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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 (창 17:15-19, 창 18: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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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 (창 17:15-19, 창 18:9-15)

창세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볼수록 아브라함의 믿음보다는 부족함, 거듭되는 실수, 연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참으시면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더 돋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라가 아들을 갖게 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함이요 또 다른 목적은 죄악이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90세가 되어 생리가 멈춘 할머니가 아이를 가지는 것이나 그 큰 성읍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것은 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다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용납하시면서 그들의 믿음을 세워 주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용납하시고 복을 주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입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좀더 인격적으로 만나시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삶 속에서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작정하신 하나님의 때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한지 25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앞으로 25년 있다가 약속이 실현이 될 테니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말을 하셨습니까? 아니오. 그저 믿음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브람은 십여 년쯤 기다리다 지치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이 가진 신앙의 한계를 넘어선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사라의 몸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바라던 아들인 이스마엘로 얻은 것으로 만족하며 13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가운데 낳은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저 인간적인 조급함 때문에 태어난 아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25년째가 되면 사라가 저절로 이삭을 낳게 됩니까? 아니지요. 동침을 해야지요. 아브람과 사라는 자기들 사이에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포기한 상황입니다. 그런 그들이 아이를 가져보겠다고 동침을 시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약속 시행 일 년을 남기고 언약은 잊어버린 채 하나님 보시기에 별로 의미 없는 살아가던 아브람을 깨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살았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사라 사이에 자식을 가질 것을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타나신 하나님은 당신을 ‘엘 샤다이’로 소개하십니다. 온 창조세계의 주관자이시며 번성케하고 창대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시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심히 창대하게 하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에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아브람의 경배를 받으신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람(존귀한 아버지)에서 ‘아브라함’ (많은 무리의 아버지)으로 바뀝니다. 아브라함으로 한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실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여러 민족과 왕들이 나올 것이며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도 대대로 이어지는 영원한 언약임을 선포하십니다. ‘영원한 언약’은 후손의 약속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의 약속을 포함합니다. 지금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에 불과하지만 때가 되면 그 땅을 영원한 소유로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어 주신 하나님께서 사래의 이름을 또한 바꾸어 주십니다. “사래”의 뜻은 'my princess'(나의 공주). 자식을 낳지 못함을 인하여 사래가 마음고생도 많았겠지만, 아브라함은 아내를 여전히 ‘나의 공주’라 부르며 자기의 변함없는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사라’의 의미는 ‘나의’라는 소유격이 빠져서 그냥 공주입니다. 사라는 이제 아브라함의 공주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주,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인정받는 열국의 어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라도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에 참여하는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라의 출산을 이렇게 늦추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사라의 나이가 89세입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출산이 불가능한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는 사라가 더욱 겸손하여져서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을 준비를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라가 65세가 되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애굽 백성들은 물론 바로도 첫눈에 반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사라는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아브라함의 존귀한 부인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남부러울 것 없는 사라였지만 자식 이야기만 나오면 주눅이 들었습니다. 아이 없음을 인하여 오랜 세월 동안 마음고생을 하게 되고 심지어 자기가 데리고 있던 계집종이 남편의 아이를 갖자 그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라가 더 이상 자기의 외모, 재산,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원하셨습니다. 

17장 16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또 복을 주어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게 하신다고 합니다. ‘복을 준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사라가 연단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담을만한 큰 그릇을 준비하기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아이를 낳는다는 약속을 주시고 아이 이름도 이삭이라 지어주셨지만 아브라함은 덤덤합니다. 이미 너무 오래 기다리다가 지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었습니다. 그가 왜 엎드렸습니까? 하나님께 경배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가 왜 웃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배하기 위해 엎드렸는데 불신앙의 웃음을 흘리고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예배자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다니요? 어찌 출산하리요?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어렵다는 겁니다. 아니 내 나이 백 살이고 아내 나이 90살인데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공연히 일을 벌이지 마세요. 이스마엘도 내 자식인데 이 아이나 데리고 살렵니다.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제안합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하나님보다 더 똑똑한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진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우리 수준으로 제한하는 허상일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모습을 보입니다. 아직도 자기가 이해되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믿어지는 한도 내에서만 믿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진 인간적인 믿음을 포기하게 하시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버리게 하시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반드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약의 자손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 태어나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원하든지 원치 아니하든지 상관없이 그를 통하여 약속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징표로서 아브라함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할례 자체가 언약 백성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요 할례는 외적인 표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남자이면, 이방인이든, 노예이든 예외 없이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누구든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임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비롯한 그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계산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인간적인 믿음과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믿음으로 할례를 행함으로써 인간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약속의 자녀가 믿음에 기초하여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믿음이 끝나야 하나님의 믿음이 시작됩니다. 이제부터 즉각적인 순종은 아브라함의 삶의 특징이 됩니다.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십니다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은 이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곳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12:7; 13:18). 창세기 17:22에서 말씀을 하시고 떠나셨던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러 번 찾아오셨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형상은 볼 수 없었고 그의 말씀만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처음으로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셨습니다. 때는 오정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대낮은 볕이 따갑고 덥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장막 문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 즉, 내년 이 맘 때에 자기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하신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인기척을 느껴 눈을 들어보니 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직감적으로 자기 앞에 서 계신 이들이 예사로운 인물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몸을 땅에 굽히며 그들을 영접합니다. 

창 18:3,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이 말은 아브라함이 그들에 대한 단순한 존경심이나 극진한 손님 접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발 씻을 물을 가져올 테니 나무 아래서 쉬기를 구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백 살이 다 된 할아버지가 손 대접을 잘 해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땀을 흘립니다. 

아브라함은 급히 장막에 들어갑니다. 사라에게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하인에게는 급히 요리하라고 합니다. 순식간에 손님들을 위한 식탁이 마련되고 버터와 우유, 그리고 요리한 음식으로 정성껏 그들을 대접합니다. 그들이 식사하는 동안 아브라함은 그들 곁에 서서 시중을 듭니다. 곧, 급히, 속히, 달려가서 이런 표현들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자기에게 손님들을 귀하게 여기고, 온 힘을 다하여 섬기려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변했습니다. 그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끝까지 용납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받은 사랑을 표현합니다. 


사라의 믿음을 세우십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은 후에 찾아온 세 사람은 찾아온 목적을 밝힙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 말씀은 지난 24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을 듣고 잠잠합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아브라함의 믿음까지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오신 것은 사라의 믿음을 붙들어주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 내용을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듣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에그 망칙해라 내 나이 몇 살인데 아이를 가진다고 하시지? 

이미 하나님은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사라가 하나님을 믿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아직 제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경험을 더 의지하려는 사라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부부가 오래 살면 생각, 외모도 닮아간다는데 사라의 반응은 아브라함의 반응과 어찌 그리 같은지요? 하나님이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었습니다. 자식을 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하여 웃는 것이 아니라, 못미더워 웃은 것입니다. 사라도 일 년 뒤에 아들을 품에 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문 뒤에서 몰래 웃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시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이 말씀도 들었습니다. 자기의 불신앙적인 행동을 들킨 사라는 두려움 속에서 자기가 웃은 사실을 부인합니다.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아마 무안해서 얼굴이 빨개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니야 네가 웃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안 웃었다고 우기는 사라에게 왜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까? 단지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라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믿지 않는다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동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라는 약속의 자녀를 낳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신 분이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임을 사라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원하십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건을 가능케 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인 것을 보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사라의 마음속에는 신앙과 불신앙이 서로 다투었을 것이다. 결국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사라의 모습이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히 11:11). 불신앙이었을 때는 속으로 웃었으나 믿음으로 이삭을 낳은 후에“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이삭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부부의 합작품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것과 같은 그들의 몸에 능력을 베푸셔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치유하셨고 아브라함 부부도 자식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붙들었을 때에 아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계산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 부부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롬 4:18-22, 아브라함이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사실 아브라함이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믿음을 칭찬하시고 의로 여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섭섭하게 한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두고두고 원망하거나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던져버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 죄악 된 부분을 기억하며 몰아세우기보다 비록 적지만 좋은 부분, 긍정적인 부분을 드러내시며 칭찬하시며 당신의 풍성하신 사랑을 베푸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게 된 것은 몇 십 년 동안 드린 기도의 응답입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오래 전에 자식에 대한 꿈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큰 민족은 고사하고 당장 자식 하나 없으니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약속이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하면서 자기가 데리고 있던 하인인 엘리에셀을 자기의 상속자로 삼으려던 계획을 가진 적도 있었습니다. 사라도 기다리다 지쳐서 자기의 몸종인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서 대를 잇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삭을 가지게 된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시고 당신의 약속을 새롭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세워주셨습니다. 이러한 끈질긴 하나님의 사랑,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불가능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17장에서 당신을‘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하십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하신 분인지 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떠한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그 일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귀신들려 툭하면 심히 경련을 일으키며 땅에 엎드러져 거품을 흘리던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와 함께 예수님께 와서 고쳐달라고 부탁합니다.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우소서”(9:22) 

부탁을 하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아이를 반드시 치유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없었고 그저 아이를 고치기 위하여 나름대로 무엇인가 시도해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우리말 번역에는‘무슨 말이냐’는 표현이 추가로 붙어있지만 원문에는 단순히 ‘할 수 있냐구’(If you can?)로 되어 있습니다. 순간 자기의 부족한 믿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깨달아집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에 대하여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말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I do believe; help me overcome my unbelief!")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진짜 문제는 자기 아들이 아니라 자신인 것을 발견합니다. 이제 기도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조금 전까지 “내 아들의 귀신 들린 것을 고쳐주옵소서” 부탁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에게 믿음을 달라고 매달립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치유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데 문제는 본인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치유 뿐 아니라 그 아버지의 믿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질병의 치료는 잠깐으로 그치지만 믿음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중심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사라는 하나님께 웃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속으로 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우리도 겉으로는 멀쩡한 크리스천 같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의심하고 딴 생각하며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3). 

우리의 죄를 부인한다고 감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부인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주님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영권이 회복되어야 인권과 물권이 회복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3) 당신의 뜻대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두 사람 사이에 난 약속의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 사라는 열국의 어미가 될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는 통로로 사용하시려고 두 사람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이 믿어지는 부분만 믿으면서 온전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들을 훈련시켜서 결국 믿음의 사람들로 만드시고 그들을 통하여 이삭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4) 당신의 때에 이루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한때 기다리기도 했지만 오 년이 가고 십 년이 가도 그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는 아브라함 부부가 가나안에 도착한지 25년째가 되는 해에 약속의 아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24년째가 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차례로 나타나시면서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강하게 하시며 여호와는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깨닫게 합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골방에 틀어박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새겨볼 뿐 아니라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기다림의 과정 자체가 믿음의 훈련기간이요, 하나님이 주실 복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사업하는 것이 쉽습니까? 자녀 키우는 것이 쉽습니까? 교회당 마련하는 것이 쉽습니까?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들며 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선한 뜻을 품고 계신 것을 어떤 형편이나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붙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고 사는지를 시험하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십니다. 우리 모두가 문제에만 빠져있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기 원하십니다. 능치 못함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기도합시다. 주님을 붙잡으세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거든 기쁨으로 주님을 헌신하는 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함께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사역에 동참하며 예비하신 귀한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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