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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벽을 넘어서 (행 1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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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을 넘어서 (행 10:1-22)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10장은 복음의 전환점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이 사건은 외형적으로 보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 혁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유대인에게 갇혀있던 복음이 유대인의 장벽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유대인의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 인류를 향하여 물꼬를 트게 된 것입니다.
고넬료의 구원이후 유대인 베드로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행 10:34-35절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본문을 통해서 받은 은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1. 이 본문에는 한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치밀하고 집요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환상 중에 이방인 고넬료를 찾아오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그리고 베드로라는 제자가 머무르는 집과 그 집이 있는 지역을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이방인 고넬료는 누구입니까?
로마군의 1개 군단은 약 6,000명의 병사로 이뤄지는데, 600명씩 10개 부대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온 ‘이달리아대’는 그 10개 부대 중 하나로, 외국에 주둔한 정예부대입니다.
고넬료는 그 부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이란 이달리야대의 병사 600명 중 100명의 군사를 통솔하는 지휘관입니다.
그러니까 고넬료는 해외 로마 주둔군의 고급 장교입니다.

하나님은 환상 중에 이방인 고넬료만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환상 중에 베드로도 찾아오셨습니다.
11절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리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맞이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19-20절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여기 보십시오.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고넬료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보고 탄복합니다.
감격스럽지 않아요?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오징어 낚시질처럼 훑다보니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걸려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영혼 구원은 치밀하고 집요한 계획에 따라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일입니다.
아무리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우연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준비하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다가 새가족에 대한 좀 더 진지한 태도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난 주 저의 집사람을 통하여 지적받은 내용입니다.
새가족을 소개할 때 진지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이름만 부르고, 누군지 둘러보지 않고 지나가더랍니다.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한 계획 속에 초청한 분인데........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새가족을 어떤 태도로 맞이하십니까?
새가족을 대할 때 정말 하나님의 치밀하고 집요한 계획 속에서 보내주신 소중한 영혼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십니까?

2.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하여 이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 천사의 역할을 잘 살펴보십시오.
왜 천사는 직접 고넬료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지 않습니까?
왜 천사는 직접 고넬료에게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천사는 고넬료에게 베드로라는 사람을 불러다가 복음을 듣도록 권면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늘과 땅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특권을 부여 받은 존재는 오직 구원 얻은 성도뿐입니다.
하나님은 이 복음 전하는 특권을 성도들에게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도 부러워합니다.

새벽기도회 때 최하진 선교사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1989년 28살에 카이스트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스탠포드대학교에서 포스트 닥터를 했으며, 대덕 연구 단지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중국 선교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최박사 미쳤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네 인생을 주님께 걸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의 꿈은 버려라, 나의 꿈을 가져라!”당신의 미래를 쥐고 계신 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가?주님께 다 맡겨보라, 그분이 전부 책임져주신다.눈을 떠라, 귀를 열어라! 주님께 마음을 고정하라!주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귀한 사명이 있다.언제까지 주님의 뜻을 모른 척하고, 한 다리는 세상에, 한 다리는 주님께 걸친 채 세상의 노예가 되어 어정쩡하고 불안하게 살아갈 것인가?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아시고 당신에게 준 사명을 기억하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당신의 심중을 꿰뚫어 보신다.믿음의 눈으로 주님이 주신 사명을 발견하라.세상이 주는 성공과 명예, 허망한 것을 좇지 말고, 하늘의 것, 주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사명에 전부를 걸어라.주님만 의지함으로 넘실대는 요단강 물에 발을 내딛어라.불가능 앞에서도 기죽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라.주님께 전부를 건 자의 인생을 책임져주시는 주님을 체험하라.전능하신 주님께서 당신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분께는 기적이 아니지만 당신 눈에는 기적인그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도록, 당신 자신이나 세상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 인생을 걸라.

그는 중국의 청소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열방중고등학교를 세우고자 2002년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2003년 8월 학교 개교를 앞둔 1개월 전 마지막 공사 대금 1억 원이 필요했습니다. 
1주일 동안 잠을 못 자니까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 때까지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돈만 찾았던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충남 둔포에서 목회하시는 조성환 목사님을 통해서 1억 원을 전달받았습니다. 
그 돈은 그의 친구 김요찬 목사님이 먼저 하늘나라로 갔는데 선교를 위해 써달라면서 그에게 맡겨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그의 교회에서 태국으로 파송한 선교사에게 보내 주려고 몇 번 전화를 걸었는데 ‘여긴 아니데, 여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어 번번이 전화를 끊었다고 합니다. 
최하진 선교사, 그는 그 일을 계기로 절실하게 체험하고 깨달은 바를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시는구나! 그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이런 메시지를 주셨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게 뭔지 아느냐? 네가 학교를 지어 나를 위해 일하는 것,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니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건 딱 한 가지다. 바로 나에 대한 절대 신뢰다. 네가 나만 의지하면 다른 모든 일은 뒤따라온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가 무엇인지 그때 직접 경험했다. 돈이 많아야 안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가장 안전한 것이다. 주님, 주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헌신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 멋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하여 이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4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9절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시더라.”

저는 이 구절들에 나오는 ‘기도’라는 단어가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기도라는 파이프를 통하여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왜 기도해야 합니까?
왜 새벽마다 태신자 명단을 호명하며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영혼 구원은 교우들의 능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3. 복음이 파죽지세로 퍼져 나가지 못한 것은 장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15절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① 우선, 내 자신 안에 장벽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복음이 여러분 자신 안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복음이 진정으로 여러분에게 복된 소식이 됩니까?
여러분의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청년시절, 장년시절, 어제를 다 아시는 하나님. 
여러분의 생각, 말, 행위를 다 아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자신을 받아들이십시오.
이젠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② 다른 사람에 대한 장벽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 다른 문화에 대한 편견, 선입견을 말합니다.
바로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의식 속에 있는 장벽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의 근원으로 불렀습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창12: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계 모든 민족이 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계를 향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단 한 방울도 흘러가지 못하도록 독선과 욕심의 장벽을 쌓았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깊은 산 속에 옹달샘이 하나 있습니다.
이 샘은 물을 언제나 흘러 보내야 합니다.
이 물이 시냇물을 이루고 강물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새벽잠에서 깨어난 다람쥐 산토끼 멧돼지가 마실 수 있어야 하고, 들의 농부가 그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어야 하고, 강가의 어부가 그 물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샘은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샘은 물을 내 보내는 것을 싫어합니다.
아까운 물을 다른 이들에게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샘 둘레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둬 놓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물이 썩어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샘은 제 잘 났다고 하지만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의 선민의식입니다.
유대주의입니다.

어느 유대인 랍비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방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까?”라는 질문에, “지옥에 유황불이 타오르고 있지 않느냐? 그 유황불이 계속 타오르려면 땔감이 필요하지 않느냐? 하나님은 그 땔감으로 이방인들을 만들어 놓으셨느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정도로 유대인의 이방인에 대한 생각은 배타적이며, 부정적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유대인으로서는, 심지어 그가 예수의 사도라 하더라도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수 없는,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이었습니다.
넘을 수 없는 장벽이고, 뚫을 수 없는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였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누가 속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구원 받아야할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땅 끝까지 가야 합니다.

4. 장벽을 넘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겐 이런 장벽은 없나요?
우리 사이에 감정으로 인한 장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한 장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 이념과 이데올로기로 인한 장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장벽들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거침없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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