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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예수 (행 2: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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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지 못했던 예수 (행 2:14-36)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우화 중에 코끼리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앞이 보이지 않는 여러 명의 맹인들에게 코끼리를 만지고 나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나고 물었습니다.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마치 큰 기둥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코를 만진 사람은 큰 호스처럼 생겼다고 이야기를 하고, 배를 만진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큰 벽처럼 생겼다고 말합니다. 이 우화는 맹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 통전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고 단편적인 시각을 갖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유해 준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다워지지 못하는 이유,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보다 자신이 원하는 예수님만을 골라서 믿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는 말을 종종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된 삶의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전히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오는 것일까?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인생은 그야말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인들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한 주간 힘들게 살다가 예배당 와서 하나님을 만나기보다는 심리적인 위안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 심리적 위안이라는 것 오래 가지 않습니다. 복음을 듣고 거듭나지 않은 한 진정한 위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평안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변화된 인생을 살고 싶다면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가난 중에도 부유하고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비로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Ⅰ.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역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B.C와 A.D로 나뉘어집니다. 역사상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역사의 기준으로 인정받은 인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역사를 바꾼 인물인 예수님에 대해 당시 학자들이나 역사가들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올해는 2013년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을 표시한 년도입니다. 인정하든 안하든 세상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시간을 정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학자들이나 역사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의 기준이 되는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신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그 분에 대한 관심은 연예인에 대한 관심만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오순절,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늘 그랬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죽인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종교적인 열심히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 마가의 다락방으로 몰려듭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갈릴리사람들이 세계 각국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귀는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큰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이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에서도 예수에 대한 선입견을 가진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곳에서조차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이 그들의 영적인 눈을 가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2-13절입니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그러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서서 증언합니다. 자신들은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성령을 받은 것이며, 너희들이 죽인 예수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된 성자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성자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가 다윗의 예언을 인용해 증언한 것처럼 예수님은 성부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계획대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다시 살리셔서 하늘로 높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분을 경배하셔야 합니다. 그분 앞에 겸손히 나아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닙니다.


Ⅱ. 한발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베드로의 증언대로 예수님이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은 마땅히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렇습니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고 싶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않고서는 진정한 믿음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피아노를 잘 치는 남자나 여러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그런 열등감에서 인지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악기를 다룰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워싱턴에 아는 목사님을 만나러 갔다가 그 목사님의 따님이 탁월한 바이올린 연주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키우고 싶다는 욕심이 나서 그분과 함께 바이올린 가게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은 제가 바이올린을 사러 온 줄 알고 꽤 비싼 가격의 바이올린을 내놓았습니다. 제가 머뭇거리자 더 고가의 바이올린을 찾는 줄 알고 엄청난 가격의 바이올린을 다시 내놓았습니다. 그때 잠시 주인이 다른 바이올린을 찾으러 들어간 사이 활을 바이올린에 갔다 대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상하시는 대로 저는 아무런 음악도 연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비싼 고가의 바이올린도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전혀 쓸모 없는 악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고가의 바이올린이 제대로 된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의 인생, 최고의 인생, 만족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주인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를 만드신 주인이신 주님께 우리의 인생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분께 인생을 맡기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변화된 인생이 무엇임지, 어떻게 고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지, 그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Ⅲ.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필립 얀시가 쓴 책 중에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매우 놀랐던 것은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미전도종족이라면 몰라도” 그렇습니다. 교회 다닌 사람치고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적인 동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생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 좌절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주님이시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고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보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입술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 구원자이셨지만 베드로의 삶속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인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버리고 부인할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 앞에 몰려든 청중들의 말처럼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일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베드로는 담대히 일어서서 증언합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생명을 걸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변화된 것입니다. 성령의 임하심을 통해서 베드로는 이제 입술의 고백이 아닌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의 손녀의 이름 중에 해나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미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닐 때였습니다. “반에서 거인과 하나님 중에 누가 더 크냐?”라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해나라는 아이가 이 한마디로 논쟁을 잠재웠습니다. “하나님이 거인을 만드셨어!” 그 후 힌두교를 믿던 인도 친구가 해나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의 얘기를 들으면서 마태복음 18장 3절이 생각났습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이시오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죄와 허물로 망가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삶이 우리의 고백하는 믿음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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