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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으라!(선택과 지혜)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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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으라!(선택과 지혜) (마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오늘부터 약 20주 동안 예수님 말씀의 정수라 불리는 산상수훈에 대하여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 첫 시간 가장 유명한 팔복 말씀을 나누게 될 텐데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시게 되었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시기를 원하셨는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오늘의 상황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4장 23~25절까지 나와 있는 일입니다.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당하는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잠깐 지도를 볼까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얼마나 짧은 기간에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모이게 되었는지, 그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볼 때, 당시의 교통상황이나 지리적 여건으로 볼 때 폭발적인 인기라고 말해야 좋을 듯합니다.

산상수훈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5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배우고, 그분께 인생을 건 사람들도 함께 올라갔다. …예수께서 자리에 앉으셔서 산행에 함께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상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습니다. 먼저는 많은 사람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고, 그 말씀에 대한 결단은 그들의 몫이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5~7장부터의 말씀이 평범한 사람들이 따르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의견은 많은 사람이 따라갔지만,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특별한 말씀이라는 것이죠.

제가 올해 들어서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팬인지 제자인지” 분명히 하라는 것인데, 이 말씀이 바로 그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제가 오늘 말씀의 제목을 “복 있으라!”라고 했는데 부제를 “선택과 지혜”라고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복”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복으로 이해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예수님을 따라왔던 사람들의 가치를 가지고는 선뜻 따르기가 어렵죠. 그래서 이 복은 “선택”과 연결되어 있고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을 보며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평범한” 신앙에서 “프로 같은” 신앙을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학중 목사가 쓴 [믿음불패]라는 책에 보니까 이런 글이 있네요.
평범(Mediocrity)이란 말의 뜻은 높은 산에 올라가다가 산 중턱에 머물러 서서 이만하면 됐다고 스스로 만족하며 산 정상에 대한 도전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신 탁월함이 잠재되어 있는데도 우리는 이만한 수준이면 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평범한 삶을 택하고 자신을 합리화시키지는 않는가.
이제는 사명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자기 일에 미쳐야 한다. 사명에 미친 사람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철저한 프로 정신으로 죽도록 충성한 데미안 신부는 나병환자가 모여 사는 몰로카이 섬에 들어갔다. 섬에 들어간 그는 나병환자들에게 접근하기가 어려워 복음이 잘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병에 걸리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나병환자가 되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사명에 미치지 않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도 데미안 같은 프로 정신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평범한 삶을 택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그 말씀에 우리가 선택하고 결단하는가? 하는 것이죠.
저는 종종 음식점에서나 차를 마실 때 종업원들에게 우매한 물음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살 안 찌고 맛있는 것을 추천해 주세요!”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라는 것이죠. 결국, 살이 찌는 것을 감수하고 맛있는 걸 먹든지, 맛이 없지만 열량이 적은 것을 선택하든지 해야 하죠.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말이죠. 

조엘 오스틴의 [행복의 힘]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두 친구가 신문을 사려고 길모퉁이 가게에 들어갔다. 그런데 점원이 무척이나 무례하게 굴었다. 그때 한 친구가 점원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세요.”
가게를 나서면서 다른 친구가 물었다.
“저 점원은 항상 저렇게 무례해?”
“늘 그래.”
“그런데도 너는 항상 친절하고?”
“늘 그래.”
어리둥절해진 친구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다른 사람이 내 하루를 망치게 내버려두지 않기로 했거든.”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기분이나 삶의 태도를 좌우하는 걸 방관하지 않기로 했다. 무례하고 불쾌한 행동을 하는 건 점원의 마음이다. 하지만 무례한 대우를 받아도 마음만 먹으면 이 남자처럼 행복하면서도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응할 수 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소개할까요?
허태균의 [가끔은 제정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더 좋은 것, 더 완벽한 것, 가능하면 단점이 적은 것을 찾는다. 그것도 같은 가격에, 심지어 더 싼 가격에, 하지만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선택은 외모는 멋지고 성격은 착하지만, 능력이 조금 떨어지고 돈이 없는 상대 A와 외모는 너무 형편없고 성격도 지랄 같지만, 능력이 뛰어나고 돈이 많은 상대 B 중에서, 무엇을 얻는 대신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하게끔 강요받는 것이다.

현대 ‘쏘나타’와 르노 삼성의 ‘SM5' 사이에서 무엇을 살까 고민해보자. 쏘나타를 고른다면 혁신성, 뛰어난 연비, 강한 엔진을 얻는 대신 부족한 브레이크 성능, 너무 튀는 앞모습, 너무 흔한 국민차를 동시에 얻는 것이다.
반면 SM5를 고른다면 무난한 디자인, 중후한 승차감, 안정된 내구성을 얻는 대신 동시에 지루한 중년의 느낌, 떨어지는 엔진성능, 떨어지는 연비를 얻는다.
선택한 것의 장점을 취하면 단점이 따라오고, 동시에 포기한 것의 장점을 잃으면 포기하는 것의 단점도 없앨 수 있다. 만일 이런 모든 장점을 갖추었는데 단점은 거의 없는 차를 원한다면, 롤스로이스 팬텀을 사면 된다. 약 8억 정도 한다고 한다.
그때는 집과 차 중 선택해야 한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얘기는 곧 무엇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포기할 것이 전혀 없다는 얘기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얘기와 같은 말이다. 우리가 편의점에 들어가서 100여 가지 음료수 중 하나를 고를 때, 우리의 의식세계는 내가 마실 것을 고르고 있지만, 무의식의 세계는 우리가 포기할 것을 동시에 고르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둘 중에서 우유부단하게 선택을 내리지 못한다.


지혜로운 선택을 위한 기준!
지금 우리의 삶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해온 선택의 결과입니다. 어떤 선택을 했느냐가 그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이죠.

얼마 전에 읽은 책 중에 아주 흥미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습관의 힘]이라는 책인데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선택을 다 하다가는 뇌가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뇌 활동이 원활해지려면 습관에 의해 우리가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이 반복되다 보면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우리의 몸은 보상이 있는 쪽으로 습관이 굳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담배를 못 끊고 습관이 되는 이유는 “보상의 동기”가 따르기 때문이죠.
여러분이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는 습관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습관이 되기 전에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을 마실까?” 하지만 습관이 되면 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커피 머신을 향해 가고, 커피를 만들게 되죠.

여러분의 삶에 지혜로운 선택을 하게 하는 그 보상의 동기가 무엇일까요? 육체의 보상을 생각하며 선택을 하면 육체의 결과를 낳습니다. 결국, 썩어질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늘이 상”을 바라며 선택하는 습관이 생기면, 어느 시점에 가서 별로 고민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12절을 보세요.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내 평판을 떨어뜨리고 너희를 깔보거나 내쫓거나 너희에 대해 거짓을 말할 때마다. 너희는 복을 받은 줄로 알아라.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진리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들이 불편을 느끼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 11장에 보면 모세가 “백성과 고난받기를 즐겨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백성과 함께 고난받지 않아도 되지만, 고난받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죠.

히브리서 11장 25-26절의 말씀,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우리는 지식과 지혜가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지식은 배워서 알고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죠. 많이 배우면 다양한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다른 관점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산상수훈의 가장 큰 특징은 지혜로운 선택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 바로 “팔복”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마다 “복 있으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복은 특별히 하나님의 행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면 하늘 아버지께서 행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필연적으로 우리의 삶도 행복해질 것입니다.

팔복의 말씀이 다른 관점이라는 것은 8개의 복이 공통으로 “마음의 복”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무언가 채워져야 하는 물질과 욕망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데, 예수님은 축복이란 우리 심령의 문제라고 다른 관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질이 행복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지혜로운 생각입니다.

필 라이큰의 책 [사랑한다면 예수님처럼]에 보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와 있는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랑은 온유하며”라는 구절인데, 오늘 본문 중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물론 우리의 온유는 하나님처럼 영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온유하심을 증거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온유 베풀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온유를 멈추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그분의 왕국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온유를 하찮게 여기지만 모든 믿는 자들이 열심히 온유를 행한다면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잃어버렸던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초대교회 당시의 이교도들은 때로 그리스도인들을 “Christiani”가 아닌 “Chrestiani”라고 불렀다고 한다. 물론 두 단어는 거의 비슷하게 발음된다. 그러나 비슷하다는 이유 말고도 혼동을 가져온 이유가 있었다.

Christiani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Chrestiani는 “온유”를 뜻하는 헬라어에서 비롯되었다.
즉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 알려지기 전부터 온유를 베푸는 사람들로 알려졌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온유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었다.
팔복 말씀 중의 하나의 예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뭔가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복의 기준이 달랐고, 행복의 기분이 달랐습니다. 이 여덟 가지 복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마음의 복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녹슬지 않고 없어지지 아니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마음입니다. 세상 사람은 눈에 보이는 복을 이야기하고, 손으로 만지는 복을 이야기하고, 화려한 것을 복이라 이야기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그렇게 오래가는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복을 찾다가 실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못된 선택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는 늘 영적으로 가난한 마음이기에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갑니다. 그 간구함은 늘 저 높은 곳을 향해 있습니다. 그 마음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또 다른 관점 - 세상과 다른 보상

어느 교회집회를 갔을 때입니다.
말씀을 전하러 강단에 올라가기 전 많은 교인이 저와 악수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집회를 마치고 나오면서도 많은 사람이 저에게 악수를 청합니다. 대부분이 그 집회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한 분들입니다. 저는 그분들이 매우 반갑고 좋아서 악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강사 목사님과 악수를 해야 복을 받지!!!”
제가 기분 나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저를 그렇게 귀한 존재로 생각한다니 감사할 일이죠. 그러나 저와 악수를 해서 복 받을 일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복을 줄 수도, 그럴 능력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저분들이 나와 악수를 하면서 받을 수 있는 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보상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상하면 모두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축복하면 또 물질적이고, 보이는 것을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바로 이 “기복신앙”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복을 너무 많이 기대합니다. 부흥회를 한번 했다 하면 복 받으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합니다. 그러면 또 신자들은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복 받으라는 말이 너무나 많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은 그렇게 받으라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복을 받을 만한 생활이 뒷받침되어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생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복을 받을 만한 생활은 하지 않으면서 복을 받으려고 별짓을 다 합니다. 그래서 그런 신앙을 가리켜서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을 말할 때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복이 있다면 그것은 참다운 복이 아닙니다. 복을 주시는 분을 바라보지 않고 그분이 주시는 복에 관심을 두게 되는 순간 인격적 관계에서 기복적 신앙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축복인 것은 복을 주시는 분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해서 얻는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 사람이 가진 것, 무언가를 줄 수 있기 때문인가요? 그 무엇 때문이라면, 그 무엇 때문에 행복도 날아가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보상과 축복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얼마나 멋있는 보상입니까?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마음을 비우고 쾌락을 물리치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에게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보상이 주어졌는가 하면 천국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얼마나 멋진 축복입니까? 이것 말고 더 소중한 복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의에 주린 자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충족시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화평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어디에 잘 사는 것을 말하고 세상적인 인생을 말하고 화려한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복은 모두 이렇게 성경적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복을 복으로 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올바른 선택을 합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산상수훈의 말씀은 참 따르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가치와 너무나 다른 것, 우리의 생활방식과 너무나 다른 것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이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제부터 20주 동안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행복으로 느끼지 못했던 것을, 복으로 느끼지 못했던 것을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뒤 흔들어 놓을 정도로 강력한 도전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선택은 이 강력한 도전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이번 시리즈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되도록 강력한 결단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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