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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완전한 죽음 (요 19: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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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죽음 (요 19:31-37)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 19:31-37) 


완전한 죽음의 확인 

오늘은 죽음을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 죽음의 확인 작업입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31-34)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지 6시간여가 지나서 오후 3시가 되자,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시신을 해지기 전에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사형수의 시신을 밤중까지 놔두는 것은 율법이 금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21:23) 

본문 31절에 보면 그날은 준비일 이었습니다. 준비일이란 안식일 전날로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그 전날에 여러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요리를 준비합니다. 가족끼리의 친교를 준비합니다. 회당에 갈 의복을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되면 음식 장만하고 신체를 움직이는 최소한의 일 외에는 일체의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분위기는 매우 축제적입니다.  그날에는 오직 생명 되는 일과, 즐거운 일과, 거룩하고 의로운 일만 합니다. 죽음과 관련된 일이나 부정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시신을 놔두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더구나 유월절이 시작되는 안식일은 “큰 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시신을 안식일 전날에 처리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했습니다.

빌라도의 입장에서 보면 시신을 오래 놔두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사람들은 관례상 죄수를 처형하여 놔둠으로써 경고의 역할을 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시신 처리를 허락했습니다. 군병들은 매달린 사람들의 죽음을 하나하나 확인했습니다. 예수님 곁에 매달린 죄수들은 그 때까지 숨을 거두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병들은 그들의 다리를 쳐서 부러뜨렸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다리의 뼈가 상체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리뼈를 부러뜨리면 심장이 압박을 받거나, 전신에 충격을 받아 빨리 죽을 수 있었습니다. 

군병들은 몽치나 몽둥이로 좌우편 죄수들의 다리를 쳐서 부러뜨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와서 보니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쳤는데, 그래도 미심쩍어서 그랬는지 한 사람의 군병이 예수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아마 심장을 겨냥했을 겁니다. 예수님 옆구리에서는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의 심장을 찌른다면, 물은 절대로 나오지 않고 피만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찌르면 물과 피가 나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죽음은 완전히 확인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님 죽음에 대한 확인의 의미입니다. 

본문 35절은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35) 

요한은 예수님 죽음의 생생한 목격자요 증인이요 기록자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예수님)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그는 예수님이 창에 찔려서 물과 피가 쏟아지는 것을 생생히 봤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성경의 예언이 정확히 성취되고 있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는 군병들이 죄수의 다리를 쳐서 부러뜨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뼈는 안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초반에서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기록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36) 예수님은 레위 제사의 어린양이요 유월절의 어린양입니다. 유월절 규례에 보면 어린 양을 잡아서 먹을 때에 뼈는 절대로 꺾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뼈도 꺾지 말지며..”(출12:46)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민9:11-12)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34:20) 그 때는 왜 뼈를 꺾지 말라고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주님의 뼈가 꺾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 예언이 십자가에서 성취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한은 또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또 깨달았습니다. 바로 그 장면까지도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12:10) 

요한은 예수님 죽음의 목격자입니다. 요한이 목격한 주님의 죽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영적으로는 아버지께 버림받으셨으며, 육신적으로는 십자가에서 기력이 소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이 왜 중요한 것일까요? 두 가지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대속 제물로써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죽으셔야만 되었던 것은 대속 제물로써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제물은 완전히 죽어야만 됩니다. 완전히 죽지 않은 제물은 절대로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 물과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이 물과 피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물과 피야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의 물과 피는 예수님의 생명을 나타내며, 속죄의 완전한 희생임을 나타냅니다.
  
우선 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구약에 나타난 피의 역사를 보세요. 구약의 모든 제사는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는 의식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번제(레1:5,11,15), 속죄제(4:5-7,16-18,25,30), 속건제(7:2), 화목제(3:2,8,13,7:14). 

모든 제사에서 피뿌림 의식이 거행됩니다. 유월절 의식도 역시 피흘림이 중심이 됩니다. 과거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집마다 어린 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그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와 문 인방에 발랐습니다. 그 피가 죽음을 모면하는 결정적 표식이 됐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죽음을 면하는 속죄의 피가 된 것입니다. 신약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19-22) 

피는 생명을 뜻합니다. 피 흘림은 곧 속죄의 수단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날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유월절 만찬 순서에는 포도주 잔을 함께 나누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포도주 잔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유월절 잔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였습니다. 보통 피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씻는 속죄의 피였습니다.
  
그 다음은 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물도 역시 속죄의 상징적 수단입니다. 구약 제사에는 물로 씻는 절차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제사장을 세울 때도 먼저 물로 씻는 절차가 있었습니다.(레8:6) 제사장들은 제사를 집행할 때에 수시로 물두멍에 손과 발을 씻었습니다.(출30:17-21,38:8) 물에 씻는 의식은 일반 백성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히9:19-) 

회중에게 물을 뿌림으로써 성결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았을 때 피 뿌림 의식과 더불어 물에 씻는 절차를 밟았습니다.(레14:8)  에스겔은 장차 받을 이스라엘의 성결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겔35:24-25)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신약에 와서 물로 씻는 의식은 세례 의식으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물은 인간에게 유일한 속죄의 수단입니다. 다른 피나 물은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침례교와 장로교인들은 물에 잠겼느냐 물을 뿌렸느냐를 가지고 논쟁합니다만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 물을 뿌리면 어떻고 한강 물에 풍덩 들어가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 물이 우리 죄를 씻는 게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와 그 물만이 우리 죄를 씻어줍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4,9-10) 

구약 시대에 드리던 양이나 송아지의 피는 진정 사람의 죄를 씻지는 못했습니다. 만일 그런 제물들이 인간의 죄를 완전히 씻길 수 있었다면 그런 제사를 해마다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구약의 제사는 오히려 인간의 죄가 그런 의식으로는 씻어지지 못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구약 제사는 장차 오는 좋은 일의 예표요 그림자일 뿐입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이란 바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요, 참 형상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와 물만이 완전한 속죄의 수단입니다.  
  
로마 군병의 창에 찔려서 흘러나온 물과 피를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바로 오늘 내 죄를 씻는 유일의 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와 물을 통해서 속죄 받으시기바랍니다.  

주님의 피와 물은 어떤 죄라도 다 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악한이라도 다 하나님 자녀로 인정받을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불행은 죄에서 옵니다.  주님의 속죄를 받을 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 피와 물 때문에 누구라도 하늘의 축복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그 피와 물을 통해서 온전히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혼, 육체, 삶이 회생되고, 회복되고, 건강해 지세요. 그 피와 물을 통해서 세상 죄를 이기시고, 거룩한 삶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자아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은 대속 제물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즉, 자아의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자아가 죽는 곳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자아의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아가 죽는 것은 불교가 말하는 무아지경과는 다릅니다. 무아지경이란 자아 소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은 자아의 상실이나, 沒我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자아가 분명한 종교입니다. 나는 모든 행동의 결정자요 책임자입니다. 하나님은 내 인격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상대하시고, 명령하시고, 모든 책임을 묻습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죽는다는 것은 자의식 상실이나, 무아지경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아가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유보한다는 뜻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권리를 최대한 행사할 줄 알아야 똑똑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찾아 먹을 것 다 찾아 먹고, 행세할 것은 다 행세해야 합니다. 내가 일한 것 이상으로 대가를 받아야 현명합니다. 내가 가진 지위 이상으로 세도를 부려야 알아줍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권리만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야합니다. 주님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권리를 다 행사하셨더라면 어떠했을까요?  호화로운 거처에서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시면서 모든 사람들을 제압하시고 넘치도록 풍족한 삶을 사셨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특권을 다 포기하셨습니다. 마굿간에 나시고, 목수일을 하시고, 아무데서나 이슬을 맞으며 주무시고, 십리든 백리든 걸어 다니시고, 배고파하시고, 인간적 아픔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자아가 죽는 것은 바로 그런 우리의 모든 권리를 유보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아가 죽고, 자기 권리를 유보하는 것을 불행으로 여깁니다. 자아가 죽으면 멸시 받고 손해만 보는 줄 알아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는 것은 천국 시민으로 사는 비결입니다. 자아가 죽을 때 정말 행복해집니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모든 것을 빼앗기지만, 자아가 죽으면 여러 가지 유익이 따라 옵니다.
  
첫째로, 내가 죽으면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돌아갑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언제 내가 남편과 혹은 아내와 싸웠는지? 언제 내가 직장 동료들과 갈등을 빚었는지? 언제 낙심하고 좌절했는지? 언제 삶에 불만을 품고 불행을 느꼈는지? 모두가 다 자아가 죽지 않았을 때 일어난 일들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불행해집니다. 벤담이 말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경제 원리가 어디서 나오는 줄 아세요? 바로 자아가 죽을 때 생깁니다. 자아가 죽어 보세요. 싸움이 사라집니다. 원망이 사라집니다. 자아가 죽어 보세요.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교회가 화목해집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원만해 집니다. 자아의 죽음은 만인 행복의 비결입니다.
  
둘째로, 자아가 죽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날마다 뻔뻔스럽게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그러나 내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 뜻을 이루기도 바쁜데 어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새가 있습니까?  자아가 죽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들이 자아가 죽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 일을 하면서도 자기 고집이나 부리고, 남과 자기를 비교하느라고 일도 못할 겁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성가대로 남과 화음을 맞추지도 못합니다. 

교사로서 어린 영혼들을 살필 수도 없습니다. 비천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돕거나,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는 사람들은 전도도 못합니다.  자존심만 세우느라고 어느 세월에 남에게 숙이고 들어가서 전도하겠습니까? 자아가 죽지 않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에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합니다. 자기 잘난 척 만 하는데 누가 거들떠보겠습니까?  
  
예수님을 보세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내가 하늘로써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39)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42) 

예수님은 자아가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요6:39-40) 

자아가 죽을 때 가난한 자들과 어울리셨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자아가 죽을 때 세리 마태의 집에도 들어가시고 나병환자들을 만지셨습니다. 자아가 죽을 때 매도 맞고 침 뱉음도 견디셨습니다.  자아가 죽을 때 죽음도 기꺼이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셋째로, 자아가 죽고, 내 권리를 유보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책임져 주십니다. 이 내용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주님을 믿으므로 자아가 죽는 자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세요. 예수님은 낮아질 대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예수님을 높아질 수 있는데 까지 높이셨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힘으로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키지 못합니다. 만일 내가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권리를 보장해 주십니다. 

요셉을 보세요. 형제에게 버림받았지만 형제들을 고발하지 않았어요. 나중에라도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했다고 억울해하지 않았습니다.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다고 탄원서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모든 권리를 천 다 되찾아 주셨습니다. 다윗은 여덟 형제 중 가장 무시당했습니다. 아버지 이새도 다윗을 큰 인물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니까 왕으로 선택받았어요. 바로 이것이 자아가 죽는 자의 축복입니다. 여러분! 내 권리를 포기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겁니다.
  
그러면 자아를 죽이는 비결이 있나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를 함께 못 박으세요. 예수님과 함께 믿기 전의 내 옛 사람이 제물로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는 방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볼까요? 예수님과 함께 구약 시대 번제단에 바쳐졌던 제물처럼 되세요. 제단에 바쳐진 제물은 제물로 선택된 순간부터 자신의 모든 권리를 상실합니다.  바치는 사람이 제물 위에 손을 얹고 안수합니다.  그 순간부터 제물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하지 않고 바치는 사람만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 제물은 가차 없이 죽임을 당합니다. 생명도 단숨에 내어 놓아야합니다. 그 피가 제단에 뿌려집니다. 자아가 죽는 사람은 그 생명을 남을 위해서 뿌려야합니다. 그리고 나서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제물은 속속들이 파혜쳐 집니다.  자아가 죽는 자는 골수 깊이까지, 마음을 속속들이 찢어서 희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번제단에 올려집니다. 올려진 제물은 제단 뿔에 묶여집니다. 바쳐지는 동안 조금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조용히 바쳐져야 됩니다.  자아가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에 몸부림 쳐서도 안 됩니다. 희생하더라도 조용히 희생해야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에 서서히 타서 재가 되어갑니다. 자신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타서 한 줌의 재가 됩니다. 자아가 죽는 자는 자신의 모든 모습이 다 타서 재가 되어 없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자아가 죽으려면 우리는 번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자아를 죽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전적으로 내 삶을 보장하시고, 나를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이 죽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완전한 대속입니다.  주님이 완전히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는 완전하게 씻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주님의 죽으심에 의지하여 모든 죄를 용서 받아야 합니다. 둘째는 자아의 죽음입니다. 자아가 죽을 때, 남에게 유익하고, 자신에게 유익하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됩니다.  주님의 완전한 죽음을 깨닫고 이 죽음에 다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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