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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 주머니의 기쁨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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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주머니의 기쁨 (눅 12:13-21)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여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장마와 무더위가 반복되는 쉽지 않는 여름, 8월의 첫 주일 아침, 주님의 전을 찾아 나오신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좋으신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 막아 둔 사람들, 막힌 사람들

지난 달 15일, 노량진 배수지 수몰 사고로 7명이 사망했습니다. 사고는 상수도관 설치 공사를 하던 중 흑석동 상수도관 쪽 맨홀을 통해 한강물이 유입되면서 발생했습니다. 사전에 한강물 유입을 막기 위해 차단막을 설치했었지만 폭우로 늘어난 한강물의 수압을 견디기에는 차단막이 너무 부실했습니다. 6만여 톤의 물이 한꺼번에 상수도관으로 밀려들며 차단막이 터져버렸고 그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1.4Km에 달하는 통로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현재 정확한 원인 규명을 위한 조사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집중호우가 근본 원인이지만 안전불감증과 하도급업체의 무리한 공사 강행에 의한 인재(人災)로 봐야한다는 여론이 많습니다. 그 어떤 산업분야보다 갑을관계가 분명한 공사현장에서 공사기간을 줄일수록 여러 이득을 보는 하도급업체가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하여 제일 말단의 노동자들이 참변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사고에 대한 안타까운 보도들을 접하던 가운데 또 하나의 뉴스가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미납금 추징을 위한 압수수색’. 자택, 친인척의 계좌, 주택, 회사를 수색하고 있다는 보도였습니다. 화면에는 장남이 운영하는 회사의 창고에서 수많은 미술품을 압수하여 트럭에 싣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압수한 미술품은 300여점, 미술관을 하나 채울 수 있는 양이요, 그 작품들이 진품일 때는 그 가격이 수백억대에 이를 것이라 했습니다. 

이 두 가지 보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사고로 인한 공사장 노동자들의 죽음과 전직 대통령의 미납금 추징을 위한 압수수색. 그러나 저에게는 이 두 가지 사건이 깊은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의 어느 한쪽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쌓아두고 있으니 또 다른 한쪽으로는 그 부가 흐르지 않는구나. 이 사회의 수많은 부정축재의 창고 문을 열어 그 부가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할 곳, 사회의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했다면 저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 노동자들이 밥줄이 끊길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열악한 작업현장으로 내몰리는 일은 더 이상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터져야 했던 것은 배수지의 차단막이 아니라 수많은 부정축재의 창고 문이다.

• 인류가 풀어야할 숙제

인류가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숙제들이 있습니다. 먼저, 전쟁이 큰 숙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부터 과학과 기술, 이성과 합리성, 수많은 교육 시스템과 평화적 종교사상을 갖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전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도 지구 어느 한쪽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민족과 국가와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숙제는 분배의 문제입니다. ‘파레토의 법칙’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소위 2:8 법칙이라고도 하는데요. 빌프레도 파레토(1848-1923), 그는 이탈리아의 경제학자로 '이탈리아 인구의 20%가 이탈리아 전체 부의 80%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론은 한 사회의 부를 100으로 보았을 때, 상위 20%의 사람들이 전체 부의 80%를 소유하고 하위 80%의 사람들이 나머지 20%를 나누어 갖는 것이 일반적 사회의 경제구조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 사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는 그런 모습을 지녀왔고 계속 지녀갈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다음의 한 마디 말로 정리했습니다. “인간 사회의 역사는 귀족 계승의 역사다” 물론 오늘날 파레토 이론의 타당성은 계속 논란거리로 남아있습니다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회가 점점 계층적으로 이원화되고 양극화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는 그의 말이 맞는 것처럼 들립니다. 오히려 이제는 2:8 법칙이 아니라 1:9 법칙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입니다. 

현 자본주의의 메카는 당연 뉴욕의 월스트리트일 것입니다. 명실상부 세계 금융의 심장입니다. 세계 유수의 금융기관, 증권 거래소가 밀집해 있습니다. 하루에 그곳에서 유통되는 금액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월스트리트에서 연말에 지급되는 상여금은 300억 달러가 넘습니다. 상여금을 받은 사람들은 그 돈의 대부분을 그림을 사는 데 사용합니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의 그림들을 수십억에 구매합니다. 그들이 미술을 특별히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명작은 시간이 지나면 값이 뛰는데 그 상승의 정도가 은행의 금리보다 좋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재테크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벌 일가도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라는 그림을 비자금 조성을 위해 구매한 바가 있습니다. 300억 달러. 전 세계의 문맹을 퇴치하는 데 드는 비용은 50억 달러입니다.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해서는 80억 달러면 됩니다. 영양실조와 기아를 퇴치하는 데는 190억 달러면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49개국의 부채를 탕감하는 것도 300억 달러면 됩니다. 그런데 해마다 그렇게 큰 돈이 월가의 직원들 집에 그림 한두 점 늘어나는 것으로 사라집니다. 물론 그 일은 해마다 반복됩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인가요? 인간에게 타자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란 존재하는 것일까요? 어느 학자(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전쟁을 ‘이성의 소멸’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만 저는 전쟁만이 아니라 분배의 문제도 ‘이성의 소멸’이라고 명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어느 날 예수님 앞에 한 사람이 나와 청합니다.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하면 유산은 장자가 두 몫을 받고 다른 아들들은 한 몫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와 청을 하는 사람의 말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 형제들 사이에서는 그런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장자 혹은 어떤 한 형제가 정해진 몫 이상을 틀어쥔 채 나누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뭔가 분배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그릇된 분배 문제에 어떤 대답을 내어놓으실까요?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라는 시크한 답변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개역 성경의 번역으로 보면,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분배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으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지금 분배의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문제, 곧 소유의 집착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분배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분배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그에 앞서 소유에 대한 집착의 문제가 풀려야 한다는 말이요, 소유에 대한 집착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분배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한 부자 농부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 부자 농부는 그 해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둡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됩니다. 소출이 너무 많아 기존의 곳간으로는 그것들을 다 보관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궁리하기 시작합니다.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굴리다가 방법을 찾습니다. 그 방법은 기존의 곳간을 헐고 더 큰 곳간을 짓고 거기에 곡식을 쌓아두는 것입니다. 그 묘안을 생각해낸 자신이 대견스러웠는지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몇 년 치는 모아놓았으니 맘 편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살피기 전에 여기서 잠깐 멈추어 생각해보겠습니다. 지금 이 부자 농부의 모습 중 어디 이상한 곳이 있습니까? 어디 잘못 된 부분이 있습니까? 그는 농부로서 일했고 뜻밖의 풍작을 만났습니다. 그가 얻게 된 수입은 소위 합법적입니다. 그는 지금 부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재산을 은닉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땅을 빼앗아 곳간을 새로 지으려는 것도 아니요 자신의 땅에 자신의 곳간을 헐고 좀 더 큰 곳간을 지으려는 것뿐입니다. 기대 이상으로 큰 수익을 얻게 되어 그것을 잘 갈무리해 두어 이전보다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이 농부의 모습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부러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농부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 하나님을 등장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 농부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은 그 부자 농부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하나님께서 어리석다고 이야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으로서 곧 죽을지도 모르며 곳간을 허물고 새롭게 짓는 헛수고를 해서인가요? 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다.” 그 부자 농부가 어리석은 이유는 죽음이 코앞인데 그것도 모르고 헛수고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재물을 자신의 곳간에만 쌓을 뿐 하나님의 곳간에는 쌓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곳간 vs 주머니

하나님의 곳간에 재물을 쌓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오늘 말씀과 이어지는 누가복음 12장 33절과 34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고,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도둑이나 좀의 피해가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 속에 있는 소유욕은 큽니다. 그 힘도 무척 셉니다. 부자 농부의 새로운 큰 곳간은 우리의 소유욕을 상징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이전보다 더 큰 곳간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일 년 용할 양식, 십 년 용할 양식, 자손 대대로 용할 양식을 쌓을 수 있는 곳간 하나 갖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 속에 있는 그 새로운 큰 곳간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이 세상의 정의로운 분배를 일어나지 않을 것이요 파레토의 법칙은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유욕을 상징하는 ‘새로운 큰 곳간’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하늘 주머니’를 제시하십니다. 그 하늘 주머니는 이 땅에 있는 곳간이 아닙니다. 땅의 곳간은 재산 축적을 통해 채워지지만 하늘 주머니는 자선을 통해 채워집니다. 땅의 곳간은 불의의 사고로 피해를 볼 수도 있지만 하늘의 주머니는 한번 채워지면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본능적으로 짓게 되는 ‘땅의 곳간’을 헐고 ‘하늘 주머니’를 마련하고 살았던 분이 예수님이셨으며 그의 제자들이었고 이 세상에 처음으로 생겼던 처음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곳간’의 삶에 저항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부모와 가정과 직장이라는 곳간까지 버리며 ‘하늘 주머니’에 집중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파레토의 2:8법칙’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하늘 주머니’에 넣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공동으로 식사했고, 공동으로 예배했으며, 물건들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살았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의 그런 모습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호감을 가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호감을 가진 이유는 인류의 오랜 숙제, 분배의 문제가 그 교회라는 모임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파레토의 법칙을 깨기 위해, 분배의 정의를 이루기 위해 인위적으로 운동을 벌여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기보다는 소유욕에 대해 신앙과 믿음의 이름으로 답을 찾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유난히 부자와 가난한 자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곳 12장에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가 나오고, 16장에는 지옥에 간 부자와 천국에 간 나사로 이야기, 19장에는 모든 부자들이 따라야할 전형으로 소개되고 있는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맥락에서는 부자는 어리석은 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바라보며 아파하시는 그 아픔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그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형제자매를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눈을 가졌기에 저마다의 곳간을 포기하고 공동의 하늘 주머니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하늘 주머니의 기쁨

고려 말 문인 최해(崔瀣)의 우하(雨荷)라는 시가 있습니다. 우는 비 우, 하는 연꽃 하. ‘빗속의 연꽃’이라 옮길 수 있겠습니다. 

貯椒八百斛(저초팔백곡) 千載笑其愚(천재소기우) 
何如綠玉斗(하여록옥두) 竟日量明珠(경일량명주)

팔백 곡 후추를 쌓아두다니 어리석음 천 년 두고 비웃는도다
어이하여 벽옥으로 됫박을 삼아 종일토록 명주 구슬 되고 또 되나 (정민 역)

이 시에 얽힌 고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나라 때 원재라는 정승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뇌물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가 죽은 뒤 창고를 열자 후추가 800 가마, 기름이 500 병이 나왔고 전량 나라에서 몰수했다고 합니다. 시인 최해는 원재의 탐욕을 꾸짖고 있습니다. 끝없는 것이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원재, 최해가 원재를 떠올리게 된 것은 어느 비오는 날에 연잎을 보면서입니다. 연잎은 그 표면이 방수코팅처리를 해놓은 듯 반질거립니다. 

빗방울이 떨어지면 죽 흐르지 않고 동글동글 구슬이 만들어집니다. 연잎은 자신을 됫박처럼 만들어 빗방울 하나하나를 받고 또 받습니다. 모으고 또 모읍니다. 그래서 모을 만큼 모으면 그것들을 연못에 쏟아내고는 다시 받습니다. 그러기를 비가 그칠 때까지 쉼 없이 반복합니다. 그렇게 끝없이 자신을 채우고 채워도 결국에 아무것도 채우지 못하는 연잎은 평생을 쓰고도 몇 곱절이 남을 만큼의 후추를 쌓아두고 살다 죽은 원재를 떠올리게 만든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 800 가마의 후추를 쌓아둔 창고, 몇 년 치의 곡식을 쌓아둔 창고, 300 점의 미술품이 들어 있는 창고를 가지고 계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잎처럼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는 데 까지 채워보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 가득한 창고를 마음속에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그런 창고, 그 창고가 가득 차 있던 비어 있던 그런 창고가 우리 마음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어리석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창고에 가득 차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그 창고를 가득 채우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자신과 동일시하시는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땅의 곳간은 하늘 주머니가 주는 기쁨을 맛볼 때 허물어집니다. 삭개오는 온통 땅의 곳간에만 정신이 팔려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해 들이게 되고 그의 삶은 변합니다. 그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로 다짐합니다. 남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4배의 과징금을 물어 돌려주기로 합니다. 

성경은(누가복음 19장), 그렇게 변화된 삭개오에 대해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이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라고 하신 말씀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이야기, 기적 같은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 펼쳐집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펼쳐졌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자신의 창고를 열고 내놓은 절반의 재산과 과징금은 그의 도성 여리고에 큰 하늘 주머니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 하늘 주머니가 주는 기쁨을 온 도성 사람들이 다 맛보았을 것이요 그 하늘 주머니를 통해 가장 큰 기쁨을 맛본 사람은 삭개오 본인이었을 것입니다. 

소유욕으로 인한 분배 부정의의 문제는 파레토의 말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후추 팔백 가마를 쌓아두고 살던 원재, 집안 곳곳에 비자금 마련을 위해 수백 점의 그림을 숨기고 사는 전직 대통령의 계보는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계보가 계속될수록 그 막힌 창고가 늘어갈수록 이 땅의 작은 자들의 아픔이 커진다는 것을, 그 작은 자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이 커진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따라야 할 계보는 그런 계보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구세주라 고백했던 초대교인들, 수많은 삭개오들이 이루어왔던 계보, 하늘 주머니의 역사를 이어가야 합니다. 

과부의 두 렙돈처럼 마음을 다해 드리는 정성된 헌금, 어려운 일을 만난 이들을 돕기 위해 내어놓은 후원금, 알아주는 이 없어도 누군가를 돕기 위해 꾸준히 흘리는 땀방울, 불행한 일을 만나 삶의 생기를 잃어버린 이들 곁에 찾아가 그들의 손을 지긋이 잡아주는 손길, 모두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절망하고 있는 이를 찾아가 그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 주는 정감어린 눈빛, … 이 모두가 하늘 주머니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입추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새로운 기운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온통 땅의 곳간에만 집중하며 사는 세상 속에 하늘 주머니가 주는 기쁨을, 그 천국의 기운을 불어넣으며 사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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