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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순결성 (고전 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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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순결성 (고전 5:9-13)


제가 신학교에 다닐 무렵 한국 교회는 민족의 역사에 최초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터로서 한국 교회는 사회적인 영성에 입각하여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하는데, 그 어디에도 사회를 변혁하자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 때까지 개인의 영성생활에만 치우쳤지 시대의 양심으로서 시대를 비판하는 예언자적인 외침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예언자적인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1964년 6월 3일 박정희 정부에서 한일회담을 굴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에 반대하여 한국 교회가 한일회담반대 시위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교계 지도자들인 한경직, 김재준, 함석헌, 전경연, 안병욱 등 기독교 지성들이 분연히 일어나 한일관계에서 역사를 청산하지도 않고 굴욕적으로 회담하는 것에 반대한 것입니다.

이 때 박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내렸고, 제가 재학 중인 한신대학의 전경연 교수를 비롯한 여러 대학의 진보적인 교수님들이 정부의 지시로 일명 ‘정치교수’로 몰려 대학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 때 우리 신학교에서도 전경연 교수가 해임되었고, 그 부당한 해임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한신대학에서는 동맹휴학에 들어가 전학생들이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동맹휴학의 주모자였습니다. 그래서 한창 동맹휴학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어느 날 교수님들이 저를 불러 여러 가지로 훈계하셨습니다. 

“네가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전경연 교수 해임에 대해서 정부와 이사회에 대한 항의표시로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다.
세상이 아무리 불의하다고 하더라도 신학교의 문을 닫아 학사진행을 막고 주의 종을 기르는 선지자 교육을 방해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르느냐?
세상이 아무리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지 않느냐? 네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갈수는 없지 않느냐?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아무리 부당하다고 하더라도 학교의 문을 열고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때 저는 학교에서 학사징계를 받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생각해 보니 그 교수님들의 훈계가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이 타락했다고 우리가 세상을 등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 타락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영성은 개인적인 영성과 사회적인 영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부족한 사회적인 영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영성과 정의를 본질적 관계로 보아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회적 불의를 지나치지 않는 예언자적 영성으로서 정의의 영성을 다시금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영성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신자들은 영성과 사회적 정의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회의 구조적 불의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이 신앙과는 무관한 행동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오랜 선입견 때문에 정의의 영성, 예언자적인 영성은 살아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수없이 외친 사회정의에 대한 외침을 듣지 못하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가 정의와 평화의 나라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큰 강둑을 따라 한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하루는 어린아이들이 강가에서 놀다가 세 사람의 몸뚱아리가 떠내려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들은 곧바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고 주민들은 재빠르게 그 세 사람을 건져냈습니다. 
한 사람은 죽었기에 그들은 곧 시체를 화장했고, 한 사람은 살아있기는 했지만 심하게 병들어 있어서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아이였는데 다행히도 건강하게 살아 있어서 곧바로 그를 돌봐줄 가족에게 보냈습니다. 새 가족은 그 아이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매일 강에는 수많은 사람이 떠내려 왔습니다. 선량한 도시의 주민들은 그들을 강에서 구조해 아픈 사람들은 병원으로 보내고, 살아 있는 아이들은 새로운 가족을 만나게 해주었고, 시체들은 화장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이 일은 일년 동안이나 지속됐습니다. 매일 떠내려오는 사람들의 몫도 할당이 되어서 주민들은 그 사람들의 수를 예측할 뿐 아니라 그들을 강가에서 끄집어내고 관리하기 위해 효과적인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예외가 있어서 몇몇 사람은 포기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친절함에 건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친절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체가 떠내려오는 일년 동안 누구 하나 강 위로 올라가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 매일 이토록 많은 시체가 떠내려오고 있는지,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예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의 개인적 자선의 무가치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곧 가난하고 병들고, 또 이유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회에 있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자선을 넘어서 그렇게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변화시켜나가는 행위입니다. 정의의 영성은 구조악에 관심 갖고 그것을 변화시켜내는 힘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회적인 영성을 함양하여 저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 사회의 부조리를 뿌리 뽑아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9절)고 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시는 음행과 우상의 도시로서 음행하는 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접촉하지 않고는 도저히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사회였습니다.

시민들 대다수가 이렇게 세속적인 생활을 했다면 신자들은 그런 세속적인 사회와 단절하고 산속에서나 교회에서 자기들끼리만 교제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면서 불신자들과 음으로 양으로 관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음행하고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관계를 완전히 끊으려면 세상 밖에 나가서 살아야 할 테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10절).

그렇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음행과 탐욕(물질적 욕망), 우상숭배와 모욕(복수하고 비난함), 술취함과 토색(상대방의 소유를 강탈하여 빼앗음)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자들과 접촉하지 말아야 하지만 부득이하게 그들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즉, 세상을 버리고 수도원이나 기도원에 가서 홀로 영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신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세상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악한 세상에 살면서 악한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즉, 우리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회적인 영성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이 악한 세상을 하나님의 진리로 변혁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영성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영성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마5:13-16)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하셨고, 우리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여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죄악에 빠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맛을 잃은 소금이나 발아래 숨겨진 빛입니까?
오늘 한국교회는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물질적 가치관, 세속적인 가치관이 교회의 가치관이 되어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소금이나 빛의 요소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고백했습니다.

바울 같은 성자도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
그러나 사도 바울은 소금과 빛이 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위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체험을 한 뒤에, 아니 그 체험을 매일매일 하면서 소금과 빛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야 우리가 세상에 나가 세상 속에서 거듭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근원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그 근원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불의한 세상 사람들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 가운데 죄에 빠진 자들에게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과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고 가르쳤습니다(11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음행이나 온갖 불의를 행하는 자들과 관계를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몸만 교회에 있지 마음은 전혀 성도가 아닌 자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실로 이런 자들은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이 이런 자들과 교제해서 그 악에 동참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은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강하게 말한 이유는 교회가 신앙과 순수성을 유지하여 죄에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마치 적은 누룩이 전체 반죽 덩어리를 부풀게 하듯 소수의 잘못된 신자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 전체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막을까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얼마 안 되는 신자들 때문에 교회가 파멸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권징이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의 한국 교회의 타락을 부채질 하는 한 원인입니다.

교회 성도들이 순결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그만 파멸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신자 가운데 잘못된 성도들이 예수의 구원의 날에 순결한 신부로 서게 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는 신자들을 징계해야 합니다.
교회가 징계를 하는 것은 징계를 받은 이들을 파멸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다시 올바로 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가 새로 부임하고 보니 집사들이 신자로서 자격이 없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새해가 될 때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면 어떻게 하나 해서 그대로 그들을 집사로 임명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목사는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서 결단하고, 집사로서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지 못하신 분들을 집사임명에서 제외했습니다.
교회가 큰 파동이 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이 모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교회는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워졌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순결성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믿음의 생활을 하고 소금과 빛의 생활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순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참된 성도로서 개인적인 영성과 사회적인 영성을 잘 조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참된 영성에 기초하여 모든 음행과 우상숭배를 버리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 순결한 신자가 되어 하나님께 참된 헌신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병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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