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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물쭈물 하지 맙시다 (히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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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 하지 맙시다 (히 11:5-6)

운전을 하다 보면 도로를 횡단하던 다람쥐 한 마리가 차에 깔리는 장면을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운전 중에 현장을 목격할 때 급히 브레이크에 발이 가고 움찔하며 운전대에 힘이 들어가기도 하지요. 차에 깔린 다람쥐의 주검을 보면 기분이 좋질 않습니다. 

그런데 도로를 건너는 다람쥐들 중에는 도로 중간쯤까지 달려가다가 차가 오는 것을 보면 몸을 세운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게는 돌아가거나 그냥 가던 길을 가면 될 텐데 우물쭈물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놈들 때문에 운전자들도 많이 놀라지 않습니까? 가끔 그들을 피하려다 사고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에 교회에 오던 중에 아주 담대한 다람쥐를 한 놈을 보았습니다. 이 놈은 차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내 차가 가까이 다가서는데도 그 놈은 다른 녀석들처럼 뒤돌아 가거나 우물쭈물 하지도 않고 그냥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 다림쥐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야, 그 놈 다람쥐 세계에서는 분명히 성공하겠다’고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죄로 관영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 스스로 신실한 믿음의 토대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우리도 선택의 귀로에서 우물쭈물 하다가 화를 당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대적 마귀가 믿는 자를 찾아 넘어뜨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 9). 성도는 믿음을 굳게 하여 영적으로 확고한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영적으로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면 마귀는 여지없이 그를 함정에 빠뜨려 넘어뜨리는 겁니다.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그리고 이어서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밝혔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고 그 하나님이 구하는 자에게 상 주시는 자 이심을 믿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3년간의 사역 중에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상관치 않고 누구든 믿음 있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청을 즉각 들어주셨습니다. 자신을 개로 여겨도 좋으니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어 귀신들려 고생하는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던 가나안 여인을 보시고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15:28)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는 한 백부장이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간청하자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마8:7)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인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백부장이 자신의 하인을 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그의 아픔에 주목한 것을 귀하게 보신 겁니다. 당시 종은 인격이 없는 물건처럼 취급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 그것도 병이 들어 폐품처럼 되어버린 종의 아픔에 진심으로 주목하였습니다. 

기계를 사용하다 고장이 나면 그냥 치워버리듯, 노예가 병들면 치워버리면 그만인 사회에서 백부장은 그 하인에 대해 ‘긍휼’을 베풀었고 그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높은 신분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이 통치하고 있던 식민지의 일개 랍비에 불과한 예수님께 아쉬운 소리까지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예수의 종이라도 되듯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며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의 직위를 내세워 예수를 불러들여 고치라 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는 예를 갖추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그건 매우 특별한 일로써 그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걸 주님께서 알아보시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또 한 번은 유대 회당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이런 요청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마9:18). 이에 예수님께서 지체하지 않고 회당장을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움직인 것도 회당장이 보인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딸의 죽음 앞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에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특히 죽을 딸을 위해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는 요청은 그가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즉시 따라가신 것은 회당장이 그의 권세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즉시 그를 따라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각 사람의 믿음만 보시고 그 사람의 신분이나 배경은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개 취급 받던 이방인이든, 자신을 대적하던 유대인이든, 유대민족을 식민통치하던 원수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에게 믿음이 있는 것만 보시고 그들의 요청에 응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들에게서 믿음을 볼 때 가장 기뻐하시고 그 믿음에 응답해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39:2). 하나님은 요셉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이 그를 거두시어 함께 하신 것입니다. 함께 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는 일에 깊게 관여하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요셉은 비록 종살이를 하는 신세였지만, 주인인 보디발의 은혜를 크게 입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후의 일을 봅시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하나님이 ‘요셉을 위하여’ 그 집에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는 요셉이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믿음만은 흔들림이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을 때, 주님께서 근심하십니다. 그리고 심판하십니다. 한 예로,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불에 던지우리라”(마3:8-10).

요한이 이 말을 스스로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스스로 거룩하다고 하며 다른 사람을 천시하던 사람들을 향해 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한은 “나쁜 열매 맺는 나무는 찍어 버린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불에 던지우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나쁜 열매, 그러니까 적극적인 죄를 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쁜 일하지 않았으니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도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한 바울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경고입니다. 교인들 가운데 신앙생활을 믿음이 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백 퍼센트 판단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우리가 보기에도 믿음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불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에 서 있는가 스스로 시험하고 스스로 확증해야 합니다. 세상 낙에 취해 있다든지, 세상의 낙을 동경하고 세상을 곁눈질 하며 영적으로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나는 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비상식적인 사람을 만날 때나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볼 때 ‘저 사람 머릿속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찬 거야!’ 하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상상을 한 번쯤은 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영화 한 것이 '사토라레’라는 일본 영화입니다. 주인공 사토미 켄이치는 3살 때 겪은 비행기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그 사고로 그는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청년 외과 의사로 나옵니다. 그가 비행기 잔해에 깔려 있다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잔해 속에서 속으로 “엄마, 살려주세요”라고 외친 소리를 구조대원들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그의 생각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게 돼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감추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의사가 된 그는 수많은 환자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의 환자들을 향한 긍휼과 애정이 환자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사람은 열 길 바닷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 중심이 믿음으로 세워졌는지 불신으로 채워졌는지 아십니다. 그리고 그 중심의 내용에 따라 상벌을 내리십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생각을 숨길 수 없는 ‘사토라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과연 어떤 생각이 여러분을 움직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좌정하시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혹시 부끄러운 생각이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을 지배하고 있진 않습니까? 삶에 대한 회의와 두려운 생각이 가득하진 않습니까?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으로 터질 것 같진 않습니까? 세속적 욕망이 불일 듯 일어나고 있진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보다 불신이 크진 않습니까?

하나님은 요셉의 마음 중심에 믿음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로 하여금 ‘복덩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잘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나 때문에 사역이 잘되고, 주의 사람들이 잘되고 행복하고 기쁘고 잘 풀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굳건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도, 직장에서 해고를 당해도, 자신을 두르고 있던 세상의 모든 보호막이 한 순간에 사라져도, 외로움이 밀려오는 상황에서도, 끊임없는 죄의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줄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영적 세계와 세속 세계의 경계 사이에서 우물쭈물 하고 있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 우리의 생각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달려가는 길에 혹 갑작스런 일을 만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가던 길을 계속 가십시오. 어리석은 다람쥐처럼 중간에 서서 우물쭈물 하거나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 하지 마십시오.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상관 말고 가 던 길을 가십시오. 주님께서 두 손 벌려 우리를 안아주시는 그 때까지 한 방향으로만 나가십시오. 주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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