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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같은 일 다른 마음 (마 6: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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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 다른 마음 (마 6:25-33)

제가 철학을 공부하며 얻게 된 가장 중요한 깨달음 중에 하나는 세상에는 신기한 일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 많은 것들이 생각해 보면 정말 신비롭고 놀라워서 탐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보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질서를 깨닫고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떨어지는 낙엽과 봄에 다시 돋아 나는 새싹들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말을 하는 입과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피아노를 치는 손놀림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걷고 뛰는 다리가, 하늘을 나는 새들의 날개가,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지느러미가 신기하지 않습니까? 세상은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이들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알면 알수록 그 신기로움에 더욱 놀라고 다 알지 못하므로 그 신기함은 더 큰 것입니다.

오늘은 여러 신기한 것들 중에서 사람에 관한 신기한 것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 하나는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알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희한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우리가 같은 책상을 보면 다같이 그 높이와 크기, 색깔과 재질 등에 관해 동일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잠자리가 본다면 우리와는 다르게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자리들끼리는 서로 유사한 정보를 공유하겠지요. 아마도 사람이 가진 지식이 잠자리의 것과 다를 뿐 아니라 월등하게 나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렇게 지으셨습니다. 같은 사물에 대해 유사한 경험을 하게 말입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인간은 언어를 통해 그 경험들을 전달하고 소통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름이 있어서 누군가에 대해 혹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갑돌이에 관해 잘생겼다고 할 수도 있고 소심하다고 할 수도 있고 갑순이를 좋아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갑돌이가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내 말을 듣는 사람은 그 말이 누구에 관한 말인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 듣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능력입니다.

반면에 또 다른 신기한 일은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알고 느낄 뿐만 아니라 각자 서로 다른 것을 알고 느낀다는 점입니다. 같은 물 잔에 물이 반이 차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물잔에 물이 반 들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잔의 크기나 색깔 등에도 다 동일한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물이 반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푸념할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물이 아직 반이나 남아 있지 않으냐”며 만족해 할 수도 있습니다. 내 주머니 돈을 붙들고 안달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돈으로 넉넉하게 베풀고 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동일한 싸구려 이미테이션 반지가 별볼일 없는 물건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금반지보다 소중한 어떤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처지와 환경에 좌절하고 낙담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똑같은 상황에서 소망하고 감사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신기하지 않습니까? 왜 그런지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양하게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물건에 담긴 사람들의 추억과 가치는 존중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또 어떤 것은 버려지거나 금지되어야 하고 또 어떤 것은 찾아지거나 구해져야 합니다. 예컨대 걱정과 염려와 불안과 불평은 버려지고 금해져야 하며 만족과 감사와 믿음은 찾아지고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이라는 사상가는 “사람이 같은 사건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일에도 그 태도와 마음과 영적 상태가 다르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찬송 중에 “나의 갈길 다 가도록”을 보면 2절이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의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하고 되어 있습니다. 

“맛사” 또는 “무리바”라하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맛사”란 시험함을 뜻하고 므리바란 다툼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르비딤에 장막을 쳤을 때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원망하며 불평하며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로 호렙산에 있는 반석을 치게 하사 물이 나오게 했고 백성들이 마시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든 순간이 다가오면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시험하고 의심하고 불평하고 안달하지 않습니까?

이 찬송을 지은 사람은 크로스비라는 여자였는데 앞 못 보는 소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려 9,000여 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쓴 사람입니다. 식모의 불찰로 소경이 되었으나 어려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영의 눈이 열려서 기도하는 중에 신령한 노래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그녀는 시력이 회복되기를 열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한 그분에게 감사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찬양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288 –통204) 2절을 보면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하는 것과 하늘에 영광 보리로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간증은 앞을 못 보는 것에 대한 한탄이 아닙니다. 어려움에 대한 하소연이 아닙니다. 그녀는 하늘의 영광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성령과 피로써 거듭난 자가 가질 수 있는 감사와 자족의 마음이요 간증이요 찬송입니다. 우리가 같은 조건에 산다면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간증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오늘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으로 늘 걱정이 많고 근심이 많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같은 새와 백합화를 보고도 사람들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같은 새를 보고 “맛있겠다” 할 수도 있겠고 어떤 이는 같은 백합화를 보고도 별 생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통해 보이고자 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되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더하게 입히시나니 너희는 이것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8-30)

걱정하고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아무 생각도 말고 계획도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일하지 않고 방만하고 게을러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책임질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안달하는 생각과 마음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안달하고 복달하는 걱정과 염려로는 한 치의 키도 자라게 할 수 없으며 한 시간의 수명도 늘리지 못합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오히려 단축하겠지요. 스트레스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수명을 재촉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자여”하시며 이를 안타까워하십니다. (마 6:30) 

바울도 빌립보서에서 같은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골로새서에서는 "기도와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골4:2)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그러나 다시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맛사”와 “무리바”입니다. 같은 일에 우리는 다른 마음을 품는 존재입니다. 서양격언에도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수학문제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어보는 문제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잊어 버리기 쉽습니다. 똑같은 치유 받은 나병환자 열명 중 감사의 마음을 보인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눅 17:11-19) 

같은 일에도 다른 마음입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을 머리칼을 잡아 끄집어내 살려주었더니 다른 사람들은 상장을 주며 칭찬하는데 정작 살아난 사람은 그때 머리칼이 아파서 혼이 났다고 두고두고 원망하더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대로 은혜를 잊기가 쉽습니다.

시편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절 중에 하나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계십니까? 그분의 성품이 선하시고 인자하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나의 교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게 하심에 감사하십시오. 가끔 병이 듭니까? 나의 약함을 깨닫게 해 주심에 감사하십시오. 외롭습니까? 주님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감사하십시오. 연명하기조차 힘든 상황입니까? 눈물 젖은 빵의 의미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고생스럽고 힘듭니까?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십시오. 아내가 밉습니까? 남편이 믿습니까? 자녀들이 골치를 썩입니까? 큰 사랑을 알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에 감사하십시오. 

손양원 목사를 기억하십니까? 공산당원에게 두 아들을 잃은 목사님이 원망보다는 장례식 때 10가지의 감사 제목을 적어 읽었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두 아들이 미국 유학을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더 좋은 천국으로 데려가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딛전 4:4-5)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6:33) 하셨는데 감사함을 가짐으로 그 나라와 그 의를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소원을 물었는데 고민하다가 결정을 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하나님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네가 필요한 것은 네게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바울에게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후 12:9) 

내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요 이것이 나의 예배입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100:4)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 모두에게 염려와 걱정이 사라지고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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