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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죽을 죄인입니다 (회개 1) (시 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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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을 죄인입니다 (회개 1) (시 51:1-5)

제자훈련 세미나 중 저녁마다 기도회가 있었는데, 통곡을 하면서 기도하는 목사님들이 여러 분 계셨습니다. 무슨 문제로 그리 기도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애통하여 옆에서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그 목사님들이 복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회개의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원해도 답답하기만 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 구원의 확신과 즐거움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물어보기 바랍니다. ‘자신이 정말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까?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회개한 적이 있었습니까?’ 
회개는 영적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시편 51편은 신구약을 통틀어 회개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성경입니다.
한번 설교로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을 강해하면서 세 번 설교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설교를 준비하면서 참고하는 서적 한권을 여러분에 소개하여 함께 읽었으면 합니다. 마틴 로이드 죤스목사님이 쓰신 [회개]입니다. 이 설교집은 시편 51편에 대한 탁월한 설교입니다. 물론 이 설교집대로 설교하지는 않겠지만, 교우들이 함께 읽으면 설교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 보다도 자신이 지옥에 갈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모릅니다. 
부모에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 남편이나 아내에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 자녀에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릅니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쓴 시인데, 이 시를 쓴 배경은 성경에 나와 있는대로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이 그의 군대가 전쟁터에 나가 있던 어느 날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욕정을 이기지 못하여 왕궁으로 불러 들여 간음하였습니다. 밧세바가 임신을 한 것을 알고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를 예루살렘으로 소환하여 집에 가서 쉬게 해 보지만 우리야는 충신이라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다윗 왕은 편지 한 통을 총 사령관 요압 장군에게 보내, 우리야를 전투 중에 죽은 것처럼 죽게 합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자신의 후처로 삼은 사건입니다.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폐하, 어떤 성읍에 부자가 살았는데, 양과 소가 아주 많았는데, 이웃에 가난하여 어린 암양 한 마리를 자식처럼 돌보던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다가 자기 손님을 대접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러자 나단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요" 
나단의 외침에 다윗이 고꾸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쓴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이런 역겨운 죄를 지었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그 엄청난 죄를 짓고도 어떻게 다윗 자신이 모를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실상입니다. 
우리 자신도 죄를 지었지만 자신은 전혀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984년 4월 광주통합병원에서 회심을 경험할 때, 저는 능력이 많은 목사는 아닐지 몰라도 문제가 많은 목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제가 목사이면서도 하나님과 전혀 친밀한 관계에 있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비로서 제 죄를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성령님께서만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하여 성인이라 추대받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사악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양심이 깨어났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시편 51편에서 성령의 역사로 다윗의 양심이 깨어나 죄를 폭로하는 것을 보는 시입니다. 양심이 깨어나면 누구나 이와 같아집니다. 
어떤 사람은 임종을 맞이할 때 가서야 양심이 깨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양심이 깨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된 것이 아닙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죽은 다음에라도 양심이 반드시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9-31절에 보면 부자가 죽어 지옥에 가서야 자신의 양심이 깨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배에 가득 고기를 잡았을 때, 그는 즉시 주님께 나아가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 보다 먼저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윗은 회개하면서 자신이 하나님께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4절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 고백은 이상해 보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에게, 우리아에게, 전사한 병사들에게, 이스라엘과 백성들에게 범죄한 것이 아닙니까? 이 고백은 다윗이 그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음을 부인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사람들에게 지은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 지은 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4절 ...주님의 눈 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시는 분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죄도 중하고 경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재판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에게 지은 죄도 크지만 하나님께 지은 죄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이 반역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간음한 것은 사실이고 간접 살인이지만 살인한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반역을 했습니까? 다윗은 그렇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란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한 죄라는 것입니다. 
반역죄는 어느 나라나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요, 당장 사형인 죄입니다.

성령으로 깨닫고 보면 모든 죄가 다 하나님께 지은 죄요, 하나님의 왕되심과 주권을 거역한 반역죄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지옥에 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진정으로 회개한 자는 남을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죄인이었는데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다 용서합니다.
남이 무엇이라 지적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인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사람이나 환경을 핑계하며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본성이 날 때부터 악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5절 실로, 나는 죄 중에 태어났고,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부모 때문에, 배우자 때문에, 나쁜 사람들 때문에 환경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자신의 상태와 처지에 대하여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부유한 왕이었고 그의 왕국 또한 넘치는 재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 하나 없애는 데 그 많은 재산. 권력. 지위가 다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훈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 엄청난 죄를 짓고서 하나님께 사랑과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시 51:1 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 2 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

어떻게 보면 뻔뻔해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 모습이 진정한 회개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만을 애타게 찾는 것이 양심의 가책과 진정한 회개가 다른 것임을 알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만 느끼는 사람은 죄를 지었음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갑니다.

어제 탈주범을 체포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도망하고 또 도망다니다가 결국 지쳐서 붙잡혔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심리입니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의 모습니다. 

전도하면 “나는 죄가 많아서 교회에 나갈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지만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은 다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에도 하나님을 애타게 찾으며 “하나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은 대상을 간절히 찾는 것이야말로 회개의 특이한 역설입니다! 

제라드 윌슨 목사님이 [복음에 눈뜨라] 고퉁학교 때 단짝 친구요 학교 교사였던 에릭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어느 해, 그가 학교에서 여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 여학생이 거짓말로 에릭을 고소한 것에 격분하였고, 그의 명예와 위신이 땅에 떨어진 것으로 인하여 그를 위로하고 하나님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그동안 거짓말을 해왔음을 고백했을 때, 모두 (누구보다 그의 아내가 느낀) 충격과 배신감이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은 에릭의 고백입니다.
2008년 1월 18일, 차를 몰고 달리던 한적한 시골 도로는 내게 다메섹 도상이 되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올 만난 것 처럼 나도 그곳에서 주님을 대면한 것이다. 그분의 임재는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생생했다.“너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로운 사람이다!”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생전 처음으로 나라는 인간의 전 존재와 은밀히 감추고 있던 모든 비밀과 두려움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나는 아내에게 그동안의 거짓말과 간통, 음란물 중독올 고백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화목한 가정, 즐거운 교회 생활, 그리스도인 친구들과의 추억으로 요약된다 비교적 순탄한 삶이었음에도, 내게는 이주 어릴 적부터 양심을 마비시키던 고질적인 습관이 하나 있었다. 바로 거짓말이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거짓말은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해 볼 만한 일이리는 주관이 일찍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초둥학교 시절부터 내 인생의 가장 가까운 권위자인 부모님께 거짓말을 했고 자연히 친구와 선생님과 목사님들에게도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은 벌을 모면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는 이주 유용한 수단이었다. 또한 어린 나이부터 음란물을 접했던 탓에 어느새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음란물이 되고 말았다. 

청소년 시기에 친구들이나 가족, 교회 어른들에게 나의 이런 성향을 들키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다. 계속해서 음란물올 탐닉하기 위해서는 그 1급비밀을 신중히 숨기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나는 누구를 해치지 않는 한 이는 결코 잘못이 아니며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라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세뇌시켰다. 

나는 대학에 가서도 여전히 음란물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십자가 복음을 들었고 주님이 나를 용서해 주심을 알았고 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도 어떤 면에서 나는 그런 자유를 원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죄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 뒤 나의 신앙은 성장했고 주님의 뜻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회개하는 일은 내 삶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올 갈망하면서도 육신의 정욕이 주는 일시적 쾌락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여러 면에서 회철한 무덤과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1997년 12월에 브랜디와 결혼한 나는 아내와 새 삶을 꾸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꿈꾸던 삶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결흔식올 올린 지 몇 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들과 1:1로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 받았고 여전히 음란물에 탐닉했다. 수십 년 동안 연마해 온 속임수 덕분에 아내는 내가 정말로 자상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 남편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의 교활한 계략에 철저히 속아 넘어간 것이다. 

저속한 인터넷 채탱과 한밤중의 음란물 시청에 빠져 지내던 나는 급기야 인터넷올 통해 알게 된 어떤 여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말았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공식적인 간통자가 되었다. 몇 방울의 눈물과 지극히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후회, 앞으로는‘바르게’살겠다는 각오가 무색할 만큼 나는 얼마 뒤에 또 불륜올 저질렀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불륜올 저지르고, 안 그러겠다고 다짐하고 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일이 7년이나 계속되었다. 복음에 해결책이 있음을 알았지만 내 눈은 여전히 두꺼운 비늘에 덮여 있었다. 나는 장님이었고 탕자였으며 거역자였다.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2001년 6월 어느 더운 날이었다. 나는 우리 반 여학생 한 명과 인터넷 채팅으로 부적절한 성적 대화를 주고 받다가 성관계를 제안했다. 그것은 내가 사는 텍사스 주에서 중형에 해당하는 범죄였다. 결국 6주 후에 나는 미성년자 성범죄법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거짓말은 멈추지 않았다. 방황하는 여학생을 선도하려 했는데 오히려 나를 유혹했으니, 도리어 피해자는 나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은밀한 성적인 죄가 내 인생을 망가뜨리고 영적인 죽음으로 몰고 있다는 걸 나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청소년 성범죄 처벌법에 따라 10년 동안의 집행유예와 보호관찰 선고를 받았다. 나는 그 정도의 중형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판사들의 의견은 달랐다. 나는 몇 년 동안 피해자의 입장올 고수해 왔으나, 모든 것이 들통 나고 말았다.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거짓말을 한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나는 완전히 기가 꺽여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거짓말로 그 상황을 무마해 버릴까, 성령님이 부드럽게 나를 다그치셨다.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모두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이중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나의 고백을 들은 아내는 망연자실했다. 그 동안의 일을 솔직히 털어놓는 동안 아내의 얼굴에는 걱정과 안도감과 형용할 수 없는 고뇌가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아내는 내 말을 다 들은 후에“당신올 용서할게요.”하고 말해 주었다. 그 자리에서 나를 용서해 준 아내의 사랑은 가히 초인적인 힘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 뒤 아내가 겪은 아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몇 주 동안 나와 아내는 집중적인 상담을 받았다. 그동안 내가 거짓말로 속였던 모든 사람에게 연락해서 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기나긴 과정도 시작되었다. 고백과 회개는 고통스러웠지만 그 만한 보람도 느낄 수 있었다. 하루하루 내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내에게 이중생활을 털어놓은 뒤 이틀이 지난 2010년 1월 18일에 학교로 출근하던 나는 마음 속에서 새로운 생명력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용서와 회개의 의미가 마음 깊이 와 닿았다. 마가복음 1장 15절의“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내 죄에 대한 통회와 새 생명에 대한 기쁨이 가슴 가득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드디어 나는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할렐루야! 

하지만 죄악이 남긴 결과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아내는 조금씩 나를 신뢰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했고 친구와 가족들은 오랜 세월 속아온 나의 이중성을 용서해야만 했다. 아울러 법의 심판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집행유예 선고의 효력이 상실되자 그들은 곧 바로 나를 교도소에 집어넣었다. 

1월의 그 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2년 동안 내 삶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는 왜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한지,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2008년 1월 이후에 옴란물과 섹스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중독 증세가 재발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 변태적인 짓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내면이 변화한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새롭게 하셨고 더 나은 삶을 주신 정도가 아니라, 내 인생 자체를 돌려주셨다. 

주님은 오늘 설교를 통하여 많은 이들이 죄의 길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2011년 제자훈련 세미나 목사님 부부 간음 사실 고백, 충격, 그러나 그 고백으로 치유의 길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는 구원받을 기회를 붙잡았던 것입니다.


죄는 성령님만이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외면하고 합리화하고 눌러 버릴 수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자아에겐 가장 두려운 일이고 싫은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근심을 깨닫고도 외면합니다. 양심의 가책을 눌러버립니다. 
다윗도 양심의 가책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눌려버리니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책망을 듣는 두려운 순간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십니까?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 것과 하나님과 화평함을 누리는 것은 다릅니다.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죄책감은 느끼는데 죄에서 완전히 자유함과 승리를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마음과 삶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시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련이 올 때 주님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기는 하겠지만 응답을 기대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받지 않으실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중심에 회개치 않은 죄가 있으면 그렇습니다.  

어느 성도님의 집에 심방을 갔을 때, 심방받을 준비를 잘 해놓고 있습니다. 생일잔치처럼 음식을 준비하고, 대청소, 도배까지 해 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 마음에‘이 집은 아무 준비를 하지 않았다,’하는 마음을 주신 가정이 있었습니다.   

목회자 모임, 사모님들의 스트레스를 풀자는 기획으로 사모 노래자랑 프로그램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이 사모님의 스트레스가 풀리는 길은 목사님이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여 노래자랑 행사가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죄인임을 깨달아야 진정 회개한 것입니까?
자신이 지옥에 갈 죄인임을 아는 데까지 가야 진짜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이 그러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가 회개한 자입니다.

하디 선교사, 길선주 장로, 그들의 회개가 진실했던 것은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에게 책망하고 비난할 때, 아무 할 말이 없는 자가 회개한 것입니다.
죄 값을 치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회개한 자입니다. 벌받지 않으려고 회개하는 것은 아직 회개가 아닙니다, 
자기 보다 더 악질인 사람이 없음을 알아야 회개한 자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성령님께서 주님과의 사이에 막힌 담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막힌 담은 주님이 허물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허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통성기도는 회개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회개할 것을 깨닫게 해 주실 줄 믿고 기도합시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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