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1-9)

첨부 1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1-9) 
 

오늘은 설이 되어 고향을 찾아간 성도님들이 많습니다. 설날 아침에는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입니다. 어른들은 자손들의 절을 받고서 복을 빌어줍니다. ‘올해에는 더욱 건강하거라’ ‘사업이 잘되길 바란다’ ‘아들을 낳기 바란다’ 등등 축복합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의 족장들이 자녀들에게 복을 빌어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그의 세 아들에게 복을 빌어주었고,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삭은 야곱에게, 야곱은 열 두 아들에게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위인들은 단순히 축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설날 아침에 막연히 복을 빌어주는 것과 다릅니다. 그렇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복을 빌어 준다는 것은 무언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신적 존재를 염두에 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 소경이어서 자기들의 호흡을 주관하시며 복과 화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아닌 우상에게 복을 빕니다. 그런 점에서, 창조주이시며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게 된 것처럼 큰 복이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틀어서 아브라함처럼 큰 복을 받은 사람은 달리 없습니다. 그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큰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아랍 민족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의 23억이 넘는 기독교인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았으며, 그 이름이 창대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천하 만민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 같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까닭이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다 그곳에 거주했습니다.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1)…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순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가문의 장남으로서 늙으신 아버지를 두고 떠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일가친척을 떠나는 것도 쉽게 결정을 내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히브리서 11:8에 보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에 갈지라도 사전에 충분한 자료를 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통이 발달해서 어느 나라든 짧은 시일 안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입니다. 교통수단이라고 해야 노새나 나귀가 고작이었던 시대입니다. 요즘처럼 잘 닦인 도로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강이나 계곡에 다리가 건설되지도 않았으므로 산 넘고 물 건너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모든 장애를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떠나는 편을 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기쁘게 여기시고 약속하신 대로 그에게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사례는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나 그 약속은 10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내 여종과 동침하세요. 그 몸에서라도 아들을 얻어 대를 이었으면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사라의 뜻을 받아들여서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였습니다. 그러나 여종을 통하여 아들을 낳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마엘 역시 아브라함의 자식이지만 약속의 계승자가 될 자격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가 낳을 아들만이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은 백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드디어 이삭이 젖을 뗄 때가 되었고, 이를 축하하는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 여종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그 계집종과 아들을 내쫓으세요. 그 계집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비록 여종을 통해서 낳았지만 이스마엘도 자기 자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양식 얼마와 물 한 부대를 하갈에게 메어주고 아이를 데리고 나가게 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혈육의 정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순종을 말할 때 빼어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이삭이 20살쯤 되었을 때라고 봅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에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백세에 낳은 아들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이 죽은 것 같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낳은 하나 뿐인 아들이지 않습니까? 더구나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할 아들입니다. 만일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바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께 항의도 하고, 납득할만한 설명을 요구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2장 3절에 보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서 지체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사라와 상의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내와 상의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가 사라가 결사반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삼일 길을 걸어서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산 아래 당도했습니다. 종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번제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을 올라갔습니다. 

이삭이 “아버지”하고 불렀습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 급박한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자가 말하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친 이 일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으로서 자격을 온전히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하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복 받기를 원하면서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쉬운 것은 순종하지만 어려운 것은 미적거리거나 모른 척 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순종하려면 결단이 필요합니다.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핍박 받고 비난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하고, 비난도 받지 않으려고 하니까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택할 것이냐 현실적인 이익을 택할 것이냐,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는 데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변명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그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고, 그 결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기 원하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손해가 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십시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받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예배생활에 힘썼습니다.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았습니다. 또한 그가 세겜을 떠나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쳤을 때에도 그곳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3:18에 보면, 아브라함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기 머물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았으며, 창세기 21:33에 보면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요즘 기독교인 가운데 예배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배란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에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일상의 바쁜 일들을 다 하고나서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러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합니다. 

성도들에게 예배는 모든 일에 우선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고 나서 다른 일들을 해야 합니다. 다른 일을 다하고 나서 남는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맨 먼저 하나님께 드릴 시간을 내어놓고 그 다음에 다른 일들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른 태도입니다. 

우리의 신앙 수준은 예배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배에 힘쓰는 성도는 믿음이 자랍니다. 그 이유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반면에 예배를 등한히 하고 예배 시간을 지루하게 여기는 신자는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지 못하므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처럼 예배에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우리 생활의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주일 예배는 물론 성수해야 하지만, 주중 예배에도 참석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교회의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 심령에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그리고 가능한대로 가정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긴 시간을 낼 수 없더라도 한 15분이나 20분 동안 간단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정 예배를 생활화할 때 집안 분위기가 은혜롭게 바뀌게 되는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기 1장을 보면, 욥이 큰 재앙을 당했습니다. 열 자녀가 몰사하고, 모든 가축을 약탈당했습니다. 욥은 그 같은 비보를 전해 들었을 때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무슨 일을 만나든지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은혜로 인도해 주십니다. 

시편 50:23에 이르기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감사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예배하는 자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어느 곳으로 옮겨가서 머물 때면 먼저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그 곳에서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는 뜻을 표명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주변에 사는 가나안 족속들이 감히 아브라함을 해치지 못했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방백으로서 존경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을 힘쓰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아브라함은 온전한 인내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무엇보다도 인내를 잘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려면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사업을 할 때에도 인내를 잘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가정을 화목하게 가꾸어 가는데도 인내를 잘해야 합니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는 격언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인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간혹 보면, 기도해 보아도 소용이 없더라, 하나님을 믿어도 복을 받지 못하더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체가 그들의 믿음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진실한 믿음은 인내를 수반합니다. 마치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와 같이 믿음과 인내는 언제나 함께 합니다. 그러나 순서를 말하자면 믿음이 먼저이고 인내가 그 다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인내를 통해서 더욱 온전한 믿음으로 자라게 됩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1장에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는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를 온전히 이룰 때 조금도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고도 원만한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5:7-11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농부는 밭에 씨를 뿌려놓고서 싹이 나기를 기다립니다. 싹이 자라고 열매 맺기까지 오래 참고 기다립니다. 어린 자녀를 양육할 때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린 자녀가 자주 실수를 저질러도 참아줍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성숙한 인격체로 자라날 것을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아 줍니다.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시련과 핍박을 인내로써 이겨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은 그가 인내에 성공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독자 이삭을 얻기 위해 무려 25년 동안을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기 때문에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에도 인내를 나타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는 곳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삼일 길을 가야 합니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있듯이, 그 삼일은 아마 몇 달,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마음속에 온갖 갈등이 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삼일 길을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어떻게 그처럼 인내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9에 보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과 인내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인내를 테스트 하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인내를 테스트 하는 것은 곧 우리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 믿음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테스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인내로써 성도님들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성도님들의 삶속에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1절에 보면,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혈통 상으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과 아랍 민족의 조상이지,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의 조상입니다. 이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3장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믿음으로 된 것은 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신하는 유대인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이라도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로 인정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고, 예배 중심으로 살며, 믿음으로 온전한 인내를 이루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