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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선물(3) : 십자가와 승리의 확신 (요일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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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물(3) : 십자가와 승리의 확신 (요일 5:4-5)

: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을 믿고 누리고 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사랑으로 지난 두 주간 영국 웨슬리연구원 연수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감사합니다. 

이번 영국 방문에서 경험한 또 하나의 느낌은 ‘시계’에 관한 것입니다. 방문하는 도시마다, 높은 건물 특히 예배당에는 대부분 커다란 시계가 높이 달린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국회의사당 건물의 ‘빅벤’입니다. 시계탑을 설계 공사한 벤자민의 벤을 넣어서 빅벤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 시계의 문자판의 지름이 7m, 큰 바늘의 길이가 2.8m, 작은 바늘의 길이가 2.0m라고 하니 제법(?) 크지 않습니까? 96m의 높이에 달려 있어서 작게 보일 뿐입니다. 이 시계는 지금도 정확한 것으로 소문났습니다. 이번에 하루를 묵었던 캔달이라는 도시의 시청 건물에서도 시계를 보았습니다. 런던의 또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예배당에서도 높이 달린 거대한 시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시계의 사명은 정확한 시간(Chronos)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시계는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끈입니다. 각각 자신의 일을 하다가 시계가 알려주는 시간에 맞추어서 함께 모일 수 있습니다. 시계가 있어서 약속이 가능합니다.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예배당에 모일 수 있습니다. 시계는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는 끈입니다.

그런데 시계는 단지 시간을 말해는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때(Kairos)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입니다. 이번 영국 방문 중에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영국 교회는 지금 몇 시인가?’라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가 태어난 엪웠이라는 마을에 그의 아버지가 목회하였던 엔드류교회가 있습니다. 이 예배당 정원에 그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의 묘가 있습니다. 존이 그 아버지의 묘지 위에 올라가서 설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난주일 예배를 이 예배당에서 드렸습니다. 이 예배당에도 시계가 있습니다. 이곳에 제가 운동 삼아 들렸을 때는 아침 5분 전 6시였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는 해가 넘어가지 직전인 저녁 6시 5분 전이었습니다. 

이번에 방문한 지역 중에 가장 북쪽인 에딘버러 인근의 레이트라는 도시의 예배당도 제가 방문하였을 때는 아침 5분 전 6시였습니다. 그런데 그곳 역시 저녁 6시 5분 전처럼 느꼈습니다.

옥스퍼드를 방문하고 잠을 잤던 반버리라는 작은 도시의 아침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들린 반버리교회 예배당의 시계도 역시 5분 전 6시였는데, 음침한 분위기는 해가 넘어가기 직전인 저녁 6시 5분 전이었습니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인 5분 전 6시! 이것이 제가 느낀 영국 교회의 시간이었습니다. 해가 뜨는 아침 6시에, 해가 지는 저녁 6시를 느낀 것은 제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영국 교회가 아니라 한국교회를 보는 제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하는 내내 한국 교회가 다시 이 땅의 소망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한국교회는 몇 시입니까? 어둠을 깨뜨리고 다시 새벽을 맞는 우리 영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침을 맞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다시 어린 아이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까?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거듭나야 합니다(요 3:3).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합니다(요 3:8).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늘의 일을 믿어야 합니다(요 3: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찾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찾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그 사랑과 함께 놀라운 선물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선물은 구원과 사죄입니다. 우리는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의 확신과 자백을 통한 사죄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두 번째 선물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있는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놀라운 특권 중의 하나는 바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멈추게 되면 인간의 종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이 딱딱하게 굳어 형식적인 종교가 됩니다. 화려한 모양은 있는데 부드러운 생명이 없는 형식이 되어버립니다. 

존 웨슬리는 굳은 종교를 깨뜨리고 생명의 신앙을 영국 사회에 선물로 주었습니다. 우리 역시 다시 기도를 회복하지 않으면 형식만 남은 종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와 함께 받은 하나님의 선물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한 인도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준비하신 가장 놀라운 선물 중 한 가지는 성경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없으면 인간 삶에는 표준이 없습니다. 저 마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입니다. 

존 웨슬리는 자신을 가리켜 ‘한 책의 사람’ 즉 성경의 사람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가 영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시계 바늘을 다시 돌려놓을 수 있는 힘은 성경 말씀에 있습니다. 해가 지는 황혼을 해가 뜨는 새벽으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은 말씀과 기도에 있습니다.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 번째 선물은 십자가의 능력과 승리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확신하시고, 든든한 승리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먼저 십자가 능력의 확신입니다.

  
I. 십자가 능력의 확신
  
여기에서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흔들릴 수 없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는 취소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게는 한 가지 혁명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4:27 말씀입니다.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여기에서 ‘지다[bastavzw/바스타조]’는 말은 ‘들어 올리다’, ‘참다’는 뜻입니다. 내가 제야 할 십자가입니다.

1.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집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또한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6:24 말씀입니다.

눅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에서 ‘부인하다[ajpaevomai/아팔네오마이]’는 말은 ‘아주 거절하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자기를 부인한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상은 자기만족과 자아실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권력’과 ‘물질’과 ‘쾌락’의 추구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부인은 ‘섬김’과 ‘나눔’과 ‘거룩한 기쁨’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서 자기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 자기의 생각, 기분, 수완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내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자기 십자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면 선물치고는 좀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스스로도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세상으로부터도 핍박받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이것만이 영혼을 살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만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8 말씀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말씀은 십자가를 ‘능력[duvnami"/뒤나미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 사람이 보기에 정녕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3.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은 사역의 큰 원리입니다. 세상은 자기 자랑(PR)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그 능력이 나타나시는 통로가 됩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무시가 아니며, 지나친 자기 비하도 아닙니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멸시도 아닙니다. 자기 부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짐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짐으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제자는 자기부인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예배당 마다 가장 높은 곳에 십자가를 달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높은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저마다 갈 길이 바빠서, 더 많은 박수를 받기 위하여, 하는 일 너무 많아서, 사람의 눈도장을 찍느라고, 등등으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쳐다 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지만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저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는데 싸움이 멈추지 않습니다. 모두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한다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의 발에 밝히고 있습니다. 번쩍이는 금 십자가를 목에 걸었는데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니 구원의 통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은 십자가를 예배당 가장 높은 곳에 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되는 것은 금빛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이 녹아 지듯이 세상의 어둠 속으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높이시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조차도 하나님이 높이실 것을 기대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다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말석에서나마 나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가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하여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서 일하시기를 바라봅니다.

겸손히 그리고 성실하게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일련의 선물 중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승리입니다.

  
II. 든든한 승리의 확신

마지막으로 사탄은 당신에게 이렇게 속삭일 것입니다.

“물론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지만 너는 너무 약해. 그러니 너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어! 너는 평생 실패하는 삶을 살게 될 거야!”

그리고는 오랫동안 당신이 잘 알고 있는 죄악들을 꼬집어 말할 것입니다. 만약 이같은 사탄의 음성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당신은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아니라, 초라한 실패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말은 거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승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자의 새끼에게는 사자의 생명이 있고, 독수리의 새끼에게는 독수리의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승리하신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결코 당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요한일서 5:4-5 말씀입니다.

요일 5:4-5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여기에서 ‘이기다[nikavw/니카오]’는 말은 ‘정복하다’, ‘승리를 쟁취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세상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본질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1. 우리는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이런 믿음은 어떤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세와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은 연약한 사람이나 가지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가진 승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능력이듯이 우리에게는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면 오늘 이 땅에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새벽은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순간마다 다시 밝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3천 년 전의 고분을 발굴했습니다. 그곳에서 한 미라가 나왔고 그 옆에는 꽃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꽃병은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실수로 깨어졌습니다. 깨어진 꽃병에서 몇 개의 완두가 발견되었습니다.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검토한 후 그 쭈그러진 완두를 땅에 심었습니다. 그런데 30일 후 새파란 싹이 돋아났습니다. 3천 년간의 침묵을 깨고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에는 분명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이뤄집니다. 성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 11:38)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믿음의 사람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흔들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승리는 결코 빼앗길 수 없습니다. 
  
또한 성경은 아직 영적으로 어린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든든한 보장도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 말씀입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시험을 당하게 되면 염려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시험에 넘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감당할 시험 밖에는 우리에게 허락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험은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감당하다[uJpofevrw/휘폽헤로]’는 말은 ‘참아내다’, ‘고생을 끈기 있게 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거나 피하게 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사업에 실패한 어떤 사람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가로 막고 있는 문제들 때문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절망하였습니다. 함께 목장을 지나고 있는데 소들이 긴 돌담 옆에서 머리를 쳐들고 넘어다보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웨슬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저 소들을 보게. 담장 앞에서 모두들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지 않는가? 우리도 앞을 볼 수 없을 때는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앙망해야 승리할 수 있다네.” 

승리와 패배는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의 마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겠습니까! 실패는 없습니다. 비록 실패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승리를 위한 연습일 뿐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보다 승리에 대한 더 확실한 약속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진리를 붙드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사탄을 쫓아내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멋지게 사용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만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말씀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선생님이 자기가 가장 아끼는 귀한 시계를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먼저 시계를 꺼내 보이며 한 아이에게 “네가 이것을 갖고 싶으면 내가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선생님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생글생글 웃기만 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아이에게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그 아이는 손을 내밀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서 그랬는지 웃기만 했습니다. 

선생님은 또 다른 아이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얼른 시계를 받아 제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선생님, 감사합니다.”하며 꾸벅 인사했습니다.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정말 고맙구나! 네가 내 말을 믿어 주었구나. 이제 그 시계는 네 것이니 잘 보관해라. 태엽 감는 것 잊지 말고!”라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앞의 두 아이는 “정말 주시는 거예요? 그런 줄 알았으면 진작 내가 가졌을 것을!”하며 후회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선물로 준비하셨습니다. 그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많은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농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선물은 구원과 사죄입니다. 우리는 흔들릴 수 없는 구원과 자백을 통한 사죄의 확신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선물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있는 기도응답과 말씀을 통한 인도의 확신을 누려야 합니다. 세 번째 선물은 십자가와 승리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능력의 확신을 누려야 합니다. 든든한 승리의 확신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누리는 확신을, 성령님께서 또한 선물로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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