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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이나 손을 탓하지 말라 (마 5: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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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나 손을 탓하지 말라 (마 5:27-30)

제가 어렸을 때 하루는 어머니가 저를 부르시더니 석간신문에 실린 기사 하나를 보여주셨습니다. 아주 짧은 기사였는데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어느 청년이 자신에게 자꾸 정욕이 생기는 것에 대하여 죄의식을 느낀 나머지 자기의 몸을 자해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제 어머니가 그 기사를 저에게 보여주신 이유는 ‘너는 절대로 이런 일을 하면 안 된다.’ 

이걸 당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저는 사춘기가 시작되기 이전이었고 예수님을 믿기도 이전이었는데 왜 어머니가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필요를 느끼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한 것입니다. 아마 노파심 때문에 그러셨던가 아니면 그것이 예언의 은사였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신문에 보도가 된 적이 있는데 오늘 본문에 실린 예수님의 말씀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경악심을 불러일으킬만한 말씀입니다.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말씀이에요. 신문에 보도된 그 청년이 이 구절을 어떻게 자기에게 적용시키려고 했는지 충분히 납득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는 모종의 충격을 주기 위함이고 충격을 통하여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지 문자 그대로 손을 잘라라, 눈을 빼라,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의 눈이나 사람의 손이 사람을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은 아니에요. 눈은 죄가 없습니다. 뜬 눈으로 보는데 무슨 잘못이 있다는 얘기입니까. 숨겨진 것을 찾아보는 것도 아니고 내 앞에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는데 어떻게 그것이 눈의 잘못이 되겠습니까. 사람이 듣고 싶은 것을 듣는 게 아니고 들리는 것을 듣는 것처럼, 냄새 맡고 싶은 것을 냄새 맡는 게 아니고 냄새 나는 것을 맡는 것처럼, 눈도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고 보이는 것을 보는 것뿐입니다. 

눈은 그 기능에 충실한 것뿐이고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그것은 그 사람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눈에는 죄가 없어요. 죄가 있다면 사람의 선택, 사람의 인격, 사람의 마음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이나 사람의 손이 독자적인 의지나 인격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의 마음이 원치 않는데 눈이 억지로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원치 않는데 사람의 손이 억지로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눈이든 손이든 신체의 어느 부분이든 우리의 상황을 탓할 수 없습니다. 

김유신이 화랑이었을 때 자기 말의 목을 쳤다고 하지만 그 말은 죄가 없어요.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자신의 신체든 상황에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젊어서 그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 젊음을 탓합니까. 그럼 모든 젊은 사람이 똑같은 죄를 짓는다는 얘기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젊든, 늙든, 사람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지 젊음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성질이 급해서 그랬다, 저도 성질이 급한 편이지만 성질이 자체적인 의지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면 성질에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 없습니다. 

성질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격의 일부일 뿐이에요. 독립적인 주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김성질 · 이성질 · 박성질 이라는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또 호르몬 때문에 그랬다, 요즘 화학적 거세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범죄를 얼마나 예방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호르몬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호르몬은 잘못이 없어요. 호르몬은 인체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뿐이고 궁극적인 결정권은 사람의 인격에 있는 것입니다. 남보다 호르몬이 많은 사람은 밥만 먹고 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루 종일 노동하는 사람은 호르몬 탓을 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만일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했다면 세상에 눈이나 손이 성한 기독교인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 한 눈이 아닌 두 눈을 뺏을 것이고 한 손이 아닌 두 손을 찍어 내버려도 죄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말하기를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지만 새가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 된다.’고 했는데 나쁜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것, 막을 수 없습니다. 유혹이 스쳐가는 것,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두고 생각하고 궁리하고 그것을 계획에 옮기는 것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이었을 때 세 명의 룸메이트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녀석이 벽에 여자 모델의 포스터를 붙였습니다. 이건 남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항의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함께 쓰는 공용공간에다가 자기가 원하는 포스터를 붙이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알던 신학생이 기숙사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당연히 기독교인이고 그도 제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거실 소파에 마주 앉아서 얘기를 하는데 옆에 포스터가 붙어있으니 얼마나 민망합니까. 그래서 그도 그 포스터를 안 보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저도 그 포스터가 없는 것처럼 행세를 하고 둘 다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포스터가 안 붙어있는 것처럼 행동을 하는데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차라리 솔직하게 그 포스터를 바라보고 잘 빠졌다, 예쁘다, 내 스타일이다,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이고 긴장을 극복하고 그리고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제가 그런 경험을 통해서 기독교인의 윤리관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벽에 무엇이 붙어있든 TV에서 어떤 프로가 나오든 억지로 안 본척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더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오직 거짓되고 괴롭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범하는 오류에요. 오죽하면 무신론자들이 기독교를 집단적 노이로제라고 부르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의도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뭘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어느 누나가 10대 남동생의 방에 들어서다가 남동생이 인터넷으로 야동을 보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아주 민망한 순간이지요. 그때 그 누나가 너는 장차 뭐가 되려고 이런 걸 보느냐, 이 변태야, 그건 죄다, 나쁜 거다, 당장 꺼라, 이렇게 말하지 않고 동생에게 마음껏 봐도 된다고 말하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어요. 이것이 왜 뉴스거리가 됐느냐. 얼마나 지혜로운 누나입니까. 

세상에 누나든 엄마든 아빠 중에 이런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건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의 얘기에요.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이런 것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 누나가 얼마나 현명합니까. 그게 아니고 만일 보면 안 된다, 이 변태야, 그건 죄다, 회개해라, 너 지옥 간다 …. 무슨 벌거벗은 몸뚱이를 봤다고 지옥 갑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그렇다고 안 볼 것 같습니까. 보긴 보는데 죄의식만 키워줄 뿐이고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수치심만을 키워주고 누나와의 대화가 단절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저의 아이가 사춘기가 될 때 인터넷에 대해 아예 드러내놓고 말했습니다. ‘만일 아빠 나이에 인터넷이 있었다면 아빠도 야동을 봤을 것이다. 없었기 때문에 못 봤다.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다만 아빠가 원하는 것은 네가 어두운 방에서 우두커니 그런 걸 지켜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웃고 대화하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더 낫다.’ 그랬더니 수긍하더라구요. 

세 번째로 사람이 눈을 빼서 내버린다고 해서 그 사람의 죄성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손을 찍어 내버린다고 그 사람의 욕심까지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만약 없어진다면 소경들이 더 의로울 것입니다. 없어질 수 있다면 손이 없는 사람이 더 거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죄의 성향은 사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성향. 성경이 육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에요. 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창조하셨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기독교는 몸을 죄악시하고 영혼을 거룩하게 보는 종교가 아니에요. 몸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장차 우리의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도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몸 자체가 죄라면 예수님이 왜 몸으로 부활하시고 왜 우리가 이후에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하겠습니까. 성경이 육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육체를 말하는 게 아니고 인간 내면의 죄의 성향 - sinful nature, 죄를 짓고자 하는 성향, 이것을 육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이 왜 하셨느냐. 공연히 하신 말씀이라는 얘기냐.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의 예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이 구절에 있습니다.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눈 · 손 다 귀중한 우리의 백체 중의 하나에요. 다 귀중합니다. 

그러나 영혼보다 귀중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귀중한 것이라도 하나를 잃는 한이 있어도 사람의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재물, 사람의 건강, 명예 다 마찬가지에요. 재물이 없어서 죄를 짓는 경우보다 재물이 많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경우가 더 많다면 차라리 재물을 좀 잃음으로 회개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더 유익한 것이고 건강이 없어서 죄를 짓는 것보다 건강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라면 차라리 건강을 좀 잃음으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그 사람에게 더 유익한 것입니다. 백체 중의 하나라도 없어지고 백체가 완벽하게 다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백체가 완벽해서 지옥 가는 것보다는 백체 중의 하나가 없음으로 천국 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당연한 얘기에요. 

여기에서 예수님은 백체 중의 둘이나 셋이나 넷이나 다섯이나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백체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셨어요. 백체 중의 하나를 잃는 것 정도는 누구든지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백체 중의 둘, 셋, 넷, 다섯, 열 이것을 잃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고 백체 중의 하나. 주님이 많은 것을 가져가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에요. 극단적인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주님이 가져가시기 전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주님이 가져가신다고는 말하면서 우리가 스스로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느 것이 쉬울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억지로 가져가시는 것과 내가 스스로 먼저 버리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쉬울 것 같습니까. 내가 버릴 때는 백체 중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주님이 가져가실 때는 여러 개가 따라갑니다. 

어느 것이 유익합니까. 예수님은 유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어요. 이건 지극히 실리적인 단어요 합리적인 단어에요. 유익하다. 예수님이 무리한, 극단적인 것을 요구하시는 게 아니고 우리의 합리적인 사고에 어필하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정말로 유익하냐, 이걸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이든 회개든 순종이든 어느 것이 유익하냐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충분히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차선책이지 최선은 아니에요. 백체가 다 온전하고 천국 가는 것이 최선이에요. 눈이나 손이 멀쩡하고 영생을 얻는 것이 최선이지만, 당연한 얘기지만 당연한 것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 통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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