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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마 1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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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마 18:1-10)


TV 동화 ‘행복한 세상’ 3집의 ‘햇볕이 되고 싶은 아이’ 내용입니다. 아직은 바람 끝이 싸아한 초봄 어느 날이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양달에 옹기종기 모여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에헴 나는 경찰이다” “음, 나는 엄마 해야지” “엄마가 뭐야 엄마가...” 저마다 배역을 정하는데 한 아이가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야! 너는 뭐할 거야? 빨리 정해 봐” 친구들이 재촉을 하는데도 쭈뼛대기만 하던 아이가 뭔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햇볕이 잘 드는 벽으로 뛰어가 기대서서 말했습니다. “난 햇볕이야. 너희들 모두 이리 와 봐” “햇볕이라니!” 뜻밖의 대답에 옆에서 지켜보던 선생님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어리둥절하던 아이들이 쪼르르 아이 옆으로 달려가 벽에 도토리 같은 몸을 기댔습니다. 

“와, 따뜻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정겹던지 선생님은 무심결에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 햇볕이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민우는 왜 햇볕이 되고 싶어?” 아이는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우리 할머니가요,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는데 거기는 햇볕이 없어서 춥대요.” 시장모퉁이 난전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를 아주 잠깐씩만 비추고 금방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리는 햇볕이 미웠다는 아이, 아이는 이다음에 크면 햇볕이 돼서 할머니를 하루 종일 따뜻하게 비춰드릴 거라며 해처럼 환하게 웃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기특한 아이를 꼬옥 안아 주었습니다. 마치 햇살을 가득 품은 것처럼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셨을 뿐 아니라 어린아이에게 배우라고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고 하셨습니까? 여기의 ‘돌이켜야 한다’ 는 것은 가고 있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더 큰 사람이냐 하는 생각인데 그 상태로는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될 수 없기에 먼저 어린아이와 같이 돌이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마음의 상태를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기심도 질투도 없이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에 감격하며 따랐던 첫 마음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조건 믿었고 무조건 따랐고 무조건 버릴 수 있었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직 사랑과 감사 감격이 넘치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는 말씀의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더 순수하라

작가 생떽쥐페리(Antoine Marie Roger De Saint Exupery)의 ‘어린 왕자’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섯 살 때 나는 맹수까지도 씹지 않고 통 채로 집어삼키는 보아 구렁이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밀림의 모험에 대해 생각해 본 후에 색연필을 가지고 내 나름대로 내 생애 첫 번째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나의 그림 제 1호였다. 나는 그 걸작품을 어른들에게 보여주면서 '내 그림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모자가 뭐가 무섭다는 거니?’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내 그림은 모자를 그린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 구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구렁이의 속을 그렸습니다. 

어른들은 언제나 설명을 해주어야만 합니다. 나의 그림 제 2호였습니다. 어른들은 속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하는 보아 구렁이의 그림들을 집어치우고 차라리 지리, 역사, 계산 그리고 문법 쪽에 관심을 가져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섯 살 적에 화가라는 멋진 직업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내 그림 제 1호와 제 2호가 성공을 거두지 못한데 낙심해 버렸던 것입니다. 어른들은 언제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주자주 설명을 해 주어야 하니 맥빠지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동심을 잃어버림으로 순수함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아프도록 꼬집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의 ‘결단코’ 라는 표현은 절대로 허락하지 아니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뜻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저마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에 관심을 가질 때 오히려 천국 시민의 자격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사람이 되어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신앙으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순수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욕심이 마음을 어둡게 하여 주님보다 세상의 일이 더 보이고 정욕이 눈에 보이게 되었습니다. 순수한 열정과 헌신의 모습은 사라지고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분내며 원망하고 누가 더 높으며 더 큰 가 다투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누가 교회에서 더 중요한가? 누가 더 영향력이 큰가? 누가 더 목소리가 큰가? 누가 더 똑똑한가’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닙니까? 직분만 내세우지 말고, 전통과 역사와 교리만 자랑하지 말고, 어린아이의 순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더 낮추어라

필리핀의 부유한 사업가 아들 ‘카 통 카우’가 마닐라의 성서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기숙사의 욕실과 화장실이 불결하다고 학장에게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학장은 미소를 지으며 “내가 조치해주지” 말하고는 곧장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한 뒤 말했습니다. “자, 이만하면 마음에 드나? 우리 학교는 청소부를 고용할 형편이 안돼서 모두 자원하는 심정으로 자기 일을 한다네. 

사랑의 빚진 자가 되게 함이 우리 학교의 교육 목표일세” 이 사건은 그가 졸업 후 목사가 되어 미국 시카고 자유교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외국학생들에게 일생을 바칠 수 있는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울 때마다 손바닥에 십자가를 그으면서 주님에게 진 사랑의 빚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학장으로부터 받은 겸손의 교훈을 잊을 수 없었노라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 교만한 마음을 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기의 ‘낮추다’의 ‘타페이노오’는 단순한 의미의 겸손이 아니라 멸시와 천대와 굴욕을 당하면서까지 겸손한 것을 의미합니다. 변명하거나 싸우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만한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말씀을 전하고 실천함으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수모와 멸시를 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욕과 조롱을 받고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주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서로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의 능력이나 지식을 비교하여 교만하게 행동한다면 천국백성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서로 비교하지 말고 교만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서로 잘남과 능력을 비교하며 경쟁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존재의 실상 즉 하나님의 도움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임을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뜻에 온전히 맡기듯이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맡기는 자가 실로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겸손이 천국의 권세를 얻게 합니다. 겸손이 천국의 권위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면 모든 갈등과 문제들이 해결 것입니다. 부디 더 자신을 낮추는 겸손으로 천국에서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더 신뢰하라

1862년 2월 링컨(Abraham Lncon) 대통령의 아들 윌리가 죽은 지 얼마 못 가 다른 아들 데드가 심각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병원을 찾은 링컨은 “내 생애에 가장 큰 어려움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중얼거렸습니다. 옆에서 그 말을 들은 간호사가 자신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미망인이라고 밝히며, 그러한 시련 후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링컨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합니다.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가능합니다” “처음 불행이 닥쳤을 때도 완전히 복종했나요?” “아니요. 하지만 불행이 닥칠수록 신뢰를 가지게 되었고 완전히 복종할 수 있었어요” 며칠 후 그녀를 찾아온 링컨은 “그때 참 고마웠습니다. 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예수께서 어린아이의 믿음을 소중하게 보셨습니다. 부모를 따르고 의지하듯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신뢰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과 형편에서도 모든 것을 합력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간다 할지라도, 어떠한 위험이나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부모를 철저하게 의지하여 자신을 던지는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의 말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신앙연조와 신앙의 질이 같다고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 의 질문은 세상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질문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대답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적 학문과 지식을 쌓아야 한다거나 많은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시인 하이네(Heinrich Heine)는 가끔 자택에서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초청받은 손님들은 모두 어린이들이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항상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와글거렸습니다. 친구가 하이네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자네에게는 아이가 없지 않은가? 도대체 저 아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저렇게 떠드는 어린이들 틈에서 어떻게 시를 쓰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먼.” 그 때 하이네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우리 마을의 아이들일세. 나는 어린이들의 깔깔대는 웃음과 가식 없는 얼굴을 봐야 시상이 떠오른다네. 그래서 가끔 어린이들을 초청해 파티를 연다네.” 하이네는 어린이의 밝은 표정에서 시상을 얻어 명작을 남겼던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며, 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아지는 것입니다. 소유를 더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나누며 줄여 가는 것입니다. 지배가 아닌 섬김으로, 소유가 아닌 존재로, 세상적 가치가 아니라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변할 때 바로 그 곳에 천국이 있습니다.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욱 더 하나님을 향해 순수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더 하나님 앞에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소유함으로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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