백성들을 독려하여 일단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공사를 시작하자마자 안팎으로 온갖 반대와 방해공작을 받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로 '참된 용기'를 발휘하면서 끝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완수하고야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교육관 헌관을 내년 3월까지 완수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일사불란하게 나아가고 있는 경향의 청지기들이 헌신예배를 드리는 이 밤에, 진정한 신앙인들이 발휘해야 할 '참된 용기'가 과연 무엇인지를 이 느헤미야의 모범을 통해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용기 있는 신자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더욱 '간절한 기도'를 올림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 기록하기를 "1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2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3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자 사마리아의 지도자 "산발랏" 같은 느헤미야의 대적들이 즉각 반응을 보였는데, 그 첫 단계가 조롱이었습니다. 
1절에서 그가 "크게 분노한" 이유는 만약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고 나면 사마리아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입지가 약해지는 까닭이었습니다. 

그의 조롱은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말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서 느헤미야와 유다인들은 그런 대공사를 해낼 만한 능력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라는 말은 번역이 좀 애매하게 되어 있는데, 원래는 '그들이 정말로 성벽을 재건해 낼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는 소리이지.'라는 의미입니다. 
"제사를 드리려는가?"라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라도 드려서 눈 깜짝할 사이에 지어지게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비꼬는 말이며, "하루에 필역하려는가"라는 말은 바로 '그 공사를 완수하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알기나 하는가?'라는 조소입니다. 
  
이어서 "소화된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라고 했는데, 이것은 당시 예루살렘 성벽을 이루고 있던 돌들은 주로 석회암이었기 때문에 일단 불에 타면 다시 재활용하기 어려운 재료인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바꾸어 표현하자면 '성벽 재건에 소용될 엄청난 자재는 도대체 어떻게 구하겠다는 뜻이냐?'라고 비꼬는 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조소였는데, 거기에다 산발랏과 같은 통속이었던 도비야 역시 한몫 거들었습니다.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고 했는데, 이 말은 '설사 성벽을 재건한다 하더라도 부실공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따라서 얼마 못 지나서 폭삭 무너지고 말 것이다.'라는 실로 악의에 찬 조롱이었습니다. 

이런 대적들의 비난은 오늘날 역시 교회를 중심으로 충성을 다하는 목사나 성도일수록 여지없이 듣게 되는 말입니다. 
"당신이 정말 개척교회를 해 낼 수 있을 것 같소?", "우리 교회가 지금 성전건축을 하려고 하는데 장로님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나 계십니까?", "우리 목사님은 무슨 뾰족한 수나 신통한 도깨비 방망이라도 있어서 이런 엄청난 사업을 하필이면 이처럼 어려울 때 하려는 것일까?"라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을 낙심시키려 하는 사단의 조소가 사방에서 들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경향교회 역시 그런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열심을 내어 따라왔을지 모르지만 그게 얼마나 더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교인들을 그렇게 많은 교회봉사에 섬기도록 다그치고 그렇게 많은 종류의 헌금을 하라고 하면 얼마 안 가서 있던 교인들 다 놓치게 될 걸요."라는 소리들로부터 시작해서, 이 강서성전을 지을 때에는 "경향교회는 몇 년 안에 반드시 망한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비난과 조롱을 받게 될 때 우리 신앙인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바로 이어지는 4절과 5절에 기록하기를 "4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그런 악한 조롱을 다발로 퍼부어 왔을 때 느헤미야는 아무 대꾸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고 우선 하나님께 기도부터 드렸습니다. 
그 기도 내용은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라는 탄원이었습니다. 
그는 그저 솔직하게 자기가 느끼는 그대로, 현재 당하고 있는 그대로, 억울하고도 괴로운 심정을 그대로 하나님께 털어놓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도의 끝에 가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라고 고발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네들이 하고 있는 일이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방해하고 조롱하는 대적들은 바로 하나님께 직접 덤벼드는 일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스스로 다 받게 될 것이 분명함을 알고서, 그런 대적들을 처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모두 맡겼던 것이었습니다. 

원수의 조롱에 대하여 이 얼마나 고고한 자세이며 또한 통쾌한 응수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경향교회가 나아가는 길을 비웃고 경향의 성도들이 '평화시대에 순교하는 각오'로써 바치는 충성에 대하여 오히려 조롱하는 말을 들을 때에, 그런 '하찮은 소리'에 맞대응해서 말싸움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 우리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면 하나님께서 욕을 당하시는 것이니 당신께서 알아서 처리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실제로 경향의 성도들은 헌당을 위하여 바로 그런 기도를 무려 20년 동안이나 드려왔습니다. 
제일 처음 1994년부터 성전건축을 위하여 장로님들이 모여 기도회를 시작했고, 그 이후로도 헌당기도회, 교육관 건축 기도회로 이어지다가, 지난 2010년부터 '청지기 기도회'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기도 소리가 '경향교회는 안 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던 모든 원수들의 조롱을 잠재웠습니다. 
  
모든 상황이 불리할 때일수록 더욱 열심히 모여 올렸던 그 기도 때문에 우리 교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낙심과 불평의 소리들이 원천봉쇄되었습니다. 
매주일 오후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탄원했던 그 기도를 인하여 경향의 장로님들과 성도들은 하늘로서 내려오는 새 힘을 얻고 칠전팔기하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게만 보여도 그럴 때일수록 더욱 간절히 하나님께만 매달리며 기도할 줄 아는 용기를 끝까지 발휘하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용기 있는 신자는 악화일로의 상황일수록 오히려 '헌신의 극한'까지 밀어붙임으로써 끝내 그것을 극복해 냅니다. 

6절부터 12절의 말씀에 "6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7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8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9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10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11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12그 대적의 근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고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라고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 시련이 닥쳤을 때에 느헤미야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림으로써 "백성"들 역시 "마음 들여 역사"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는 착착 진행되어 이제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성벽의 기초작업은 성벽 전체를 한 바퀴 돌면서 완전히 연결되었으며, 그 성벽의 높이도 '절반' 정도까지 도달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대적들의 방해공작은 더욱 치열하고 악랄해졌습니다. 
그냥 비웃고 조롱하는 '선동'만 가지고서는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는 소식만 들리게 되니까 그들은 더욱 분기탱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아예 "예루살렘을 요란케 할" 계획, 즉 '물리적' 방법을 동원해서 성벽 재건공사를 방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9절에 기록된 대로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또한 "저희들 인하여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 구체적인 대책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원수들의 조롱과 위협이 끈질기게 계속되자 이제는 유다 백성들 가운데서 갈등이 생기면서 낙심하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10절에서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담부'란 '짐을 등에 지고 어깨에 메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지금까지 공사에 참여하고 있던 유다인들 중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죽도록 공사를 했는데도 아직도 퍼 날라야 할 흙무더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일꾼들은 다들 녹초가 되었으니, 이 일은 절대로 끝낼 수 없는 일이다."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유다인 내부에서 낙심과 불만의 기운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을 감지한 대적들은 더욱 그것을 부채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지는 11절에 나와 있는 대로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육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고 막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7절에 나와 있는 대적들은 '사마리아, 아라비아, 암몬, 아스돗'의 정치 지도자들인데, 이 지역들은 예루살렘을 문자 그대로 동서남북으로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아무 예고나 선전포고도 없이 그냥 기습적으로 예루살렘을 사방으로부터 공격해 와서 한순간에 싹쓸이를 해 버리겠다는 위협을 가함으로써 공사에 참여하고 있던 유다인들로 하여금 더욱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12절에 보면 "그 대적의 근처에 사는 유다 사람들"까지도 그런 불온한 움직임에 오히려 가세했습니다.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고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즉 사마리아, 아라비아, 암몬, 아스돗의 접경 지역에 살고 있던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성벽 재건공사에 참여하고 있던 유다인들을 일부러 찾아와서 온갖 루머를 퍼뜨렸습니다. 
"이 사람아, 북쪽 사마리아에서 산발랏이 하는 말을 들었나? 이제 곧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온다고 했다네.", "동쪽의 암몬 사람들은 어떻고? 그네들도 지금 기회만 노리고 있다네.",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하던데.", "아니, 듣자하니 이번에는 서쪽 아스돗 사람들까지 합세했다고 하더군." "그러니 자네들, 여기서 성벽 재건공사를 계속하다가는 큰일 날 걸세. 하루바삐 집어치우고 우리 사는 곳으로 피신하는 게 상책이야."라는 말들을 무려 '열 번'이나 고해 왔던 것이었습니다. 

소문을 '열 번'이나 반복해서 듣게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처음에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가도 똑같은 말을 열 번이나 듣게 되면 웬만한 사람은 다 그 말을 믿게 됩니다. 
실로 느헤미야는 문자 그대로 사면초가에 빠졌던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경우가 생깁니다. 
원수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비난해도 처음에는 기도만 가지고서도 잘 이겨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의 세력이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지독한 방법으로 방해공작을 펼쳐올 때면 자칫 꺾이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왜 이런 시험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일까?", "지금까지 정말 일사각오로 헌신 봉사해 왔는데도 왜 오히려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만 할까?"라는 약한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그런 낙심이 찾아오게 되면 그것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목사님, 우리 교인들이 지금까지 죽도록 충성했지만 아직도 까맣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해 놓은 것보다 앞으로 남아 있는 일이 훨씬 더 만리장성입니다. 
교인들도 다들 지쳐 있는데 도무지 안 될 일을 두고 고집부리지 말고 이쯤에서라도 그만 둡시다.", "아니, 지금까지 생애 최고의 헌금도 바쳤고 생애 전부의 헌금까지 드렸는데 또 '보리떡 헌금'이라는 것을 하라고요? 아이고, 나는 지쳤습니다. 
이제 그만 할랍니다. "라는 소리들이 점점 더 번지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가 경향교회의 장로가 된다는 것은 고생문이 훤한 일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지요. 계속 경향교회에 남아 있다가는 진짜 큰 낭패를 당할 겁니다. 
" - 이런 말을 '열 번'이나 반복해서 듣게 되면 그 누구라도 흔들리게 되기 십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때야말로 하나님의 충성된 청지기들이 '참된 용기'를 보여 주어야 할 순간입니다. 
외부로부터의 방해 세력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덩달아 내부에서도 낙심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할 때, 실로 모든 상황이 오로지 악화일로로만 치닫고 있는 것처럼 보는 바로 그 때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진짜 신앙인의 용기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발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그런 최악의 상황을 과연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13절 이하 23절에 "13내가 성 뒤 낮고 넓은 곳에 백성으로 그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게 하고 14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15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16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17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18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19내가 귀인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역사는 크고 넓으므로 우리가 성에서 나뉘어 상거가 먼즉 20너희가 무론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21우리가 이같이 역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었으며 22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하고 23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일단 모든 백성들을 "성 뒤 낮고 넓은 곳"에 "그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게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완전군장'을 갖추게 하고 '집합'을 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고 훈시를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나중에 20절에서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고 같은 내용으로 백성들을 독려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 사이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격려는 없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더욱 경외하자. 그러면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사기진작책입니다. 
'경향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40년 동안이나 계속 동행해 주신 광야교회이다. 그러니 그 변함없으신 하나님께서 경향의 미래 역시 반드시 현재보다 천배로 축복해 주실 것이다' - 우리 경향인들은 이런 말씀만 들어도 그야말로 용기백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유다 백성들을 일단 정신적으로 재무장시켜 놓은 후에 느헤미야가 곧 이어서 구체적으로 취한 조치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유다 백성들을 오히려 더욱 다그치면서 헌신의 극한대까지 몰고 간 것이었습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라고 했는데 이것은 느헤미야가 14절 이전까지에 기록된 즉각적인 대응조치를 취한 시점에서 이미 대적들의 기습 시도가 꺾여 버렸음을 가리킵니다. 
즉 그 대적들은 원래 유다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예루살렘을 공격해 올 계획이었지만 그 전술이 완전히 노출되어 버렸고 또한 느헤미야가 유다 백성들을 집합시켜 놓고 정신무장까지 단단히 시켜 놓은 이 시점에 와서는 그것이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느헤미야는 조금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15절 하반절 이하에 보면 이제 유다인들이 다시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를" 시작했을 때, 느헤미야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근무들을 모든 백성들에게 부과했습니다. 
그는 우선 "그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지고" 있게 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직속부하들 중에 반은 성벽 공사에 참여하게 하고 나머지 반은 적의 기습에 대비하는 '경계근무'를 서게 했다는 뜻입니다. 
16절 하반절에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라는 말도 같은 의미로서, 백성들이 성벽 공사를 하고 있을 때 민장들이 그 후미에 진을 치고 서서 적의 공격에 대비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 즉 직접 성벽 재건 공사의 현장에 있던 기술자들과 그들에게 돌과 흙을 날라 주던 인부들 모두로 하여금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게" 했습니다. 
즉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병사들뿐 아니라 모든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다 자신의 개인 무기를 늘 소지하고 다니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칼을 차고" "창을" 휴대한 상태에서 "건축" 공사를 한다는 것은 훨씬 거추장스럽고 힘들었을 것이 틀림없지만, 느헤미야는 그런 식으로 모든 백성들을 일종의 '직장 예비군'처럼 편성한 후에 "나팔 부는 자"를 항상 자기 곁에 서 있게 했습니다. 
즉 유사시에 나팔신호만 들리면 공사에 참여하고 있던 모든 백성들이 즉각 적군의 공격을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제부터는 작업 시간까지 늘였습니다. 
21절에 기록된 대로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공사를 진행하게 했던 것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해가 있는 동안만 일하는 것이 관습이었지만, 느헤미야는 이제 하늘에 조금이라도 빛이 있을 동안에는 내내 작업을 하게 했고 그것도 임전태세까지 완전히 갖춘 상태에서 수행하게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들을 그야말로 들들 볶듯이 몰아붙이고 있었는데, 그 정도로도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22절에 보면 백성들의 외출까지 제한을 시켰습니다.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유사시에 대비하여 밤중에도 항상 일정한 수비 병력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동시에, 백성들이 성밖으로 나갔다가 나쁜 소문을 듣고 낙심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나쁜 소식, 부정적인 말은 아예 듣지 않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교인들 사이에서도 교회에 대하여, 혹은 교회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말은 제게 아예 하지 마십시오."라고 사전에 막아 버리는 것이 최상책인 것입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원수들의 방해공작이 치열해지고 내부적으로도 불안한 기운이 퍼져나가려 할 때에 사용했던 고육지책이었습니다. 
23절에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느니라"고 한 대로, 느헤미야 자신부터 솔선수범을 보이면서 모든 유다 백성들을 헌신의 극한에까지 밀어붙였습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을 때에 느헤미야는 "그래, 아직 남아 있는 일은 태산 같고 백성들도 많이 지쳐 있으니 좀 계획을 여유 있게 늦추고 천천히 공사를 마무리해 나가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손으로는 일'을 하고 '다른 한 손에는 병기'를 잡은 상태에서 죽어라고 공사에 박차를 가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상황이 불리할 때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 내는' 참된 용기의 진면모가 아니었겠습니까?

유능한 지휘관은 전시 상황에서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결코 놀려 두는 법이 없습니다. 
전투가 없을 때에도 병사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개인화기를 정비하게 하거나 참호를 파게 합니다. 
왜냐하면, 병사들을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게 하면 오히려 고향과 가족 생각만 하게 되고 닥쳐올 전투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게 되면서 결국 부대 전체의 사기가 떨어지고 긴장이 풀리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현명한 지휘관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투하는 지상교회'에서도 똑같습니다.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교회는 반드시 시험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바쁘지 않고 작정한 헌금을 기한 내에 바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서 엿새 동안에 더욱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 교인들이 그 '영적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게 되겠습니까? 자연히 교인들 사이에 떠도는 루머들에나 신경을 쓰게 되고, 다른 교인들이 자기를 얼마나 인정해 주고 받들어 주고 있는지 이런 것에만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아주 '심각한 시험'이 되어 버리고 결국은 교회 전체가 흔들리거나 쪼개어지기까지 하는 '시험의 폭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적당히 예수 믿고 그저 구원이나 받으면 되지.'라는 무사안일에 빠져 있는 교회야말로 원수 마귀의 좋은 '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확실히 영접하고 나서 '이제부터 내 몸은 그리스도께 완전히 바친 몸'이라고 헌신을 작정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와 교회는 마귀가 '건드릴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집적거릴 엄두'조차 못 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는 늘 영적 긴장 상태와 영적 임전태세가 확실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경향교회가 지난 40년 동안 온갖 시험과 위기를 통과해 왔으면서도 끄떡없이 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IMF'의 위기가 닥쳤을 때에 성전건축을 취소하거나 연기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습니다. 
헌당은 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전히 '헌당승계헌금'을 다 갚지 못한 상태에서 회관과 교육관을 얻을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도 우리 경향의 장로님들과 성도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파수하는' 각오로 이 대역사를 계속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지금도 경향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저도 마찬가지기입니다만, 작정해 놓은 교육관 헌금을 매달 바치기에도 힘에 부치는 상황에서 이제는 '보리떡 헌금 운동'까지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죽도록 충성'하는 헌신의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이런 교회가 하늘 아래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이것이야말로 경향교회가 진정 정예전투교회이며 경향인들이 진정 용기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임을 백일하에 보여 주는 증거라고 확신합니다. 
국내 경기는 여전히 좋지 않고 아직 남아 있는 '흙무더기'는 많고 '담부하는 자'마저 지쳐 있는 등 모든 것이 악화일로처럼 보일지라도, 그럴 때일수록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격려하면서 각자 '한 손으로 일'하고 '한 손으로 병기'를 잡는 가운데 더욱 지사충성함으로써 이제 이미 '성곽이 다 연결되고 고가 절반 이상 도달한' 경향의 '성벽 재건공사'를 완전히 끝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의 인생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치는가?'에 의해서는 20퍼센트의 영향을 받지만 '그 닥치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의해서 나머지 80퍼센트가 결정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 새겨 볼 만한 말입니다. 

교회와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갈 때에 반드시 '좋은 징조'와 함께 '나쁜 현상'도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나쁜 일이 때로는 사면초가와 같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때도 있습니다. 
방해 세력은 점점 더 많아지고 날이 갈수록 더 악한 방법을 총동원해 오고, 반면에 우리 내부에서조차 흔들리고 지칠 때도 분명히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20퍼센트'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와중에서도 과연 '참된 용기'를 발휘해 낼 수 있느냐 하는 여부에 나머지 '80퍼센트'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진정 '용기 있는 그리스도의 일꾼'답게 주위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수록 더욱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도는 태산조차 옮길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실로 기도는 모든 원수들의 비난을 무색하게 만들고 모든 불신앙적인 소리들을 원천적으로 막아 버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소리'인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일은 풀리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고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럴 때일수록 더욱 '칼과 창과 활'까지 들고서 '동이 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죽도록 충성하는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쟁을 대비하지 않고 있는 나라는 적의 침략을 당하기 십상이지만 전쟁을 각오하고 있는 나라만이 진정 평화를 유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꼭 마찬가지로 그저 놀기를 좋아하고 쉬고만 있는 교회는 마귀의 밥이 될 뿐이지만 '한 손으로 일'을 하고 '한 손에는 병기'까지 잡고 있는 교회와 성도는 절대로 쓰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용기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또한 최후승리까지 거둘 수 있습니다. 
혼자 살려고 하는 비겁한 자나 겁쟁이야말로 전쟁터에서 제일 먼저 죽게 되는 것은 이 '전투하는 지상교회' 안에서도 꼭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40년 동안이나 승승장구해 온 이 '세계를 받은 교회'를 통하여 앞으로도 그 어떤 시험이나 환난을 당해도 오직 함께 '간절히 기도'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현재보다 오히려 천배나 축복해 주실 경향의 미래 또한 반드시 함께 누리는 경향의 모든 청지기들과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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