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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용사 (삿 11:1-11)

첨부 1


큰 용사 (삿 11:1-11)

 
1.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2.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3.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4.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5.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7.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8.그러므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매 
9.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10.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11.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 
<사사기 11장 1~11절>

할렐루야! 
평안하십니까?
저는 지난주일 저녁에, 제 고향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에 있는 <망월교회>에 다녀왔습니다.
온 교인들이 모여 음식을 준비해 주셔서 맛있게 먹고 
돌아올 때는 동행한 모든 분들에게까지
‘쌀’을 선물로 주셔서 받아 왔습니다.
예배 시간에 보니 강단 우측에 
<고신일감독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라고 현수막을 붙여 놓았더군요.
부끄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 
감격스런 고향방문과 고향교회에서의 예배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입구에 서서 인사하는데 
어떤 분이 제 손을 잡고 ‘잘 가’라고 하시기도 하고
어떤 분은 ‘나 용배이 친구다’라고 하셨습니다. 
고향 분들은 제 아버지 이름 ‘용봉’을 ‘용배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제 손을 꼭 잡고 ‘나 엄마 친구야’하시며 인사해 주셨습니다.
저를 반갑게 맞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오신,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를 …
귀하게 여기시고 기쁘게 여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각자 각자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옆의 분과 인사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분을 뵙게 되어 큰 기쁨입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입다의 아픔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살던 홍판서는
계집종 춘섬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갖게 되자 
그의 이름을 길동이라 지었습니다.
길동은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고 총명했지만
본부인이 낳은 아들이 아닌, 서자(庶子)였기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대감’이라 칭해야만 했습니다.
집안사람들은 그런 길동을 멸시했고
혹여나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이 될까봐
자객을 시켜 없애려고까지 했습니다.
결국 집을 뛰쳐나와 도적의 두목이 된 길동은 활빈당을 조직해
각 지방의 탐관오리들로부터 불의한 재물을 탈취하여
가난한 양민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길동은 관가의 설득으로 높은 자리에도 올랐지만
고국을 떠나 남경(南京)으로 가던 중
율도국에 정착해 그곳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홍길동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조선 중기 ‘허균’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홍길동전』은
신분제도의 문제점과 부패한 정치를 꼬집는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도 홍길동전과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사 ‘입다’가 이스라엘 판 홍길동전의 주인공입니다.

사회적 모순과 부패가 존재했던 홍길동전의 배경처럼 …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되었던 입다의 시대도
평안하고 행복한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미디안의 지배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했던 능력 있는 지도자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잊고 이방 신을 따랐습니다.(삿 8:32~34)

기드온의 뒤를 이어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지도자가 되었지만,
아비멜렉은 자신이 백성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이복 형제 예순 아홉 명을 죽였습니다.(삿 9:5~6) 
하나님의 계획과 상관없이 스스로 왕이 된 사람이 
평화로운 통치를 할 리 없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이스라엘에는 다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삿 9:22~23)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 
사사 돌라와 야일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그들의 시대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돌라와 야일의 시대를 설명하는 성경의 어느 한 구절에도
그 때 이스라엘이 평안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평화를 잃어버렸고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여전히 이방 신들을 섬겼습니다. (삿 10:6)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블레셋과 암몬 자손의 손에 넘기셨고
다시 이방 민족의 지배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시대에 태어난 인물, 입다를
본문 11장 1절 말씀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삿 11:1)

입다는 말 그대로 용사, 힘이 있고 용맹스런 사람이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그는
‘강한 전사(mighty warrior, tough warrior)’였다고 했습니다.
즉, 입다는 어려운 시대에 
희망을 줄만한 능력을 가진 용맹스럽고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입다가 그처럼 대단한 용사였다면
뒤에 이어지는 그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 또한대단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입다가 용사였다는 표현에 이어 성경은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쉬운성경>으로 읽겠습니다. 
“… 입다는 아버지 길르앗이 창녀를 통해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길르앗의 아내는 아들이 여러 명이었는데, 
그 아들들이 어른이 되자 입다를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들이 입다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조금도 가질 수 없다. 
이는 네가 다른 여자의 아들이기 때문이다.”<쉬운성경, 삿 11:1-2>

용사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입다의 배다른 형제들은 입다를 멸시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과 혈통을 잇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결국 입다를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형제들을 피해 집에서 나왔고 
‘돕’이라는 곳에서 천민들, 불량배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삿 11:3)
사사기 11장 3절에는 ‘잡류’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제들을 피해있던 입다에게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였던 장로들이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을 쳐들어 온 암몬 자손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입다 같은 강한 용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이전 사사들이 선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던 시대 …
-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이방신을 섬기던 시대 …
- 이스라엘의 회개조차 하나님께 쉽게 용납되지 않던
그런 어려운 시대에 (삿 10:10~16)
희망으로 떠오른 인물은 그 시대의 아픔을 잘 알고 있는 ‘입다’였습니다.
입다는 가정과 사회의 부조리를 누구보다 절실히 경험했기에
그 시대를 변화시키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입다는 가정에서 버림받아 쫓겨났습니다.
외딴 곳에서 잡류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입다를 민족을 구할 일꾼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입다를 사용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꿈을 꾸며 도전과 변화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합니다.

입다의 믿음

입다는 이스라엘 장로들로부터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을 요청받자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삿 11:9)

쉬운 성경으로 보면 
“…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쉬운성경, 삿 11:9)

더 쉽게 말하면
“내가 기생의 아들이고 형제들에게서 쫓겨났는데
내가 힘이 있다고 해서 아니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그들을 쫓아낸다면 기생의 아들인 내가 
당신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입다는 본래 힘이 세고 뛰어난 용사였습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얼마든지 민족의 리더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기 전에
한 가지를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습니다.
그 전제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시면 …”
“만약 여호와께서 나를 도와 이긴다면 …”이었습니다.
입다가 살았던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죄를 범하며 살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에
가족에게서 쫓겨나 부랑자들과 어울려 살던 입다였지만
입다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일 나를 도와주셔서
그들을 내어 쫓는다면 …’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던 입다
그 입다를 하나님께서 쓰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힘들 때, 어려울 때, 캄캄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십니까?
결정적인 때 하나님을 먼저 찾으십니까?
아니면 어떤 다른 힘을 의존하십니까?

작가로 활동 중인 ‘질 브리스코’라는 사람(Jill Briscoe, 1934~현재) 이
기차를 타고 여행 중일 때였습니다.

여자 아이 하나가 다른 승객들 사이를 오가면서 
승객들에게 말을 걸거나 제 인형을 자랑하더니
책을 읽고 있던 이 분에게도 다가왔습니다.
아이와 몇 마디 말을 나눈 후에
도대체 이 아이가 누구와 함께 기차를 탔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아이가 워낙 붙임성 좋게 
객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누가 아이의 보호자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후 기차가 어두운 터널에 들어섰습니다.
객실 안에 조명이 약하게 켜져 있었지만
갑자기 실내가 어두워진 탓에 무서워진 여자 아이는
열차 가장 뒤쪽에 앉아 있는 한 남자에게 달려가 그의 팔에 안겼습니다. 
객실이 어두워지자 아이는 자기 아버지에게 달려갔던 것입니다.
<질 브리스코, 『여성의 삶을 바꾸는 8가지 선택』
(서울:두란노, 2005), p. 210~214 참조.>

아이는 공포가 밀려왔을 때 자기 아버지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거기가 피할 곳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살다가 캄캄한 어둠을 만났을 때, 
절망이라고 생각할 때 여러분은 누구의 품에 안기십니까?
누구를 찾아가십니까?

우리 인생이 어둡고 긴 터널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때 누구를 신뢰하고 있는가, 누구의 품에 있는가에 따라
우리에게 평안이 있느냐, 평안하지 못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시편 31편에는 시련 가운데 있던 
다윗의 한탄과 부르짖음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시 31:9)

눈물이 앞을 가려 눈이 잘 보이지 않고 …
근심 때문에 육신도, 영혼도 쇠하여질 때 … 
그런 때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 밖에 흐르지 않는 그런 때에 …
육신의 건강이 무너지고
심리적, 정신적으로도 기댈 곳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시 31:14)

“주님은 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저 높고 높은 곳에서 낮고 천한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그렇게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대단한 일을 하고, 정결하게 살고, 
숭고한 사람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주를 의지하기에 … 주는 내 하나님이시기에 …
절망 속에서도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를 내게 넘겨주시리라는 입다의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용사로 
쓰임 받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용사였으니

사람들 중에 ‘나는 뭐 별 볼일 없는데 …’
‘나를 누가 써주겠어. 나는 원래 안되는 사람인데 …’라고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거나 늙거나 상관없이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기회를 주실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소망 가운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평가절하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자기 자식에 대해서도 평가절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쟤가 뭘 하겠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요즘엔 스마트폰의 발달로 
이메일도 스마트폰으로 확인할 수 있고, 
문서 작업도 할 수 있어서인지 
컴퓨터로 작업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눌러 글을 쓸 때면
존재감이 작은 신체 부분이 있습니다.
‘엄지손가락’입니다.(독수리 타법을 사용하는 분은 이해 못하시겠지만)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보면
왼 손 각 손가락으로 쳐야 할 자판이 약 20개 …
오른 손 손가락들이 쳐야 할 자판이 또 20개쯤 됩니다.

그런데 양 손에 있는 두 엄지손가락은 
기다란 스페이스바를 누르는 것 밖에 쓸 일이 없습니다.
자판을 오래 치다가 손이 피곤해 지면 손목도 돌리고
검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네 개의 손가락은 주물러주지만
엄지는 잘 만져주지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엄지손가락은 크게 쓰이지 않습니다.
귀를 파기도 힘들고, 코를 팔수도 없습니다.
짧고 굵어서 반지를 끼어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지문을 찍을 때 외에는 쓸 일이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엄지의 위상이 달라졌습니다.
스마트폰이 사람들 손에 들려지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손가락이 엄지손가락입니다.
전화를 받을 때 엄지로 화면을 만집니다.
문자를 보낼 때도 대부분 엄지로 자판을 누릅니다.
다른 네 손가락은 휴대폰을 받쳐주는 역할만 합니다.
이젠 문자 메시지로 소통하는 세대를 가리켜
‘엄지족’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자기 인생이 엄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쓰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존재감 없이 소외된 인간이라고 자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소외되었던 엄지가 쓰임받는 것처럼
쓰임 받을 기회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입다도 가족들에게 멸시받고 쫓겨났지만 …
후에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한 때는 외딴 곳에서 부랑아들과 어울려 지냈지만
(부랑아: 일정하게 사는 곳이나 하는 일 없이 떠돌아다니는 아이)
훗날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역전 스토리는 우연히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운이 좋아 가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휘하는 장관이 된 입다가
가장 먼저 무엇을 했는지 성경에 보면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성공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삿 11:11)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부름 받아 쓰임받게 된 입다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하나님을 찾아 … 하나님께 기도하며 
모든 어려움과 감사를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는 용사였지만 그는 모든 것의 승패가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에 달려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그런 믿음을 표현하며 살았던 입다였기에 
어려운 시대를 극복할 지도자로 세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 경제적으로 … 도덕적으로 … 
과거 어느 때보다 어려워진 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할 오늘의 사사를 찾고 계십니다.
- 소통과 교감이 사라져 가는 가정을 치료할 사람 …
- 잔인한 범죄가 끊이지 않는 사회를 바로잡을 일꾼 …
- 다투고 분열하는 교회의 상처를 아물게 할 일꾼이 … 
그 일꾼들이 필요한 때입니다.

입다처럼 이 시대의 문제와 아픔을 
삶으로 몸소 겪어 상처를 가진 사람,
그러나 회복과 치유를 기대하며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어렵고 곤란하게 만드는 곳이 특정한 곳이 아닙니다.
그곳이 가정일 수도 … 일터일 수도 있습니다.
학교가 … 혹은 교회가 … 교인들이 … 우리를 낙심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보잘 것 없고 초라한 환경일 수 있습니다.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소통하며 살고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사람에게 길이 열릴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화가 났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읽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방을 들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입지전적인 인물로, 성공한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개천에서 난 마지막 용’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습니다.

왜 그 사람이 마지막입니까?
개천과 같은 환경일지라도, 보잘 것 없는 환경일지라도
하나님과 소통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얼마든지 입다와 같은 기회가 있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 포기하지 마세요.
여러분 자식에 대해서도 포기하면 안됩니다.

상처 받아 보았기 때문에 …
어려움에 눈물 흘리며 살았기 때문에 …
가난하고 어려워서, 서러움에 한숨 쉬어 보았기에 …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쓰실 것입니다.

순간 순간 다가오는 수많은 인생의 문제들에 지면 안됩니다.
입다는 형제들에게 쫓겨났지만 
쫓겨나면서도 하나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어떤 서러움의 시간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소통하며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 어려워도 성장과 훈련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입다를 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여전히 기회를 주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입다를 쓰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소통하고
기대하며 최선을 다하고 
기다리며 성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않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입다의 믿음, 입다의 삶의 자세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승리의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 그래도 하나님과 소통하며 기도하고 
기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고 기다리게 하여 주옵소서.
입다를 써주신 하나님,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을 둘러보아 주시옵소서.
연약합니다. 부족합니다.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의 주인공으로 승리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듣고 고개만 끄덕이고 돌아가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가슴에 새기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연약하지만,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가 용사로 쓰임 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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