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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삭 탄생의 교훈 (창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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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탄생의 교훈 (창 21:1-8)


1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 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 세라 6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7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서론 

사람의 인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인생도 있고 재앙이 되는 인생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인류역사 가운데 위대한 탄생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이삭의 탄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 인간이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탄생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탄생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예수님 탄생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이삭의 탄생입니다. 이삭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성경학자인 아더 핑크가 “이삭의 탄생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중추적인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창 21:2). 아브라함이 앞으로 살아갈 날도 많은데 왜 하필 늙은 아브라함이라고 했느냐?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였습니다. 수명이 아무리 길어도 100세에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이 낳는 것이 불가능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기적적으로 이삭을 낳게 하셨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이 사건이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가 행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을 만천하 사람들이 다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 21:6). 사라가 이삭을 낳고 웃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권사님들 중에 80세에 아이를 낳아서 헌아기도를 받으러 나오면 아마 사람들이 놀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90세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사라는 창세기 18장에도 웃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네가 내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 웃음은 불신앙의 웃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삭을 품에 안고 웃는 웃음은 행복한 웃음이고 기쁨의 웃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기적을 일으키셔서 약속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두 가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사라를 방문(Visitation)하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로 말미암아 사라가 복을 받고 웃었다(Joy)는 것입니다. 

Ⅰ.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Type)하는 이삭 

이삭의 탄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만큼 중요한 사건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비슷합니다. 
첫째, 오래 기다리던 탄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을 받고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중간에 애굽 여인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아 이스마엘이 약속된 자손인가 생각했지만 아니었고, 아브라함이 집에서 기른 종 엘리에셀이 상속자인가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25년이 지나서 이삭을 사라의 품에 안겨주시고, 이삭이 약속의 자손이며 이삭으로부터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이 말라기입니다. 말라기가 기록된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하지도 않으시고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400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데 400년 만에 침례 요한이 나오더니 ‘나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이삭의 탄생 모두 오래 기다리던 탄생이었습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준 탄생이었습니다. 이삭이 탄생하자 사라가 웃고 기뻐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눅 2:10).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큰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해주시고 영생을 주시며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복을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이 복음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사죄와 천국에 들어갈 칭의와 하나님과 화목하는 화친과 영생과 부활과 천국을 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늘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 사람들 중에도 약 400만 명이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합니다. 제가 금요 철야기도회 때도 이야기를 했었는데 윈스턴 처칠 같은 사람도 우울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칠 같이 위대한 사람도 우울증 때문에 마음에 기쁨이 없고 술에 빠져 산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이삭의 탄생도 기쁨을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도 기쁨을 주었습니다. 

셋째, 기적적인 탄생이었습니다. 이삭도 생리적으로 임신할 수 없는 90세의 여인 사라에게서 탄생했고, 예수 그리스도도 자연적으로 임신할 수 없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했습니다. 둘 다 기적적인 탄생인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할 것 같습니까? 여자의 생리가 끊어지면 갱년기가 옵니다. 갱년기가 되면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하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사라도 생리가 끊어지고 갱년기가 와서 생리적으로 임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셔서 이삭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넷째, 탄생할 때 핍박이 따랐습니다. 이삭이 태어나니까 이스마엘이 그를 희롱하였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창 21:9).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을 낳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낳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였으니까 이스마엘은 우리 나이로 15세인 것입니다. 중학생 나이의 이스마엘이 갓 태어난 이삭을 희롱하는 겁니다. 사라가 잠깐만 밖에 나가면 옆구리를 찌르고 한 대 때리고 꼬집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탄생했을 때도 큰 핍박이 임했습니다. 그 당시 헤롯 대왕에게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별을 보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헤롯 대왕이 깜짝 놀라 서기관을 불러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했고 헤롯 대왕은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2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헤롯 대왕에게 당하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요셉의 꿈에 현몽하셔서 애굽으로 피신하라고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셉가족은 애굽에 피신해 있다가 헤롯 대왕과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죽자 나사렛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 칼을 들고 이삭을 죽이려 했고 그 순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준비해두신 어린 양으로 번제를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 11:19). 이삭은 예표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고 예수님은 실체로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방문(Visitation)은 어떠한 방문이었나?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로 탄생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방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사라를 방문했습니다. 하나님이 방문하시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복을 가지고 방문하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을 가지고 방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벌주시기 위해서 하시는 방문이 있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5).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삼사 대에 걸쳐 심판을 가지고 방문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심판을 가지고 방문하시는 일이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방문하신 이유는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친구가 선물을 가지고 방문하듯이 하나님은 사라를 방문하실 때 선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삭이라는 아들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방문하심으로 복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포로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방문하시니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 나오미라는 여자가 자기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민을 갔다가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고 며느리 중 한 명은 모압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베들레헴을 방문하심으로 양식이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은 며느리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방문하시면 해방도 있고 물질의 복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어서 브닌나에게 멸시를 당하던 한나에게 하나님이 방문하시니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선지자를 아들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 되었던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방문하시니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칙령을 발표해서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문은 정해진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문은 미리 앞당길 수도 없고 뒤로 미룰 수도 없습니다. 이삭은 98세도 아니고 102세도 아니고 100세에 태어났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시 102:13).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인생에 몇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몇 번의 방문을 하시는데 언제 그 방문을 하실지는 사람에게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서 오늘은 내게 무슨 복된 방문을 하시겠습니까?’라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복 주시는 날짜를 미리 알려주면 기다리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주님의 재림의 시간을 알려주시지 않는 것도 우리의 유익을 위함인 것입니다. 재림의 시간을 아는 것이 유익하다면 벌써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해놓으신 방문의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매일 하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라에게 복을 가지고 방문하신 것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하나님이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의 집에 방문하셔서 내년에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사라가 장막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듣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 웃음은 불신앙의 웃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라에게 네가 왜 웃느냐며 부드럽게 책망하시니까 그 다음부터 다시는 사라가 불신앙의 웃음을 웃지 않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20장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오누이 사이라고 거짓말했다가 사라가 아비멜렉의 첩이 될 뻔한 위기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방문하셔서 위기에서 건져주십니다. 다시는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8장과 20장의 방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교정해주시는 방문이었습니다. 그 후 창세기 21장에 하나님이 복된 방문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저에게 복을 주십시오. 제게 물질의 복도 주시고 건강의 복도 주시고 자식의 복도 주십시오.” 보통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전에 죄를 고쳐주시는 방문을 먼저 하십니다. 매일 술 먹고 바람피우는 사람이 돈과 건강을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내가 네 술값 대주고 바람 피우도록 돕는 사람인 줄 아느냐?”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복된 방문을 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죄를 고쳐주시고 교정하시는 방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방문하실 때 문을 두드리고 열어달라고 하십니까? 아니면 예배당 천장을 뚫고 내려오십니까? 그렇게 방문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귀신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방문하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하니님의 말씀은 책망과 바르게 하는데 유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되면 우리의 죄가 교정되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 살던 사람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는 말씀을 보고 내일부터는 술을 줄이자는 생각이 들게 되고 바람 피우던 사람도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고 그만두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 성경 한번 펼쳐볼 줄 모르고 “성경 보면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이런 소리만 하시는 분이 있는데 성경을 읽으면 떡도 나오고 밥도 나옵니다. 이번 주 금요 철야기도회에는 정진태 집사님이 간증하십니다. 그분이 대장암, 직장암 등 갖가지 암에 걸려서 의사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병원에 있으면서 성경책을 보고 “아버지, 절 살려주시면 제가 성경을 읽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년에 2번씩 읽었는데 지금 7년째 살아계십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차량안내도 하고 계십니다. 이분이 용인대학을 나와서 운동도 매우 잘하십니다. 그런데 차량안내를 하니까 젊은 사람들이 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욕을 먹어도 괜찮으시냐고 물어보니까 자신이 젊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해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가까이하면 하나님이 복된 방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방문하실 때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방문을 기다려야 됩니까?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 130:5~6). 군대에서 보초를 서 본 사람은 아침이 오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를 알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님이 방문하시는 것을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방문은 사라에게 웃음(Joy)을 주셨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창 21:6~7). 이삭의 출생은 사라에게도 기쁨이 되었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되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 12:15). 여러분,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쉽습니까? 저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쉽다고 생각합니다. 

상을 당한 가정에 가서 유족들이 우는 것을 보면 저도 눈물이 나옵니다. 하지만 남이 잘됐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입니다. 목사들도 남의 교회가 부흥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왠지 배가 아픕니다. 인간은 죄성 때문에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고 함께 기뻐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된 방문을 받으면 복 받은 사람이나 그를 보는 사람이나 모두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결론 

창세기 21장은 하나님의 방문을 받은 사람에게 복과 기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문을 받으려면 먼저 불신앙과 죄악을 처리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떻게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믿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믿는 자는 한강에 빠져도 안 죽습니까? 죽습니다. 믿는 자는 굶어도 살찝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엇을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분명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삭이 탄생할 것이라는 말씀을 믿고 그 믿음으로 이삭을 품에 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없는 문제가 많습니다. ‘내가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잘 될까?’ 하지만 이것에 대한 약속은 없습니다. 사업을 하면 무조건 잘 된다는 약속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데 고시에 합격할 수 있을까?’ 이것도 고시에 분명히 합격한다는 약속이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없는 이런 문제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귀신에 들려서 물에도 뛰어들고 불에도 뛰어들고 경련을 일으키며 거품을 물고 땅에 쓰러지는 것을 보는 아버지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예수님이 아들을 고쳐주신다는 분명한 약속은 없었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막 9:22).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He will” 그분이 하시리라고 믿으십시오. 하지만 하나님이 분명한 약속을 하지 않으셨다면 그래도 “He can” 그분이 하실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사업을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잘 되게 하실 수 있으시다고 믿으십시오. 머리가 나빠도 공부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사법고시에도 합격할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저는 미국에서 1991년도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박사학위를 받을 때 가장 어려운 시험은 지도교수를 포함한 다섯 명의 교수들이 구두로 질문하는 시험입니다. 두 시간 동안 질문하는데 전공분야 전체에서 아무 것이나 물어봅니다. 그래서 미국학생들은 이 구두시험을 'Intimidating'이라고 불렀습니다. '겁을 주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미국학생들도 겁을 먹는데 한국학생인 저에게는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저보다 한주 전에 시험을 친 미국학생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물어봤기에 떨어졌냐고 물어보니까 '동방정교'의 역사에 대해서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방정교에 대해서 5장으로 써서 통째로 외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에게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하고 저는 시험을 보러 갔는데 동방정교의 역사를 이야기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5장 외운 것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더 이상 다른 것을 묻지 않고 통과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구두시험에 합격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없었지만 하나님은 제가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니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복주시면 우리에게 기쁨이 옵니다. 그런데 이 복된 방문을 받으려면 먼저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이 교훈을 받으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복된 방문을 받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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