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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들이 하지 않을 때 (왕하 1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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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하지 않을 때 (왕하 12:4-16)        

이순신 장군은 1592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대립각을 세웠던 사람으로 흔히 원 균 장군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본래 두 사람 중 여러 면에서 앞선 사람은 원 균 장군이었습니다. 원 장군은 1540년에 출생하여 이 장군보다 나이도 다섯 살 위고, 군관으로 급제한 것도 훨씬 빠릅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적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용맹무쌍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왜 이순신 장군만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원 균 장군이 그르친 일들을 이순신 장군이 회복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원 균 장군이 경상우수사가 된 지 석 달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당시 원 장군 휘하에는 100척이 넘는 군선이 있었지만, 전쟁 발생 후 얼마 후에는 겨우 세 척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고 일본을 바다에서 차단한 것은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또 나중에 이순신 장군이 투옥된 후 원 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결국 이순신 장군이 복귀하게 되었는데, 그 때는 수백 척의 군선 중 겨우 열두 척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다시 병사들을 추슬러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렇다보니 원 균 장군은 <앞섰지만 실패하여 뒤쳐진 사람>으로 기억되고, 이순신 장군은 <늦게 출발했지만 진정한 승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뒤졌던 사람이 추월하는 일이 많습니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나이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추월하여 그 보다 더 많은 나이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얼마든지 추월 가능합니다. 점원이 사장님보다 사업에 더 크게 성공하는 일, 한 때의 낙제생이 우등생을 능가하는 일,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난 논문을 쓰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작고 가난한 나라가 크고 부유한 나라를 넘어서는 일을 대한민국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영적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 경력이 짧은 사람이 오래 믿은 사람보다 더 깊은 신앙을 가지고, 더 큰 복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작았던 교회가 부흥하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큰 교회보다 더 왕성하게 사명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을 가리켜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비극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상황이 나타납니다. 본문은 남 왕국 유다의 <요아스>왕 당시의 일입니다. 요아스는 왕이 된 후 제사장들에게 한 가지 사명을 부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전 수리가 필요했던 이유는 <아달랴>로 인해 성전이 황폐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엔 설명이 필요합니다. 아달랴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로서 남 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의 며느리가 된 여인입니다. 여호사밧은 의로운 왕이었지만, 평생에 가장 큰 실수는 아합 가문과 사돈을 맺어 아달랴를 며느리로 맞은 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남 왕국은 큰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여호사밧이 죽고 아들인 <여호람>이 왕이 되었는데, 그는 아내 아달랴의 꾀임으로 악한 길을 걷다가 실패한 왕으로 끝났습니다. 그 후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는데, 북 왕국을 방문했다가 북 왕국에서 일어난 변란 중에 살해당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왕위는 아하시야의 아들에게로 넘어가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달랴는 얼마나 악한 여인인지 남편과 아들을 망하게 한 것도 모자라 손자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갓난 왕자 한 명만 간신히 살아남게 되는데, 그가 바로 요아스였습니다. 아달랴는 왕이 되어 유다 왕국을 죄악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온갖 우상을 다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황폐한 채 방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요아스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를 아기 때 숨겼던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세력을 규합하여 아달랴를 죽이고 요아스를 왕좌에 앉게 하여 나라를 바로 세웠습니다. 이리해서 요아스는 겨우 일곱 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요아스가 왕이 되어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온갖 우상들을 파괴하여 없앰과 동시에 성전을 수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요아스가 왕이 된 지 23년이나 흘러 나이 30세가 될 때까지 성전 수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을 맡은 제사장들의 직무 유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바로 이 상황을 보여줍니다. 6절을 보세요. <요아스 왕 제 이십삼 년에 이르도록 제사장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는지라>  이에 요아스 왕은 제사장들을 불러 꾸짖었습니다. 7절 앞부분을 보세요.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렇다면 본래 성전 수리는 어떻게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습니까? 4-5절을 보겠습니다.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성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모든 은 곧 사람이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자에게서 받아들여 성전의 어느 곳이든지 파손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 

성전 수리의 재원은 백성들이 바치는 은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통용하는 은>은 매 사람당 바치는 인두세와 같은 것이었고, <몸값으로 드리는 은>은 레위기 27장에 나오는 서원예물을 말하는 것이고, <자원하여 드리는 은>은 마음에서 우러나 드리는 예물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모은 은은 제사장들이 관리하여 수리하게 했습니다. 5절에 <아는 자>라고 했는데, 이들은 성전 회계 담당자를 지칭합니다. 회계 담당자들이 은을 모아 계산해 두면, 제사장이 받아 필요한 곳을 수리하게 했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제사장들은 그 일을 방치하였습니다. 이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제사장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아론의 후예로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일반인이 입지 않는 에봇을 입고 하나님께 백성들을 대신하여 제사하는 가장 귀한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들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성전을 수리한다고 할 때 누가 제일 기뻐해야 마땅하겠습니까? 당연히 제사장들입니다. 성전은 그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성전 없는 제사장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성전 수리에 열정을 기울여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마땅한 일을 방치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의 직무 유기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화가 난 요아스 왕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이 일에서 손을 떼게 했습니다. 7절 후반부를 보면 이렇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  제사장들은 손을 떼고, 다른 이들이 관리하게 한 것을 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8절을 보세요. <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에게 은을 받지도 아니하고 성전 파손한 것을 수리하지도 아니하기로 동의하니라>  

요아스 왕은 어떻게 했습니까? 9절 이하를 보면 요아스 왕은 헌금함을 만들어 성전문 어귀 제단 옆에 두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함에 은을 넣었고,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이 함을 열어 은의 양을 계산하여 맡은 자에게 넘기고, 그는 실제로 수리를 할 목수, 미장이, 석수에게 넘겨주고, 물자를 사게 했습니다. 이제는 제사장들은 뒤로 물러가고, 왕의 서기를 비롯한 재정 관리자와 현장 일군들의 중요성이 훨씬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제사장들이 성전 수리를 방치하고 수치를 당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존귀하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의 존귀함은 <주어는 것>도 있지만, <만들어가고, 지켜가는 것>도 있습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존귀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이것은 <주어진 존귀>입니다. 그러나 후에 그가 파락호처럼 된다면 사람들은 그를 더 이상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그의 존귀함은 깨어집니다. 그러나 비록 천한 출신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지켜 의를 따르고, 기술과 학문을 연마하여 정도를 걷는다면 사람들은 그를 귀하게 여기고 가르침을 청할 것입니다. 실제로 세종 시대의 <장영실> 같은 과학자나, 선조 시대의 <허준> 같은 의원은 출신은 천하였으나 귀한 삶으로 존귀함을 만들고 지켜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귀한 일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성전을 수리하는 것이 영광스러운 사명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해야 할 아름다운 일이 많습니다. 이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반기를 오늘로 끝내고 내일부터 하반기의 삶을 시작하면서, 삶에 임하는 태도를 이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우선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몇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생각은 있어 말은 하지만, 말에서 멈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있어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역사를 끌고 나가는 주역은 마지막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감동을 줄 때 망설이지 말고,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과 땅 만큼 그 인생에 차이가 나타날 것입니다. 

오래 전 미국 <조지아>주에 <마르타 베리>라는 시골 학교의 교사가 있었습니다. 베리 선생님은 피아노가 낡아 학생들에게 음악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교장 이하 다른 교사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리 선생님은 달랐습니다. 그는 생각만 하지 않고 행동했습니다. 그는 자동차 부호인 <헨리 포드>에게 학교의 피아노 구입을 위해 일천 달러를 기부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가만히 있는 교사들과 편지를 쓰는 베리 선생님은 삶에 임하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얼마 후 포드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봉투 안에는 겨우 10센트가 들어 있었습니다.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는 작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리 선생님은 낙심하지 않고 또 행동했습니다. 그는 10센트로 땅콩을 사서 땅콩농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베리 선생님은 해마다 작은 수확에도 감사하면서 돈을 모았고, 수확의 일부를 편지와 함께 포드에게 보냈습니다. 드디어 5년이 흐른 후 피아노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포드는 감동을 받아 부탁한 돈의 열 배인 일만 달러를 학교 발전 기금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계시지만 않으시고, 실제로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구원하는 위대한 행동을 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 곁으로 찾아가셨고, 위로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거룩한 감동을 주실 때 하십시오. 하반기는 생각만 하거나, 말만 하지 말고, 행동하기 바랍니다. 예배참석, 말씀과 기도생활, 전도하고 봉사하는 사역, 사업하는 일, 공부하는 일 등 등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 등의 공동체에서 마땅히 어떤 일을 해야 할 사람이 하지 않을 때 <왜 하지 않느냐?>고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우리가 하면 됩니다. 그들이 하지 않을 때가 곧 자신의 기회이며, 사명입니다. 다른 이들의 직무 유기와 실패는 자신에게 기회가 됩니다. 


둘째로, 하되 진실하게 열정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는 척 하는 사람>과 <진정으로 열정을 가지고 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설교하는 목사가 빠지기 쉬운 유혹이 있습니다. 청중이 많고 대단하면 설교를 열정적으로 하고, 청중의 숫자가 적은 집회에서는 대충 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도 많은 청중 앞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국의 장로님 수천 명이 모인 전국장로회수련회, 역시 수천 명의 전국 남선교회 회원들이 모인 전국 남선교회연합수련회, 성경 반포의 열정으로 뭉친 장로님, 집사님들 천여 명이 모인 기드온 전국대회 등은 부담스런 설교 자리입니다. 

얼마 전에는 방송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각 지역 극동방송의 운영위원이 되어 기도와 물질로 헌신하는 분들 육백 여명이 모인 극동방송 전국운영위원수련회에서 설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재작년 본 교단 총회에서는 본 교단 전국 노회 대표인 천오백 명의 목사님, 장로님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런 곳에서 설교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분들 앞에서 잘 해야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그런 자리에서는 부담을 갖고 준비해서 잘 하고, 우리교회에서는 우리끼리 있으니 대충 해도 될까요? 더구나 시골의 작은 교회, 할머니 십여 명이 모인 곳에서는 대충 해도 될까요? 그러나 이것은 무서운 사탄의 유혹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최선을 다해 설교해야 합니다. 저는 평소 주일마다 이 자리에 설 때, 다른 어디에서보다 더 충실한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1850년 영국 콜체스터 지역의 한 작은 교회에 예배가 있었습니다. 본래 작은 교회인데다가 그 날은 심한 폭풍까지 몰아치는 날이어서 모인 사람은 겨우 17명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날의 설교자는 목사님도 아닌 교회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사는 대충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여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는 기독교역사에 남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그 날 그 자리에 있던 16세의 소년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 목사가 되었는데, 그 소년은 다름 아닌 지난 수백 년 어간에 최고의 설교자라고 칭송받는 <스펄전> 목사님입니다. 교사 한 분의 열정이 가져온 열매였습니다. 

여러분, 정성껏 열정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더 큰 것을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께서 미국 유학을 갔을 때, 한 가정에서 시간 당 1불을 받기로 하고 청소부가 되었습니다. 그 분은 구석구석까지 자신의 집처럼 최선을 다했습니다. 여덟 시간의 청소를 마치고 집을 떠날 때 주인은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면서 50%가 더한 12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한 마디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청소부가 아니라, 신사요!> 그 후 안 선생님은 비록 하는 일이 천해도 정성을 다하면 귀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길 원합니다. 


셋째로, 끝까지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시작할 때는 열심이지만, 나중엔 흐지부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성전 수리가 끝날 때까지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기까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골인 지점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했습니다. 마치는 게 중요합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 중에 <성실은 마침표가 없고, 나이도, 황혼도 없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실은 멈추어도 좋을 지점이 없습니다. 인생과 신앙의 영역에서 적당히 하고 끝내도 좋을 일은 없습니다. 그 동기가 훌륭하고, 목적이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고,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일이라면 끝까지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제사장들이 제대로 성전 수리를 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돈에 부정이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돈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들은 깨끗하게 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세요. <또 그 은을 받아 일꾼에게 주는 사람들과 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성실히 일을 하였음이라> 아멘. 이게 중요합니다. 아무리 열정적으로 해도 부정하다면, 그 의미는 퇴색할 것입니다.  

성도의 생명은 깨끗함에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정직의 보증수표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 놓고 어떤 일도 맡길 수 있는 신용을 얻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요?  잠시 후 우리가 부를 찬양의 가사에 보면 우리의 존재를 표현하기를 <너의 영혼 우리 볼 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할 선택받은 귀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일어서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길 바랍니다.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이 보인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손짓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상황이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깨닫고,  일어서서 거룩한 일을 하길 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영혼과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길 기대합니다. 열심히 성전 수리에 매진하는 하반기가 되길 원합니다. (김운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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