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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여호와가 유일한 주인이 되는 가정 (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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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가 유일한 주인이 되는 가정 (출 20:1-3)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린이날이기도 합니다.  은혜로운 가정의 달에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이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 위에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느 한 교육학자는 요즈음 부모님들은 떡을 달라는 아이에게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는 아이들에게 뱀을 주고 있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즘의 부모님들은 안아 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텔레비전 스위치를 켜 줍니다.  같이 놀아 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1,000원짜리를 들려주며 가지고 나가서 놀아라고 합니다.  뛰어 다니고 싶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피아노 앞에 앉혀놓습니다.  마음껏 장난을 치고 싶어하는 아이를 봉고차에 태워서 영어학원, 미술학원에 보냅니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중국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줍니다.  교회 문을 두드리는 아이에게 독서실 문만 두드리면 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떡을 달라는 아이에게 돌을 주고, 생선 달라는 아이에게 뱀을 주는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기업과 경제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가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기업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결국 국가도 무너지고 맙니다.  거대한 로마 제국을 보십시오.  인류 역사에서 로마 제국만큼이나 빠른 시간에 세계를 제패했던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로마 제국만큼이나 빠른 시간에 세계에서 힘을 잃어버리고 무너진 나라도 없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학자들에 따라서는 저마다의 원인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가정의 무너짐이었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서 로마 제국도 무너졌습니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로서 스위스에서 영적 피난처라고 불리는 라브리 운동을 전개했던 프랜시스 쉐이퍼 박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현대인들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과정에 결정적으로 오늘의 인류는 '절망의 선'을 넘어섰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19세기에서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19세기까지만 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가운데서 5계명 이하,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것은 맞는 말이다"라고 모두가 동의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경우에도 사실이었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의 복음이 없어도 유교적 가치관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도덕적인 가치관을 형성해 왔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소위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그런 절대적 가치관을 포기하게 됩니다.  사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은 절대적 가치관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 앞에 그것이 왜 간음이며, 죄냐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사람하고 굳이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  다른 시대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치관이 상대화되었습니다.  이런 가치관의 변화는 결국 오늘 이 시대의 가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 부모님들은 못 먹어도 가정은 마지막까지 붙잡아야 하는 보루로 생각을 했습니다.  내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내 자녀는 끝까지 내가 지켜주어야 할 사명 그 이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1997년 이 땅에 IMF가 불어닥친 이후로 수 많은 가정들이 해체되는 극단적인 아픔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서는 가정이나 자녀들, 내 남편과 아내는 내가 끝까지 붙잡아야 하고 지켜주어야 할 절대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정적인 위기가 이런 시대적 경향에 맞물려 상대적 가치관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건강한 가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가정을 바로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건강한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가치관의 회복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건강한 가정은 단순히 환경을 좀 바꾸어 보고, 식단을 바꾸어 주는 그런 차원의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대하신 건강한 가정은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돌아갈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치관을 공유해 온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십계명을 절대적 가치관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좀더 요약한 핵심 되는 말씀을 쉐마라고 불렀습니다.  '쉐마'라는 말은 "잘 들으라"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붙들고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슴치 않고 신명기 6장 4절이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앞에 있는 신명기 6장 4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그런데 이 쉐마가 기록된 신명기 6장이 시작되는 1절과 2절을 읽어보면 십계명을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계명이 어떤 목적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졌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앞에 신명기 6장 1절과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단어들은 "너"와 "네 아들", 그리고 "네 손자"라는 표현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는 부모를 통해서 자녀들과 손자들, 그리고 자자손손 대대로 가르쳐져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고 살 때 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이 땅에서 진정한 복을 누릴 것이고 장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건강한 가정의 열쇠는 하나님의 율법이요, 십계명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십계명은 가정을 위해서 주어진 말씀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비교할 때 구약의 핵심은 율법이고, 신약의 핵심은 은혜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율법을 은혜와 대치되는 개념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출애굽기 20장의 본문을 보면 십계명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는지의 그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스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희가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할 때 너희를 구원시킨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들은 나의 구원의 은혜를 이미 체험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나의 인도함을 따라서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저들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십계명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구원을 받은 주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삶의 법칙으로, 가정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법칙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십계명은 이것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 법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십계명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체험한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인생의 법칙과 가정의 법칙으로 주신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법칙이 무엇입니까?
본문 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다른 신들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신'이란 단어를 가장 일반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로 이렇게 정의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문제에 있어서 궁극적인 해답으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절대적인 존재."  우리가 겉으로 얼른 생각을 하면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되도록 많은 신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인도에는 수백만의 신이 존재합니다.  일본에 가면 신사에만 8만 신이 있습니다.  옛날 그리스인들은 3만개의 신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의 아덴에 갔을 때 거리의 골목마다 신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름도 없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도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집트에는 세상의 모든 동물들을 신으로 만들어 섬기고 있습니다.  지난 2007년에 미국의 뉴욕타임즈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 나라 서울에서 무속인들이 섬기는 신들이 1만개가 넘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끊임없이 신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이런 신들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두려움과 한계에 대한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신들을 가리켜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다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어서 있는 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여호와"라는 이름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어떤 존재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창조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기 전에 인간은 끊임없이 신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다른 신들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신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앞에서 신이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내가 내 마음으로 의지하는 것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정말 나는 하나님 이외에는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없다고 분명하게 고백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제일 계명을 기억하십시오.  거기에 보면, "너는 나 외에는"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자면 "너는 내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살아 계신 절대자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이 창조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신들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시겠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제발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두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당신 앞에서 다른 어떤 신들을 두고 그것을 경배하며 믿고 의지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정말 마음으로 붙들고 의지하는 신들, 우상이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저는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옛날처럼 서낭당의 신들을 섬기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의지하는, 어쩌면 하나님 이상으로 붙들고 있는 우리의 우상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맘몬의 신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맘몬이라는 말은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하실 때 여기에서 "재물"이라는 말이 헬라어 원문에서는 "맘모나"라고 해서 맘몬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본래 맘몬이라는 말은 아람어에서 나온 말인데, 이 단어의 어근은 "난 믿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어떤 필요의 차원에서 물질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이 물질이 어느 정도 모아지면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서히 그 물질이 나에게 행복을 준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물질이 우리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사이에 그 물질이 우리의 신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새 그 물질을 예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맘몬주의자라고 부릅니다.  'mammonism'이라는 말은 배금주의자라는 뜻입니다.  황금을 경배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가운데는 교회에 나와 있지만 배금주의자가 없을까요?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만 그러나 내가 더 믿고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돈이 아닙니까?

어느 목사님이 하루는 주일 오후에 교회 현관을 지나가시다가 그 교회 노인분들이 대화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입에 거품을 물면서 열변을 토하시는데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분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절대로 자식들에게 미리 돈주머니 풀면 안돼.  늙을수록 그 주머니 꽉 붙들고 있어야 해.  그것 놓치면 끝장이야 끝장. 그것 없어 보라구.  자식 새끼들 낯짝이나 볼 수 있는지.  그러니까 꽉 붙들어."

그 순간 목사님은 이런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이 예수 믿는 분이 맞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 가운데도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늙을수록 돈 주머니를 꼭 붙들어야 한다고.  어쩌면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도 드리고,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 상위 가치는 예수님이 아니라 돈일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너는 내 앞에서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지금 다른 신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재물이라는 맘몬의 신을 하나님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이상으로 붙들고 있는 우상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둘째로, 건강의 신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솔직히 저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건강이 어쩌면 우상의 차원에까지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건강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사람이 자신의 건강을 돌아보는 것은 아주 유익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 가운데 인간의 육체가 악하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는 유일한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들은 인간의 육체는 악한 것이며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거룩한 성전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전을 돌보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운동의 유익을 성경은 긍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는 그 무엇보다 소중히 다루어져야 하고 육체의 건강을 도모하기 위한 운동이라든가 환경 개선은 격려되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지나쳐서 날마다 생각하는 것이 운동이고, 눈을 감아도 헬스장만 나타나고, 건강에 좋은 음식점을 찾아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그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고 말았다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신은 건강일 것입니다.

요즘은 웰빙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몸에 좋은 음식만 있다면 바람 따라 움직입니다.  바람 쏘이러 다니느라고 바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람 쏘인다고 하니까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미국 교포 사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교포 2세들은 우리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를 함에 있어서 잘 소통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잠깐 바람을 쏘이러 나가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 전화가 올 데가 있으니까 기다렸다가 전화가 오면 아빠 잠깐 바람 쏘이러 나갔다고 해라."  그런데 이 아들이 "바람 쏘이러"라는 말을 모두지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이 단어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전화가 왔습니다.  상대편에서 아빠가 어디 가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들이 생각하다가 한다는 말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빠요, 잠깐 바람 피우러 나가셨습니다."

자연이 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을 숭배하기까지에 도달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 그것들이 신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연을 즐기십시오.  그러나 자연에 빠지면 안 됩니다.  가족이 함께 자연을 찾아 즐기시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자연을 예배의 대상으로 혼돈하지는 마십시오.  혹은 자연을 예배로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건강을 성경적으로 추구하려면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운동을 찾으십시오.  그러나 혼자서 하지는 마십시오.  요즘 건강 때문에 운동 과부, 운동 홀아비, 운동 고아들이 넘쳐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십시오.  탈무드에도 사람이 폭식을 하거나 건강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여러분의 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너무 건강의 염려에 빠져서 이 음식, 저 음식을 찾아다니고 예배의 우선 순위를 놓쳐버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건강을 예배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너는 내 앞에서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우리가 건강에 집착한 나머지 건강을 신으로 숭배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상으로 붙들고 있는 오늘 현대의 신들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세 번째로, 쾌락의 신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정당한 쾌락과 건강한 즐거움을 결코 정죄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성경을 보면 가족이 함께 하는 즐거움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도서 9장 9절에 보면, 해 아래에서 네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쾌락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즐거움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쾌락에 빠지면 안됩니다.  쾌락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쾌락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었을 때 그것은 이미 우상입니다.

빌립보서 3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 사람들은 아마 오늘날로 말하자면 식도락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먹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먹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먹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들을 행해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다."  한 마디로 말해서 먹는 탐욕에 대해서 신랄하게 경고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것이 지나치면 의학적으로 '중독'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이 왜 중독에 빠질까요?  거기에 쾌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알콜중독, 알콜이 주는 쾌락이 있지 않습니까?  마약중독, 마약이 주는 쾌락이 있습니다.  도박중독, 그것 때문에 재산이 날아가고 가정이 망해도 끊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도박이 주는 쾌락과 즐거움에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스마트폰 중독,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스마트폰 중독입니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에 빠져 있습니다.  식당에 대여섯명이 밥을 먹으러 가도 모두가 고개를 숙여서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까?  물론 쾌락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거기에 몰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의 중독도 무서운 것입니다.  부부생활을 떠난 성의 쾌락추구는 오늘날 가정을 파괴하는 무서운 중독입니다.  스포츠 중독도 적지 않게 건강한 가정 생활, 건강한 믿음 생활에 방해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스포츠를 즐기십시오.  그러나 빠지지는 마십시오.  여성분들 가운데는 쇼핑중독에 빠진 분들도 있습니다.  이 중독으로 가정이 흔들리고 위기에 빠진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듣습니다.  대부분의 중독이 위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떠나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주는 쾌락과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에게 별로 위험하지 않은 유일한 중독이 있다면 그것은 코딱지 후벼파기 중독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물론 남이 없을 때 하셔야 상대방의 기분을 해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도 중독이 되면 나중에는 장소나 체면도 없이 후벼 파댑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파는 이유는 거기에도 즐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중독에는 그것이 주는 쾌락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쾌락의 신을 경계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인기의 신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지음을 받은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철저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 사건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으면서 인간들이 부르짖은 모토가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이름을 내자."  많은 사람들의 존재 이유가 자기 이름 석자를 남기기 위해서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당한 가치와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살다보면 사람들이 내 이름을 귀하게 여겨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름은 자연스럽게 남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그것만이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보다 잘 보이기 위해서 아첨하고, 어떤 사람에게 매달리기 위해서 편가름을 합니다.  인생을 사는 유일한 동기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다르게 살았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 살았지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귀하게 여겨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동기가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고 사람들 앞에서 인기를 얻기 위한 피상적인 낮은 가치관에 매달려 산다면, 어느 날 그 인기의 거품이 빠지는 순간 우리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 갈 것입니다.  예외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인기 연예인들의 가정이 건강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건강한 가정생활에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가정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가치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우리의 가정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건강한 가정이 비밀은 단순합니다.  하나님을 우리 가정의 유일한 통치자로 모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일 지키기 위해서는 재물이 필요합니다.  건강도 필요합니다.  즐거움도 필요합니다.  명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빠져서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가정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하나님 여화니라."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들에게 명령하실 권한이 있고, 또 우리들에게서 순종을 받아 마땅한 분이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들에게 명령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그의 백성 가운데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에게 완전한 권위를 행사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물질이나 건강이나 즐거움이나 명예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거나 흐리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앙을 경멸하거나 우습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을 최고의 자리에 놓고,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깊이 젖어서 그의 위엄을 생각하고 경배하며 그의 축복에 참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오직 그만을 찬양하며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신앙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신이 되심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유일한 주인이 되심을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가정이라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천국이 바로 우리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가정을 하락하시며 자녀를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건강한 가정을 사모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그리고 이 사실을 나와 내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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