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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어린 아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 (막 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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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 (막 10:13-16)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5월에 어린이 날이 있고 어버이 날도 있습니다. 

5월 첫주일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교회가 어린이 주일을 제정하고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 하루만이라도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려는 까닭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 날을 통하여 어린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어린이에 대한 평소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자는 의도가 아니겠습니까?

미국의 사회학자 스트라우스는 가정에서 부부의 위상관계가 아이들의 인격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조사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조사는 미국 도시에 사는 남자 고교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으로, 부부 존재 형태를 ①남편 우위형 ②아내 우위형 ③부부 협력형 ④갈등형의 네 가지로 나누고, 그 자녀들의 인격형성이 어떠한가를 알아내고 있습니다. 

설문내용은 ①학교성적 ②향상심(向上心) ③정서의 안정감 ④부모에 대한 친밀감 등 네 가지 항목입니다. 

먼저 아내 우위형의 가정에서는 아이들의 학교성적은 좋은 편이나 정서는 극히 불안정하며, 부모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편 우위형의 자녀들은 성적은 중간 정도이고, 정서도 매우 안정되어있으나 부모에 대한 거부감은 역시 크고 향상심은 타에 비해서 가장 높았습니다.  

한편 부부 협력형의 자녀들은 학교성적도 높고, 정서도 매우 안정되어 있으며, 부모에 대한 친밀감도 높다는 결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부 갈등형의 자녀는 성적이나 향상심이나 정서의 안정성이 최저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부모에 대해서도 매우 거부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아이들에게는 가정의 환경, 특히 부모의 상호 관계가 이처럼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어깨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와 사회와 나라의 미래가 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교육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장의 전개를 보십시오. 가정 문제, 특히 이혼 문제를 언급한 후 일어난 사건입니다. 가정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본문을 통해 부부가 함께 자녀에 대한 성경적인 시각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어린 아이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감동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점을 배워야 합니까?


1. 어린 아이들을 위하는 부모의 모습 

13절=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먼저 어린 아이들을 위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에서 동사는 미완료 과거로 쓰여 사람들이 끊임없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랍비나 존경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받게 하려고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것은 하나의 관습적인 행위였습니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를 만져주시기를 바라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만져 주심을 바라고” 라고 했습니다. 자식에게 바램을 갖는 부모의 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리 못난 자식에게도 부모는 바램을 갖습니다. 자식이 건강하기를 바라고, 공부 잘하기를 바라고, 좋은 성품이기를 바라고,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바램이 있기에 부모는 아이를 위하여 헌신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순기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역기능의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장래를 부모의 뜻대로 하려고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국 교육의 문제점 중 하나입니다. 부모의 지나친 열성이 빚어낸 각종 과외와 사설학원 수업 등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아이에게 어떤 기대를 갖고 있습니까? 본문의 부모들은 우리에게 좋은 귀감(龜鑑)이 됩니다. 그들은 아이에 대한 자기들의 기대 심리를 예수님께로 귀착시켰습니다. 아이들이 예수님 품에 안기면 그것으로 대만족이었습니다.  

본문의 ‘데리고 오매’(prosphero)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누구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입니다. 아이들은 어떤 면에서 어른들보다 더욱 영적으로 갈급해 있습니다. 아이들이 교회로 나와 주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시험때만 되면 교회 못나오게 하는 부모가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학원에 보낸다는 핑계로 주일학교 교육에 등한히 한다면 목전의 작은 유익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훼손하는 우매한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품을 떠난 아이가 어떻게 복을 받겠습니까? 그 아이가 부모의 뜻대로 잘 자라주겠습니까? 그 아이의 미래에 하나님의 동행과 인도를 기약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아빠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아이가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어갔습니다. 오분 쯤 지난 후 아빠를 부릅니다. 

“아빠...” “왜?” “목말라요. 물 한 컵 갖다 주실래요?” 
“왜 아까 마시지 않았니? 불도 꺼졌잖아.” 

다시 오분 뒤에 아이가 아빠를 찾습니다. “아...빠” “왜?” “목마른데 물 한 컵 갖다 주시면 안 되요?” “아까 말했잖니? 한번만 더 물어 보면 매 맞는다.” 

다시 오분 뒤: “아.....빠” “왜 그러니?” “매 때리러 오실 때 물 한 컵 갖다 주시면 안 되요?”  

좋은 아빠 되기가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국에서 400만부를 돌파한 베스트 셀러의 작가인 아트 링클레터는 CBS 방송의 '하우스 파티'라고 하는 생방송 토크쇼 프로그램을 26년 간 진행해 오면서 느낀 바를 책으로 정리했는데, 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크쇼에 아이들을 불러다놓고 물어봅니다. “너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아이들이 나름대로 대답을 하는데, 어떤 네살배기 어린아이가 “나는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듣기 좋은 대답이구나, 하고 사회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래, 엄마가 되어서는 어떻게 할래?” 

그런데 이 어린아이 대답 좀 보십시오. “엄마는 되겠지만 아이는 안 낳을 겁니다.” “그건 또 왜?” “골치 아프니까요.” 

이 어린아이의 마음 속에 자신이 어머니한테 골치 아픈 존재가 되어 있다는 인상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 여러분! 가장 훌륭한 부모의 역할은 무엇보다 자녀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품에 안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가정은 이런 부모들로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2. 어린 아이들을 귀찮게 여기는 제자들의 모습 

13절= “···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어린 아이들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모습은 부모들의 간절한 소원과는 달리 귀찮아하고 꾸짖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귀찮게 여겼습니다. 본문의 ‘꾸짖다’(epitimao)는 매우 강한 단어입니다. 아마 제자들은 실제로 부모들을 붙잡고 밀어낸 것 같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랍비라는 칭호로 불리웠기에 관례상 어린 아이를 축복해 달라는 청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왜 그들을 꾸짖은 것일까요? 

아마 제자들은 세속적인 권위 의식에 젖어 있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예수님께는 어린 아이를 축복해 주는 일보다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많은 사람들로 인해 고단하신 예수님, 존귀하신 예수님이 아닙니까? 할 일 많으신 분이 별 대수롭지도 않은 아이들 때문에 방해가 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은 당시 어린 아이와 여자는 유대 사회의 일원으로도 여겨지지 않을 만큼 매우 경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음을 기억합시다. 

14절=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노하시었습니다.” 이 말은 ‘크게 탄식하다’는 뜻인데, 예수님이 이러한 감정을 가지신 것은 제자들이 얼마 전 당신이 주신 어린 아이에 대한 교훈을(9:36, 37) 잊어버린 데 대하여 서운한 감정을 가지신 동시에 영적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을 안타깝게 여기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여기 ‘노하시어’ 라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쓰기를 꺼려하는 단어인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출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 정도의 감정을 나타내신 것은 죄에 대하여, 외식과 위선에 대하여,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 대하여, 그리고 귀신들에 대하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라는 두 가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가 어떤 때였습니까? 주님의 심령이 예루살렘의 십자가 대속이라는 사명에 얽매어 있던 때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온 때는 예수님의 마음에 온통 십자가 고난과 대속에 대한 부담감이 가득 차 있던 민감한 때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 때에 우리라면 과연 어린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당장 자신의 문제가 코 앞에 닥쳐왔는데 어린 아이나 축복하고 있을 때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은 제자들과는 달리 어린 아이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용납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관용과 여유로운 마음 자세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여유로운 자세가 곧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세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 손으로 해결 받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3.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16절=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본절에서 우리는 어린 아이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축복하시니라’의 동사 용법은 동작이 계속되는 것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어린 아이들에게 축복하시기 위해 오랜 시간을 할애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어린 아이에 대한 관심은 당시 사람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는 천국의 주인이요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오히려 어린 아이들에게 더 큰 권리인데, 누가 야단을 칠 수 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1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또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자는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마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소자 한사람을 자기 위치에 올려놓으실 만큼 어린아이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어린 아이들을 정성을 다해 축복하셨습니다. 

당시 풍속은 동네에 유명한 랍비나 존경받는 사람이 오면 아이들을 데려가서 “복을 빌어 주세요” 라고 청하는 것이 관습적인 행위였는데, 예수님은 이 풍속을 용인하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축복받으며 자라야 합니다. 부모의 축복이 필요하고, 목사의 축복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흔히 성인들만 축복받으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축복이 필요하고, 군 입대시 축복 기도가 필요하고, 결혼하는 신랑신부에게 축복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 인생의 장도에 오르는 어린 아이야말로 축복을 받아야 할 영순위 대상입니다.

어느 교육학자가 어린 아이 주변의 환경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꾸지람을 받으면서 살아가게 된다면 남을 비난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만약 어린아이가 적개심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면 싸우는 것을 배우게 된다. 
만약 어린아이가 수치심을 느끼며 살아가게 된다면 죄의식을 배우게 된다. 
만약 어린아이가 관대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면 남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만약 어린아이가 격려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면 고마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만약 어린아이가 공평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면 정의로움을 배우게 된다.  
만약 어린아이가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면 남을 믿는 법을 배우게 된다. 
만약 어린아이가 따스한 인정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만약 어린아이가 친구들과의 우정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사랑을 배우게 된다.”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를 보호할 의무는 있어도 야단칠 권리는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시각으로 우리의 2세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안기는 아이들은 엄청난 복을 받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은 생명, 소망, 믿음을 배우며 자랍니다. 주일학교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을 소유하여 험한 세상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 아이는 가정의 미래요, 교회의 미래요, 국가의 미래입니다. 청소년 비행, 청소년 문제로 신문 사회면이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는 것은 바로 우리 어른들의 문제입니다. 어느 길이 가장 옳은 길입니까?

어린 아이 때부터 예수님께로 인도합시다. 야단치는 것 보다 마치 예수님 대하듯 사랑과 정성으로 받아들입시다. 예수님이 그들을 용납하시듯 우리도 그들을 용납합시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도 어린 아이들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웁시다.

벧전 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절대 의존의 자세, 겸손과 순종의 자세를 어린 아이들에게서 배웁시다.  

오늘은 복된 날입니다. 이날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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