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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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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10)
  
사람이든 사물이든 위치가 중요합니다. 제자리에 있으면 아름답고 귀합니다. 그런데 제자리에서 이탈하면 문제가 생기고 잘못됩니다. 예를 들어 물속에 사는 고래를 육지에 갖다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크고 강한 고래라도 머지않아 죽고 말 겁니다. 반대로 사자를 물속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밀림의 왕자라도 죽고 말 겁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남편의 자리에, 아내는 아내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만약 가정을 떠나 엉뚱한 데에 가 있으면 큰일 납니다. 학생은 학교에 있어야 하는 데 엉뚱하게 술집에 가 있으면 망합니다. 군인은 부대에 있어야 하는데 탈영하면 완전히 신세를 망치게 됩니다.

영적으로 볼 때 인간도 마찬가지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만일 제자리에서 이탈하면 온갖 문제가 생기고 비극적인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 인간의 제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품 안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간단히 말해서 인간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겁니다. 즉 하나님 품 안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럴 때 모든 문제가 하나하나 해결됩니다. 

오늘 본문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자리에서 떠나간 사건의 기록입니다. 그로 인해 그들에게 온갖 비극적인 일들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제자리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오늘 이 시간 다시 한번 하나님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제자리를 찾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회복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본문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자리에서 이탈하게 됐는지 살펴보죠.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선악과를 세워놓고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만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따먹고 맙니다. 그것은 인간이 제자리를 망각하고 이탈한 행위였습니다. 왜 그런지 그 증거가 5절에 있습니다. 뱀이, 정확하게 말하면 뱀 속에 들어가 역사한 사탄이 여자에게 접근해서 한 말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여자는 이 말을 듣고 그만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도 줍니다. 이게 바로 제자리에서 이탈한 겁니다. 자신이 피조물인 것을 망각하고 감히 창조주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하죠. 오히려 제자리도 지키지 못하고 추락합니다. 

8절 보면, 그들의 영적 이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제 그들은 범죄함으로 하나님 품 안에서 벗어났습니다. 제자리에서 멀리 벗어나 버린 겁니다. 이른바 영적인 위치 이탈입니다.  

[1] 아담과 하와의 타락 : 영적인 위치 이탈과 그 결과 
  
그 결과 그들에게 비극과 불행이 닥치게 됩니다. 본래 그들의 자리였던 하나님의 품 안에서 누리던 모든 은혜를 상실합니다. 그리고 엉뚱한 자리로 떨어집니다.  

① ‘생명의 자리’에서 ‘사망의 자리’로 : 

하나님께서 아담 부부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 안에 모든 열매를 먹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제한을 두셨습니다. 창2:16~17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임의로 먹으라는 것은 자유의지를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습니다. 무한 자유를 제한한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왜 그런가요?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인식시켜주면서, 만일 그 경계를 침범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 품을 이미 떠난 겁니다. 영적 위치 이탈이죠. 그 결과 어떻게 됐나요? 살았나요? 죽었나요?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사망에 대해 알아 봐야 합니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사망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생물학적 사망과 다릅니다. 일반적으로는 숨이 끊어지는 것을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성경의 사망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망에는 세 가지 종류인데, 그 공통점은 ‘분리’(separation)입니다. 영적인 사망, 육적인 사망, 영원한 사망 등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는데, 육체가 숨을 쉬고 살아 있어도 그 영혼이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면 그 영혼은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이게 영적 사망입니다. 육적인 사망은 육체가 수명을 다하고 숨이 끊어질 때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일반적인, 생물학적인 사망과 일치함)을 말합니다. 영원한 사망은 육체 죽음 이후 하나님과 천국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생각해 보죠.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고 살아 있나요? 죽었나요? 10절.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육체는 숨을 쉬고 멀쩡히 살아 있죠. 그러나 그 영혼은 죄로 인해 이미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나시니까 두려워하고 피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영적인 사망으로 떨어진 겁니다.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말씀 가운데 3:19절(하)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건 뭔가요? 육적인 사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죠.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육적인 사망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 영원한 사망이 주어집니다. 계20:13~14 “13 ...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여기서 ‘둘째 사망’이라 함은 육적인 사망을 첫째로 볼 때 그 후에 또 한번의 사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히 천국에서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지옥의 불못(the Lake of Fire)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망은 존재의 끝이 아닙니다. 다른 모습으로 계속 존재하는데, 그것은 영원한 고통입니다. 

② ‘축복의 자리’에서 ‘저주의 자리’로 :

아담과 여자가 거주하던 에덴동산은 문자 그대로 ‘기쁨의 동산’입니다. ‘에덴’이란 이름은 ‘기쁨’이란 뜻입니다. 강물이 흘러넘치고, 온갖 열매가 가득한 풍요로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후 어떻게 됐나요? 저주가 임합니다. 3: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는 잉태와 해산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부부 관계의 갈등이 생기고, 남자가 여자를 존중하는 대신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어서 3:17절을 보면 남자에게 저주가 임합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인간의 범죄 이전에도 에덴동산에서 경작하며 노동을 했지만, 그 때는 노동의 즐거움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야 겨우 먹고 살 수 있게 된 겁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이 잘 살아 보겠다고 힘쓰고 애쓰고 바동거리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죠. 게다가 별의 별 사건과 사고, 우환이 끊이지 않죠. 하나님 안에 있는 축복을 상실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게 다 영적 이탈의 결과입니다. 

③ ‘영광의 자리’에서 ‘수치의 자리’로 :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한 마디로 만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이것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영광입니다. 

이런 영광을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8:5~6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 만물을 통치하는 영광스런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면서 어떻게 됐나요? 수치스런 존재가 됩니다. 본문 7절을 보세요.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눈이 밝아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지혜로워진 것이 아니라, 죄의식이 생긴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치마로 몸을 가린 겁니다. 죄는 인간을 수치스럽게 합니다. 범죄자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갈 때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얼굴을 가립니다.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그 뜻대로 살고 크든 작든 사명을 감당하면 존귀합니다. 영광스럽습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 먹고 마시면 추하고 수치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두운데서 몰래 죄를 짓잖아요. 자신도 죄를 지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알아요. 그런데 죄에 붙잡혀 있는 거죠. 

이런 말이 있어요. 인간은 천사과 마귀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천사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고, 죄를 지으며 살면 짐승만도 못하고 마귀 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면 더 나아가 피조물도 난리가 납니다. 3:18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 ”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연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짓고 타락한 후엔, 피조세계(자연계)를 다스리는 능력이 부족해졌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자연계로 인해 많은 괴로움을 겪게 됐습니다. 돌연변이 같은 게 자꾸 생겨나는 겁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생겨나고, 오늘날 공해 문제로 인해 각종 재해가 증가하는 것도 그런 차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제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까? 인간의 모든 비극은 영적인 제 자리 즉 하나님 품 안에서 이탈한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해법이 나옵니까? 인간의 모든 문제는 영적인 제자리를 찾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겨울에 눈이 쌓일 때 제설 작업을 하려면 얼마나 힘듭니까? 미국의 어느 도시는 눈을 잘 치우면 시장에 재선되고, 잘 치우지 못하면 낙선된다고 합니다. 눈 치우는 게 얼마나 어려우면 이렇겠습니까? 인간이 눈을 치우려면 이렇게 어렵지만, 해가 뜨고 기온이 올라가면 저절로 녹아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이런 저런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고 힘쓰고 애쓰지만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나아오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쪼여지면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순조롭게 해결됩니다. 


[2]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다행히 하나님은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에게, 영적 위치 이탈을 해버린 인간에게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인간은 범죄하고 하나님을 피하고 멀리멀리 도망가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부르십니다. 

8절~9절.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는 단순한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수사적 질문입니다. 정말로 몰라서도 아니고, 또 어떤 공간적인 위치를 물어보는 것도 아닙니다.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 자신이 비참한 영적 상태를 깨우쳐 주기 위한 교훈적 질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어서 돌아오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뭔가요? “아담아, 너 왜 거기 있는 거니? 얼른 내게로 와라!” 이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돌아올 수 있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영적으로 무지해져서 하나님도 몰라보고, 설사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오는 길을 모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즉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에게, 정확하게 말하면 사탄에게 하신 말씀이죠.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십자가 고난을 통해 사탄을 파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선포하십니다. 십자가 복음을 최초로 밝히신 것으로 이를 가리켜 흔히 ‘원시복음’이라 부릅니다.

그 길은 창3:20~21에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은 최초의 복음을 듣고 아내의 이름을 하와로 지어줍니다. 하와는 ‘생명’이란 뜻입니다. 여자의 후손의 구원을 믿기에 여자를 생명으로 부른 겁니다. 그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십니다. 무화과 나뭇잎을 갖고 만든 치마는 수치를 가릴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로 가린다는 말이 곧 속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가죽옷으로 속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죄 없는 짐승이 피 흘려 죽어야 합니다. 여기서 대속의 원리가 나옵니다. 구약 시대 제사 보면 짐승 잡아 피를 흘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십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킨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이제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은 성도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 이제 예수님에 나아가면,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면 인간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영적인 제 자리를 찾으면 육적으로 모든 면에서도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평안과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간절히 우리 모든 인간에게 호소합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탕자의 비유(눅15:11~32)를 보면 영적으로 제자리를 찾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탕자입니다. 아버지 유산을 가불해서 가출합니다. 제자리를 박차고 이탈한 겁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잘 살 줄 알았죠. 

그러나 그 때부터 비극이 시작됩니다. 결국 쫄딱 망한 후 돼지를 치게 됐는데, 설상가상으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얻어먹지 못합니다. 그제서 아버지 집을 기억하고 돌아갑니다. 탕자가 딱 한 가지 잘 한 게 이겁니다. 회개! 탕자가 돌아가는데, 매일  동구 밖에 나와 기다리던 아버지가 멀리서 알아보고 얼싸안고 난리가 납니다. 집으로 데려온 후에는 어떻게 되죠? 

눅15:22~24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탈했다가 아버지에게 돌아오니까 다 해결됐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수치에서 영광으로 회복됩니다. 

세계적인 문호 빅토르 위고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생애는 1841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인생이 변화됩니다. 비유하면 B.C.와 A.D.입니다. 원래 그는 주색에 빠져있던 방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19세 딸이 강물에 빠져 죽는 익사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 딸이 남긴 유서가 발견됩니다. “아빠! 제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세요!” 빅토르 위고는 딸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울부짖습니다. 

그 후 그는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삽니다. 절필하고 후생국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러다 말년에 다시 작품을 쓰게 되는데, 그때 쓴 작품들이 그를 세계적인 문호로 만들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레미제라블(일명 쟝발장)입니다. 그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크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별세하자 그 장례를 정부에서 국장으로 치렀는데 애도하는 국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영적으로 제자리를 찾음으로 생명과 축복, 그리고 영광을 얻은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생은 60부터!” 그러나 사실은 이게 진짜입니다. “인생은 십자가부터!”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그때부터 플러스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영적인 제자리를 잡으십시오. 이미 잡으셨으면 다시는 이탈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은 자꾸 하나님에게서 이탈하도록 부추깁니다. 늘 경성하며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우리 마음속에 울리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영적인 제자리를 지키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항상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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