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배를 사모하는 자의 축복 (시 95:1-8)

첨부 1


예배를 사모하는 자의 축복 (시 95:1-8)


무릇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자는 거룩한 변화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새 일을 이루리라는 특별한 소명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모름지기 생명체의 본질이 성장이라고 한다면 성장의 특성은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변화의 사건을 기대하십시오.

기억할 것은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말고,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들으십시오.  좋은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 말고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십시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종교인들은 좋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나왔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논쟁만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무수한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나왔던 사람들은 다 해결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기대를 사모하는 마음과 새 일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이런 저런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 초대 가운데는 우리의 일생 가운데 잊을 수 없도록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생각되는 추억을 남기는 초대들이 있습니다.  지금 초대를 이야기하면서 제 머리 속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감동적이었던 아름다운 초대의 사건들이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이런 초대와는 비교될 수 없는 정말 높으신 분의 초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인간들의 경배를 받아온 어떤 신들보다 더 높으신 분, 지상의 어떤 권력자보다 훨씬 더 지체가 높으신 분의 초대가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크신 하나님,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라고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신 중의 신, 왕 중의 왕, 유일하신 절대자이신 분의 초대를 시편 기자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초대의 내용의 핵심은 본문 6절입니다.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이 초대를 가리켜서 보통 우리는 예배에의 초대라고 부릅니다.  혹은 예배에의 부름이라고도 합니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 하셔서 우리를 예배의 장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요?  저와 여러분을 축복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예배의 장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님은 참되고 진정한 예배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고귀한 활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예배라는 것은 우리가 마음에서 생각해 내는 온갖 활동들을 다 쉬고,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시도록 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시편 95편은 "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도 동일하게 "오라"는 단어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라, 빨리 와서 함께 예배하자!  그 예배의 장에서 나는 너를 만나고 싶다고, 나는 너를 축복하고 싶다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의 장에서 어떤 축복을 경험할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예배를 사모하고 그 예배의 장으로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의 축복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축복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으로 살아가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기쁨으로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힘들고 곤고한 가운데 지친 몸으로 주 앞에 나온 심령도 예배를 드리게 되면 기쁨이 회복됩니다.  왜냐하면 예배 자체가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엄청난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영광을 아는 사람들은 예배의 자리에로 나올 때마다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옵니다.  설레이는 기쁨을 가지고 나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도 사모하는 마음과 설레이는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절에서도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즐거운이라는 단어는 그저 평범한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즐거움은 속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예배가 무엇이기에 예배를 사모하는 심령들에게 속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배의 장에서 저와 여러분이 만나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이해하면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오늘의 시편은 우리가 예배의 장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 분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4절과 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그렇습니다.  산도 바다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산도 바다도 다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6절에는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그 하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눈으로 뵙는다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지난 2006년 이탈리아의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미국 대표선수로 프리스타일 스키 남자 모글에서 동메달을 땄던 토비 도슨이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때 김연아와 함께 유창한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던 선수이기도 합니다.  토비 도슨.  그는 본래 한국 입양아 출신입니다.

1981년 부산 범일동 중앙시장에서 부모를 잃어버리고 미아가 되었습니다.  1982년 미국 콜로라도 백인 가정에 입양이 되어서 미국인 소년으로 자랐습니다.  미국에서 스키 선수가 되어 동메달을 따면서 그의 사연은 미국과 대한민국에서 크게 조명을 받으면서 그는 그의 뿌리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의 부모님을 찾는 이야기는 영화 '국가대표'에서 다루어지기도 했습니다.

2007년 2월 그는 한국에 와서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드디어 생부를 찾아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아버지를 만날 것에 대한 기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이것은 내가 풀어야 할 가장 커다란 숙제였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잠을 설치고 아버지를 만날 대면의 순간을 지금 기다리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체의 아버지를 만나는데도 이렇게 설레이는 기쁨과 기대가 있었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은 어떤 것일까요?  상상이 되십니까?

예배는 바로 그런 감격을 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예배는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나의 창조주를 대면하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그 창조주를 만나는 기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감격이요,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장에서 만나는 그 분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 그 분은 우리를 구원하신 여호와 주님이십니다.

본문 1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여기에 보면 우리가 노래할 대상은 바로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구원의 반석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편의 동일한 기자가 기록한 시편 42편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앞의 스크린 화면에 띄워진 시편 40편 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내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의 웅덩이와 낙심의 수렁, 캄캄한 죄악의 수렁에 빠졌던 나를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신 분.  그 분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을 예배의 장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져 있는 나를 끌어올리시고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을 주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살게 하신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는 그 순간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배의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장에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배의 장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난 2001년 1월 26일 일본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일본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인 요시오까 후유끼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심한 충격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아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을까?"  그는 한국인들이라면 모두가 다 일본인들을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일본이 식민지 통치를 했고, 박해를 했으니까 당연히 한국 사람들은 일본인을 싫어할 것이다.

그런데 그날 텔레비전 저녁 뉴스는 한 한국 유학생이 신주쿠 오꾸보 역에서 선로로 떨어진 일본인 취객 한 사람을 보고 그를 구하기 위해 선로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구하려고 했지만 결국 취객과 함께 전동차에 깔려 죽었다는 뉴스였습니다.  고 이수현 씨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일본과 한국에서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거야"라는 영화로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요시오까는 이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이수현씨의 부모에게 일본인을 대신해서 감사의 편지를 씁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일본인을 구출하는 한국인이 사는 나라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면서 한국어를 공부합니다.  한국 역사도 공부합니다.  드디어 그가 한국 땅을 밟는 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심장은 뛰고, 내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내가 이수현의 나라 한국 땅을 밟다니."

한국에 와서 그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한국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10년이 넘도록 1년에 한 번 이상 매년 한국을 방문해서 휴전선 근처에 가서 봉사를 하며 섬기는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자기 아버지를 구한 것도 아니고, 자기와 같은 일본인을 구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고마워하면서 자기 동족의 구원자의 땅을 밟는 감격을 눈물을 흘리며 고백할 수 있었던 사람.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저와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생명을 버려주신 분, 거룩한 피를 흘려주신 그 분, 그 구원자를 예배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감격은 얼마나 대단한 감격이겠습니까?  이런 창조자, 이런 구주를 만나는 기쁨이 예배의 장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기쁨은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어떤 기쁨이 아닙니다.  내 존재의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입니다.  나를 지으신 창조자,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를 만나면서 마침내 그 기쁨으로 한 평생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예배의 사건입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런 기쁨을 한 평생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예배의 시간마다 경험하면서 그 기쁨으로 나를 찾아오는 온갖 염려와 근심을 잠재우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시편을 통해서 예배를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예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축복입니다.

예배는 우리를 기쁨으로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 가운데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읽기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내가 힘들고 지치고 곤고할 때 내가 일어설 수 있던 것은 바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위로와 만지심을 경험할 수 있었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붙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도와 성경을 읽는 시간 이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드리는 공적인 예배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공적인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그의 음성을 들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보내라!  최초의 선교사 파송이었습니다.  세계 선교가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세계 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듣고 사도 바울이 선교사로 나갑니다.  세계의 흐름을 바꾸는 바울의 사역이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예배의 자리에서 숱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더러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을 받습니다.  더러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치유를 받습니다.  더러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명을 받습니다.  더러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더러는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생에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예배의 자리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대하고 사모하는 거룩한 영적 경험들이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 앞에 나와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어떤 알지 못하는 죽은 신들에게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예배의 자리에는 그분의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의 자리에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올 때의 마음과 갈 때의 마음이 달라지시기를 바랍니다.  올 때의 생각과 갈 때의 생각이 달라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배의 축복은 목사님이 축도를 함과 동시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되고 진정한 예배를 드린 사람들은 예배의 시간에 음성을 들려주신 그 하나님과 더불어 예배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분과 더불어 세상의 광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계속해서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받으시던 하나님이 잠시 후 예배가 끝나는 순간 그 분은 우리의 삶의 길에 인도자가 되십니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요한계시록 7장 17절에서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앞에 있는 스크린을 통해서 계시록 7장 1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보좌에서 예배를 받으시던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이 예배가 끝나자 보좌에서 내려와 이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손을 잡고 우리를 생명샘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배와 함께 예배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예배가 끝나는 순간 이제부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참된 예배의 축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선한 목자가 되사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예배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런 불평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배에 참여하고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공간에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 공간에는 수많은 전파가 있습니다.  들립니까?  안 들립니다.  그렇지만 주파수를 맞추면 들을 수가 있습니다.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추는 순간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의 주파수에 집중해서 맞추면 기대했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이 한 예배가 내 인생에서 마지막인 것처럼 생명을 거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배에 집중하지를 못합니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콩 밭에 가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머리 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집을 짓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딴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고서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삼각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호흡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몇 걸음도 못 가서 서로 엉켜서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예배가 그렇습니다.  예배는 내 주파수에 하나님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파수에 나를 맞추는 시간입니다.  내 뜻에 주님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어야 합니다.  예배에 올인하지 못한다는 것은 잡다한 생각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에 올인하면 그런 잡다한 생각들과 염려들은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중해야 합니다.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기도했던 문제에 대해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 속에서 들려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순종의 의지 없이 들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나, 싫어요!"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자기 소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혜도 위에서 부어주시는 참된 은혜가 아니라 자기 감정이 느끼는 은혜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자기 감정에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듣기를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자기 감정에 맞으면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고 흥분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자기 감정일 뿐입니다.  그래 가지고서는 결코 삶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순종의 의지가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것, 본문 7절과 8절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본문 7절과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여기 7절에서 중요한 것은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 중요한 것은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의 장에서 중요한 것은 순종의 의지로 듣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세요.  제가 그대로 할게요."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최선의 뜻을 가지고 내게로 다가오십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그래서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내게로 오십니다.  그렇다면 그 분의 말씀 앞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 순종입니다.  그 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그 말씀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라고 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하지 않겠습니다.  가라고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않겠습니다.  취하라고 하면 취할 것이고, 버리라고 하시면 버리겠습니다."  이 순종의 의지를 가지고 듣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런데 옛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의 의지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므리바에서 맛사에서 그들에게는 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해답이 들려졌습니다.  물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해서 물은 구했지만 불순종함으로 그 축복이 오히려 더 커다란 재앙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계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때로는 위험한 일입니다.  내 삶의 스타일이 바꾸어져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내 인생의 철학이 달라져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내게 새로운 결단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최선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주님, 말씀해 주세요."  저는 그렇게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배의 장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의 시간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예배에 성공하십시오.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이 성공합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실패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첫 자리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한 주간의 첫 시간인 주일의 이 예배의 장이 중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그 무엇보다 주일 예배의 성수를 삶에서 가장 우선 순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를 빼먹지 마십시오.  이 예배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예배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예배와 함께 행진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무당이 굿을 하는 그 자리보다 더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굿을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저들이 얼마나 진지합니까?  저들이 얼마나 간절합니까?  알지 못하는 죽은 신들에게 절하면서도 저들은 인생의 전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예배에 진지하십니까?  정말로 간절함과 사모하는 심령으로 예배를 드리고는 있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별의별 생각들을 다합니다.  예배에 그렇기 집중하지도 않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는 그 어떤 진지함이나 간절함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내 삶에서 예배가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것은 당연한 듯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예배를 드린다"가 아니라 "내가 예배를 드려준다"는 표현이 맞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내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소리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내 감정에 어긋나는 말씀을 들었을 때 예배의 자리를 떠나갑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갈6:7)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무시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내 의지대로 내 뜻대로 하나님을 종처럼 부려먹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분은 피조물인 우리들에게서 무시당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상대적으로 관계를 하시면 하나님도 상대적으로 만나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죄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을 버린 자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습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섬기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영과 진리로 예배하십시오.  온전하게 예배하십시오.  시시하게 예배하지 마십시오.  제대로 예배하십시오.  진지하게 예배하십시오.  기쁨으로 예배하십시오.  무엇보다 예배의 시간을 사모하십시오.  예배에 절대적 가치를 두십시오.  예배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거기에 새로운 힘이 있습니다.  거기에 꿈이 있습니다.  거기에 새 인생이 있습니다.  거기에 살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에 성공하게 될 때 세상 속에서의 여러분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를 경험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내가 걸어가는 인생의 광야에 길을 내어 주실 것입니다.  이 광야에 샘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 함께 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복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2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