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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양육의 은혜를 감사합시다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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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의 은혜를 감사합시다.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어떤 아이가 자기 방에서 장난감 벽돌을 가지고 이것을 높이 쌓으면서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들어가면서 이 아이의 방에 들어가서 관심을 보이느라고 아이가 하고 있는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무언가 벽돌을 쌓고 있는 아이를 향해서 "너 뭘 하고 있는 거냐?" 하고 물었습니다. 했더니 이 어린아이가 뒤돌아보면서 "쉿! 아빠 조용히 하세요. 지금 교회를 짓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어린것의 손을 잡고 교회에 늘 다니긴 했지만은 교회에 갈 때마다 떠들어서 조용히 하라 그러고 늘 말썽이었는데 이 만큼의 믿음이 생긴 것 같이 생각이 되어서 대견하게 여기고 한 마디 더 물었습니다. 

"애야, 교회에서는 왜 조용히 해야 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에 아이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빠 참! 교회에서는 조용해야지요. 사람들이 다 잠들었으니까요. 떠들면 깨잖아요." 

이 아버지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교회 나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갈 때마다 잤거든요. 졸은 것이 아니라 잤어요. 애가 이걸 보고 있다가 교회는 가서 조용히 자야 되니까 떠들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더랍니다.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이 그의 의무라면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입니다. 
  
성경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자녀를 위한 부모의 합당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암시해 줍니다.
간혹 부모들 가운데는 자녀들에게 좋은 옷 입히고,좋은 음식 먹여주며,좋은 학원 보내주면 부모된 역할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모들일수록 어떻습니까? 자녀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신은 자식을 위해 해줄 만큼 해주였기 매문에 함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떻습니까?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에 좋은 학원을 다닌다고 해서 만족합니까? 그것으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랍니까? 아닙니다.

매일 집안을 어지럽히는 개구쟁이 아들을 둔 엄마가, 어린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자니 그렇고 해서 저녁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스스로 씻고 장난감도 가지런히 정돈하는 착한 어린이의 이야기를 들려줬다합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엄마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한 아들이 말했다합니다. "엄마, 그 애는 엄마도 없대?" 

아이들이 무엇보다도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부모로부터 인격적인 대우와 사랑을 받을 때라고 합니다.
어떤 분이 차를 타고 가는데 애들이 이상한 노래를 하며 너무 시끄럽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주의를 주었습니다. "애들아! 너무 시끄럽다. 이제 그런 소리 내지 마라!"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몇 분 지나니까 아이들이 또 시끄럽게 굴었습니다. 그러자 이분이 벌컥 신경질을 냈습니다. "그만! 너희들 정말 말 안 들을 거야!" 

그처럼 아빠가 신경질을 내니까 아이들이 그만 기가 죽어 집에 돌아올 때까지 한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한 아이는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들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애들을 재워주면서 사과했습니다. "얘들아! 슬펐니! 아빠가 미안하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있으면 남도 생각해야지. 아빠가 조용히 하라고 했으면 아빠 말도 들어야지 또 떠들면 어떡해 해!" 그러자 동생이 말했습니다. "아빠! 저는 아빠가 노래만 하지 말라는 줄 알았어요." 아빠는 애들이 아빠 말에 불순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야단을 쳤는데 아이들은 자기들이 노래를 그쳤으니까 아빠 말에 순종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 사이에 이런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깨닫고 자녀들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그들을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잘 보시기 바랍니다. 부잣집 아이들이라고 해서 항상 건강하고 밝게 자랍니까? 물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부잣집 아이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건강하게 자란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어둡고 비뚤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밝고 건강하게자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먹는 것 사는 곳 입는 것은 변변치 않을지라도 부모로부터 사랑과 관심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살 때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서 항상 우선해서 생각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라도 그 아이를 이유 없이 때리거나 무시하면 그 아이는 반드시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천만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어릴수록 자신을 미워하거나 무시하고 마구 대하는 사람을 더 잘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을 예뻐하면 분명히 안다는 것입니다.
왜 어린이 입양이 가능한지 아십니까? 아이들은 이렇게 조금만 정을 주어도 쉽게 따르기 때문이러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에 민감한 아이를 무시하고,상처를 주고,더 지나쳐 학대해 보십시오. 아이가 제대로 자라겠습니까? 반드시 비뚤게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교육학에서 “문제 있는 부모는 있어도 문제아는 없다”라는 말이 생겼겠습니까?

아이들이 비뚤어지고 잘못되는 이면을 살펴보면 반드시 아이들을 그릇 대하는 부모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공감하시겠습니까? 공감하셔야 합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돼지 잡는 소리가 들리던 날,“왜 돼지를 잡지요?”하고 묻는 어린 맹자의 말에 실없는 농담으로 널 위해서지 라고 했다가 아이가 상처를 입을까 봐 얼른 가서 돼지고기를 사다가 먹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렇듯 부모가 아무리 어린 자녀일지라도 그의 인격이나 생각을 존중해 줄수록 아이는 바르고 훌륭한 인격자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아이에게 무엇을 잘해주었는가를 생각하시지 말고,그 이전에 아이에게 혹시라도 어떤 상처를 준적은 없었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부모 된 자신의 언행으로 아이에게 상처를 주거나 절망감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자녀에게 상처를 입힐 권한이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아이를 무시하거나 마음 아프게 해도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비록 아이가 실수하고 잘못했을지라도 아이를 바로잡는 방식은 가혹한 것이어서는 안되며,아이로 하여금 부모를 사랑하고,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할 줄 믿습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합니다. 어떤 사람이 추운날 예배당 근처에서 떨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자기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이 사람은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이 가엾은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데려왔는데 그 부인은 귀찮고 냄새나고 더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쌀쌀한 눈치로 바라보고 불친절하게 대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데려온 사람은 어른이었는데 이상스럽게 점점 작아지고 줄어지더니 마침내 어린이처럼 작아졌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주인이 민망해서 부인을 잘 설득하여 그 부인이 다시 친절히 그이를 대하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니까 작아졌던 사람이 다시 커져서 아름다와졌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천사였다고 합니다. 천사는 항상 온유한 기분과 사랑이 충만한 하늘에 있던 분이 되어서 그렇게 냉정하고 몰인정한 분위기 가운데서는 줄어들었다가 다시 온유와 사랑의 분위기 가운데 있게 될 때에 다시 크고 아름다워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어린이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주석과 해석이 가능 하겠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신앙으로 교육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가정의 자녀 교육은 신앙이 그 방법 이면서도 목표입니다.

아무리 교양이 있고,아이들을 건실하게 잘 키웠다고 생각해도 이것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님 가정에 아들이 하나 있었다합니다. 그는 머리가 영특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수석이라는 것을 놓쳐 본 적이 없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이 그와 같으면 세상 걱정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결국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최고 명문 대학을 수석 입학하고,수석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사법 시험을 수석 합격하고 검사가 되어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는 그만 낱마다 퍼마신 술이 화근이 되어 급기야 간암에 걸리게 되었고,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

어떻습니까 그래도 그저 공부만 가잘하면 걱정이 없습니까? 만사가 잘되어 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앙으로 살 때만이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세를 통해 확인받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가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방 나라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성경은 그가 나이 사십이 되매 자기 동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궁중에서 잠시 죄악의 낙올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합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의 순간적인 감정에 나온 발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금세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는 끝까지 자기 백성을 애굽 바로의 손에서 구해냈음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백성을 구해 내겠다고 하는 생각이 가슴속 깊이 다짐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히브리인의 학교 교육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습니까? 미안한 말씀이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애굽 궁중에서 자란 아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애굽 궁중에 유모로 들어간 모세의 친모 요게벳의 신앙 교육에서 밖에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을 시킬 때 그 아이는 진정으로 위대한 아이,바른 아이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낀 것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모세 자신입니다. 

보십시오. 그래서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말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후손들에게 가르치되 어려서부터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학교가 아닌 가정에서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쉐마’입니다(신6:4-9).

왜 모세가 이런 유언과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까? 전혀 신앙 교육이 되어 있지 않은 백성들을 데리고 40넌간 광야 목회를 하려니 너무 힘들더라는 것입니다. 결국엔 자신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 하고,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에 못 들어가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피에 맺힌 절규입니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제정 러시아의 명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는 백작이라는 칭호가 내려졌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 가족들로부터 "너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었어."라는 말을 들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합니다. 그 이유는 그 상태로는 자기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중년기로 접어들면서 불행과 죄와 절망 중에 깊이 빠지게 되었는데 자기뿐이 아니라 주변의 교양 있는 인사들 모두가 불행한 상태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와 같은 귀족들이 멸시하는 교양도 없고 투박스러우며 빈궁에 빠져 허덕이는 농노들 중에 만족과 단순한 고상함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습니다. 불쌍한 농노들이 갖고 있는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움 중에서도 신앙이 있기에 만족을 느끼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유한 귀족들이 불행해하는 것은 이 농노들이 갖고 있는 신앙을 갖지 못한 까닭에서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를 깊이 깨닫고 신앙을 가지면서 만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합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때부터 이전의 즐거움을 훨씬 능가하는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앙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리타분한 종교 강좌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을 가르쳐야 합니다. 영어를 가르치기 전에 신앙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학원에 가는 것이 몸에 배기 전에 교회 가는 것이 몸에 먼저 배게 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한 주일학교 교사가 교회를 가던 중 함께 모여 놀고 있던 4명의 어린이들을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 놀고 있는 것을 보니 아이들은 교회를 안 다니는 것 같았기에 그 교사는 아이들에게 말을 붙여보았습니다.

"얘들아, 잠깐 말 좀 물어도 될까? 너희들 혹시 교회 다니니?" 
"아니요. 저희는 모두 교회를 안 다니는데요?" 

그 말을 들은 교사는 그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던지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교회를 나가기로 했고 곧바로 선생님을 따라 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이 교사의 생일날에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예전의 4명의 아이들로부터 축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보의 발신인을 본 교사는 무척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중국으로 떠난 유명한 선교사, 연방정부 은행의 총재, 미국 대통령의 비서관, 그리고 미국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였습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아이들의 가능성을 일깨워준다면 장래에 백배의 열매를 맺는 훌륭한 복음의 일꾼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신앙교육을 하되 성경을 읽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링컨이 태어난 곳은 작은 시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신발 수선공이었으며 너무 가난해 그는 초등학교를 중퇴해야 했습니다. 시내에 가게를 열었지만 파산하고 빚 갚는데만 15년이 걸렸습니다. 그가 거친 직업은 농부, 뱃사공, 장사꾼, 군인, 우체국 직원 등 열 가지가 넘습니다.

첫 번째 약혼자는 죽고 나중에 결혼해 태어난 자식들도 연이어 둘이나 죽습니다. 그런데 그가 57살에 죽기까지, 그의 세익스피어 연구는 전문가 수준이었고 그의 성경지식은 신학자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정치가로서보다는 신앙과 기도의 사람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기 방이나 집무실에서 무릎 꿇고 통성으로 기도하였으며 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감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11월 19일은 그 링컨 대통령이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을 한 날이라 합니다. 불과 266단어, 2분 남짓했던 연설이 인류사에 남는 명연설로 남게 된 것은 연설의 마지막 부분 때문이라 합니다. 

<주님의 품안에서 자유의 국가가 될 것입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유명한 구절도 사실은 성경 서문에서 인용했다고 합니다. 그의 16대 대통령 취임연설 또한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는 결코 직면해 있는 이 큰 어려움을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결국 성경 한권으로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고 노예해방과 미국통합을 이루어내게 되었다 합니다. 그 성경 한권은 어머니가 유일한 유산으로 주신 것이었다고 합니다. 링컨은 이렇게 회고했다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날마다 읽어주신 성경구절이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어머니는 '부자나 위인이 되기보다 성경 읽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되라'고 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성경이다"라고 고백하고 권하던 링컨에게는, 자식을 앉히고 성경 읽어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 어머니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 중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영국 타임(The Times)에  이런 보도가 나왔다합니다. 그들의 통계 조사에 의하면 최소 한 매주 한 차례라도 예배에 참여하 는 사람의 평균 수명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7년이나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합니다.

어느 기독교 가정이 있었습니다. 매주일 아침이 되면, 지혜로운 남편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둘 중에 오늘은 당신이 대표로 예배드리고 오구려." 그런데 어느 날 밤 남편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와 함께 죽어 하늘나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지기가 이렇게 말하더래요. "당신들은 부부지요?" 둘은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이렇게 말하더랍니다."당신들 둘 중에 부인만 대표로 천국에 들어가시오." 

그렇습니다. 신앙은 개인적입니다. 각자 예배에 참석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기도는 파선 당한 자에게 항구이며, 물에 빠져 가는 자에게 생명줄이며, 넘어지는 자에게 지팡이며, 가난한 자에게 보석이며, 병든 자에게 의사가 되며, 우리에게 축복의 길을 내며, 환란의 구름을 헤쳐낸다.' 고 말합니다.

봉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새벽, 골목 한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마침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돌아가던 목사님이 가던 길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그 쪽으로 발길을 돌려 가보았습니다. 그 것은 공중 화장실 안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어두컴컴한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가 도끼로 화장실 바닥을 딱딱 치고 있었습니다. “누구시오.” 목사님이 묻는 말에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열심히 바닥을 치면서 대답했습니다. “화장실 청소를 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왜 도끼로 화장실 바닥을 치는 것이오.” “대변이 바닥에 얼어붙었으니 다른 사람이 뒤를 볼 때 불편하지 않겠소.” 목사님은 매우 감사하여 그 사람 바지 뒷주머니에 동전 몇 개를 넣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청소를 마친 후 교회로 가 그 돈을 헌금했습니다. 그가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작은 봉사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인 부모는 자녀를 온전한 신앙인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자녀를 훌륭한 신앙인으로 양육한 부모의 예가 나옵니다. 모세의 생모 요게벳은 바로 궁에 모세의 유모로 들어가 그에게 전통적인 히브리인의 교육을 시켰고, 히브리인으로서 지녀야 할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모세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았으며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디모데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는 어려서부터 디모데에게 성경을 가르쳤으며, 그들이 갖고 있던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딤후 1:5; 3:15). 이러한 디모데는 후에 바울의 훌륭한 선교 사역의 동역자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기의 정치가이며 위인인 윈스턴 처칠이 인기절정을 누릴 때 한 신문사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그를 가르친 선생님들을 조사해서 '위인을 만든 스승'이라는 제목으로 가사를 냈다합니다. 처칠은 이 기사를 읽고, 이런 메모를 신문사에 보냈다고 합니다. '귀 신문사의 조사에 치하를 보냅니다. 그러나 나의 가장 중요한 스승 한 분을 빠뜨렸습니다. 그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입니다. 나는 유치원서부터 대학가지 많은 선생을 만났고 많은 교수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나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나됨에 결정적 역할을 해주신 분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선생들은 나에게 지식을 주었으나 어머니는 나에게 사람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진정 사랑으로 가르치신 최선의 교육자입니다.‘

부모님은 사람됨을 가르치는 가장 큰 스승입니다. 삶의 모습이 아이에게는 직접적인 교육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지만 복음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며 천국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오 헨리(O. Henry)의 작품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합니다. 어떤 한 남자가 아내를 잃고 어린 딸만 데리고 살았는데, 직장에 갔다오면 신문만 보고 딸아이가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있어서 물어 보면 가르쳐 주지도 않고, 함께 놀자고 해도 놀아 주지도 않고 무관심하게 대해 주니까, 그 소녀가 점점 자라서 불량한 짓을 하고 거리의 깡패가 되고 말았습니다. 후에 그 소녀가 죽어서 천당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가 너 같은 사람은 여기에 못 들어 갈 것이라고 말하니까, 이 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그 소녀를 들어오게 하라. 그러나 너무 바쁘다고 해서 자기 자녀를 돌보지 않은 이 아버지 같은 사람은 못 들어오게 하라”고 말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 자녀교육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로서 교회 설리 80 주년을 감사하되 어린이 주일을 맞아 양육의 은혜 주심에 감사하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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