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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하지 않는 곳으로 (요 2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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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지 않는 곳으로 (요 21:18-25)

본문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당연히 중요한 결론부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양무리를 맡기신 주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사역을 해야 하는지 그 지침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그게 두 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첫째는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주님의 예언입니다. 둘째는 베드로의 타인에 대한 관심사 문제입니다. 
  
우선 첫 번째 주제부터 보겠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베드로의 순교 예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18-19절) 

이 부분의 중심 은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라는 구절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붙잡고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인생은 이제 베드로의 뜻대로 가지 못하고 주님의 뜻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목회의 길이란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저는 매주 생각해 봅니다. 내가 어쩌다가 매주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신기한 일입니다.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인간 만사 내 뜻대로”였습니다. 가고 싶은 데 가고, 먹고 싶은 것 먹고, 자고 싶으면 잤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욕하고 싶은 사람 욕하고, 마음껏 지냈습니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병들고 싶지 않은데 병들었어요. 학교 다니고 싶은데 학교에 가지 못하고 요양생활을 했습니다. 먹고 싶은 술 담배 못 먹게 되고, 만나고 싶은 친구들 못 만나게 되고, 가족 위해 일하고 싶은데 못하게 됐습니다. 4년 다닐 대학 6년 다니고, 결혼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평생 원하던 직장 생활은 몇 년이 못가서 버리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목회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별난 사람이나 하는 줄 알았던 설교를 매주 하고 있습니다. 

목회의 길도 마찬가집니다. 예기치 않았던 교회에서 5년 이상을 훈련받았고, 어디에 붙은 지도 모르던 상일동에 와서 30년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형태의 교회가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목회의 길만 그런 게 아닙니다. 인생사가 그렇습니다. 언젠가 서울대학교 신입생들을 상대로 조사한 것을 보니까 절반 이상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과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다른 전공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바꾸고 싶다고 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다른 일 하겠다 하고, 공무원 회사원들은 자유업을 하고 싶어 합니다. 과연 이 세상에 자기가 원하는 일을 자기가 원하는 만큼 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왜 이렇게 뜻대로 되지 않는 걸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생을 설계하시고 주장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생길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여덟 명의 아들들 중에 막내로서 들에서 양치기를 하다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인생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시37:23)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방임하지 않고 붙잡고 계십니다. 하루의 일과부터 일 년의 설계, 한 달의 계획, 일생의 과정을 붙잡고 계십니다. 매 순간 관여하십니다. 응급 환자가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을 보셨나요? 심장 박동기를 찬 환자를 보셨습니까? 

우리는 한 순간 심장이 뛰지 못하면 죽습니다.  심장이 뛰고 호흡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심이라...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우리가 그를 힘입어 기동하며 존재 하느니라”(행17:24,26,28)  
  
내 앞에 다가오는 모든 일들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운이 나쁘고 재수가 나빠서 무슨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나를 붙잡고 계신 증거입니다. 

저는 20대 청년 시절에 중병이 들면서 하나님께 붙들린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항상 이런 “붙들림” 속에서 살아갑니다. 영혼들을 돌아보는 일에 붙잡혀 있습니다.  매주일 설교를 준비할 때에 붙잡혀서 준비합니다.  지금 설교를 하는 이 순간에도 저는 하나님께 붙잡혀 있음을 느낍니다. 매일의 내 건강이 붙잡혀 있고, 내 생명이 붙잡혀 있습니다. 나의 가족들과 나의 매일의 일과까지도 붙잡혀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보세요.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띠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18) 젊은 시절에는 두 가지를 마음대로 했습니다. 허리띠를 매는 일과, 임의대로 다니는 일입니다. 유대인의 복장은 허리띠를 매야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허리띠를 제 손으로 단단히 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보세요. 힘이 없어서 허리띠를 단단히 맬 힘이 없습니다. 가고 싶은 데는 많은데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아서 못 다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늙어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 왔든지, 앞으로는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주님을 따르고 싶으면 따르고, 부인하고 싶으면 부인하고,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인생은 절대로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꽉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두려워하던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해야만 될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19절)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예고입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자기 뜻대로 인생을 경영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인생은 절대로 베드로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 뜻대로 됩니다. 주님의 경고요 예고입니다.  
  
앞으로 내 인생길에는 커다란 일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않고, 상상하지 않던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실패가 될 수도 있고, 성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급이 될 수도 있고, 형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익이 될 수도 있고 손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일이 될 수도 있고, 육신적인 일이 될 수도 있고, 물질적인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녀의 일이 될 수도 있고, 부부간의 일이나 이웃 간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공통점은 내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 앞에는 순교의 길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베드로가 원치 않던 일입니다. 지난날 우리는 어떻게 살았나요? 우리 앞날에도 베드로와 같은 일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때에 당황하거나 분노하지 마세요. 오히려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앞으로 전개될 인생에 대하여 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삶이 시작됐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하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혔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무슨 귀신에 붙잡힌 줄로 생각합니다. 절대로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귀신은 인생을 주장할만한 능력도 없고 주장하지도 못합니다.  인생을 미혹하고 행복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창조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날마다 숨 쉬게 하시고, 먹고 마시고 움직이게 하십니다. 이러하신 하나님께 붙잡힌 것은 깜짝 놀라 반가워 할 일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 봅시다. 부모를 잃었던 고아가 자식을 찾던 부모에게 붙잡혔다고 합시다. 그 부모에게 붙잡히게 된 것이 불행입니까? 오히려 붙잡힌 것이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이 땅에서 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축복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원치 않던 삶을 하나님이 주실 때에 적극적인 자세로 맞이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첫 번째 행동 원리에 주목하세요. 그것은 바로 너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22절) 소극적으로 하나님께 붙잡힌 것만 다행으로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억지로 끌려가지 말고 즐겨 따라가세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힌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잡힌바 된 그것을 능동적으로 따라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붙잡힌 것을 잡으러 적극적으로 따라야합니다. 무당에 홀린 사람은 귀신에게 벌을 받을까봐 무서워서 따라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잡힌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위해 기쁨으로 따라갑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붙잡혀서 영생 얻고, 천국에 이르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적극적으로 따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앞에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날 때에,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줄 알고 적극적으로 따라가세요.  
 
“너는 나를 따르라”(22절)는 말씀은 현재 명령형입니다. 

이것은 헬라어 어법상 현재적이며 지속적인 행위를 나타냅니다. 베드로가 과거에 주님을 따르던 모습을 보면 기복이 심합니다. 어떤 때는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했다가, 어떤 때는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고 잡아뗀 적도 있습니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고 물 위를 걸었는가 하면, 의심하고 물에 빠져 죽을 번 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하신 질문에 100점짜리 대답을 해서 칭찬을 들었는가 하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여기가 좋사오니” 해서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이제 그 베드로에게 새로운 차원에서 따르기를 원하셨습니다. 항상 주님을 따르되, 기복(起伏) 없이 따르라! 자꾸 넘어지고 자빠지지 말고, 쉬거나 포기하지 말고, 성실하게 주님의 일을 하라! 우리는 날이 갈수록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중단이 없어야하고,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뒤죽박죽 추종자가 아니라, 흔들림 없는 안정적인 추종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말씀의 두 번째 주제는 베드로의 관심사에 대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갑자기 곁에 있는 사도 요한의 앞날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베드로가 요한의 앞날에 대해서 물은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가장 가까지 지내던 사람입니다. 가까운 친구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금까지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함께했던 친구가 장차 함께 할 것인지 아니면 달리 될 것인지 궁금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요한과 함께 일하게 될는지 아니면 헤어지게 될는지도 궁금합니다. 베드로 자신에게는 순교의 명령을 주셨는데 요한은 어찌 될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베드로는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다시 말하면 주님이 재림하시는 세상 끝 날까지 요한을 살려둘지라도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니까 어떤 제자들은 오해를 했습니다. “아하, 요한 사도는 재림 때까지 살아남는구나!”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을 세상 끝 날까지 살려둘지라도 베드로는 상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남이야 전봇대로 이쑤시개를 삼든지 말든지!”, “남이야 신발을 거꾸로 신든지, 양말을 뒤집어 신든지, 양복 위에 두루마기를 입든지 말든지!”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말고 베드로 자신의 일이나 잘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너무 남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자기 직책은 쥐꼬리만큼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남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엎어져서 간섭합니다. 서양 사람은 개인주의가 너무 발달해서 탈입니다만, 한국 사람들은 남의 일에 너무 관심이 많아서 탈입니다. 베드로는 양 무리를 돌아보는 목자의 직임을 맡았습니다. 사도직을 맡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직분에 충실하면 됩니다. 남이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관여는 말할 것도 없고, 관심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남의 일에 상관하지 말아야 될 중요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남의 일에 상관할 만큼 여유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일만 감당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저는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에 대해서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한 일이 거의 없습니다. 설교 준비하는 데 시간이 모자랍니다. 미국의 어떤 목사님은 설교 한편에 평균 80시간을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의 목사들은 한 주일에 한편의 설교가 아니라 수십 편의 설교를 준비합니다. 저 역시 말씀을 사색하고 묵상하는데 충분했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습니다. 

다른 일들도 마찬가집니다. 성도들과 만나서 대화하는 일, 심방하는 일, 문서를 작성하는 일, 책 보는 일, 경조사에 참여하는 일, 사역자들을 훈련하는 일, 각종의 행정 관리. 일은 많은 데 제대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남의 일 다 챙기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가정주부가 주부의 일만 충실히 하려고 해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이익 제대로 남기려면 시간이 모자랍니다. 모든 분야가 그렇습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남의 일에 간섭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남의 일에 이러쿵저러쿵 상관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남의 일에 간섭한다 해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업하고 학문 연구 하는 사람이 정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가 스승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다. 각자 자기 일을 해야 합니다. 사장이 사장 일을 하는 회사가 직원이 직원답습니다. 사장이 부장 과장 계장 일까지 다 하는 회사치고 제대로 된 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 일까지 거든다고 좋은 남편이 되지는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이 할 일을 대신 해 준다고 좋은 자식이 되지는 않습니다. 집사가 목사의 일에 간섭한다고 좋은 목사가 되지는 않습니다. 성도가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이러쿵저러쿵 한다고 신앙이 좋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 일을 할 때에 남에게 도움이 됩니다. 남에게 간섭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요한 사도의 일에 관심두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가장 근본적인 까닭은 각자에게 직임을 주시고 감독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어떤 직분을 맡고, 얼마나 잘 하는 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일입니다.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내가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명령을 다시 보겠습니다. 

“나를 따르라!”(19)  

“너는 나를 따르라!”(22) 

주님은 같은 명령을 두 번 반복하셨습니다. 두 번째 명령에 사용된 단어에 약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너는, suv”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네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너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라는 명령입니다. 얼마나 몰두해야 할까요? 죽도록 하십시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자기 일에 죽도록 매달리는 사람은 남의 일에 간섭할 겨를이 없습니다. 또 다른 의미의 순교입니다. 봉사의 일, 직업적인 일, 가정의 일, 사회적인 일. 이 모든 일에 남의 일 간섭하지 말고 순교적인 충성을 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본문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특히 목회자인 베드로 사도에게 남기신 마지막 교훈이요, 마지막 명령입니다. 의미심장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종말을 사는 성도들의 생활 원칙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남은 인생을 주님에게 붙잡혀서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 멋대로 살았을지라도, 앞으로 남은 생애만은 주님이 붙드시는 것을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순교의 길을 향해 주님께 붙잡혀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붙잡혔기 때문에 이제는 내 인생이 내 원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내 인생이 내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낙심하거나 노하지 마세요. 주님이 붙잡으시는 줄 알고 믿음으로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 자기 일에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각자의 책임에 몰두하다가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순교를 당할지라도 남의 일에 간섭 말고 자기 일에만 충실해야 합니다. 직업적인 일에 충실하고, 가정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일에 충실하다가 주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맷돌 갈다가, 밭에서 일하다가, 부엌일 하다가, 전도하다가, 주님 맞으시기 바랍니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순교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순교하라는 명령으로 끝납니다. 그것이 성도로서 우리 인생의 목표입니다.  
(김영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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