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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최고의 유익입니다 (막 8: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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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최고의 유익입니다 (막 8:35-38)

사람의 평안을 깨트리는 몇 가지가의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들을 잘 살펴보면 결국은 한 가지의 원인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합니다. 그 한 가지란 바로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이것 때문에 내 평안이 깨지고, 욕심 때문에 마음의 평화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 누구도 쉽게 무너지는 우리의 평화를 무너뜨리는 그 욕망들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첫째가 자기 과시의 욕망입니다. 쉬운 말로 자기 자랑입니다. 이상하게도 개인적으로도 자기를 높이려고 하고, 민족적으로도 자기를 높이려고 하고, 국가적으로도 자기과시라는 그 욕망 때문에 세상은 늘 시끄럽고 평안이 없습니다. 둘째로는 소유라고 하는 욕망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넉넉하게 주셨습니다. 

세계 식량문제가 어렵고 자본시장이 어떻고 해도요 하나님이 주신 것만 사이좋게 나누어 사용하면 먹고 쓰고 남습니다. 결국은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고, 필요 없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그 욕망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생을 합니다. 그 욕망이 평화를 깨트려 놓는 것입니다. 또 하는 과잉보호의 욕망이 평안을 깨트립니다. 이것은 이미 가진 것을 지키려고 하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욕심입니다. 

내가 가진 권력과 재산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키려고 애씁니다. 내 안에 들어 온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놓지 않으려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입니다. 숨기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 여기에 피차가 평안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또한 이익에 대한 욕망이 평화를 무너뜨립니다. 무엇에든지 이익을 내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절대로 손해는 볼 수가 없다는 정신이 투철합니다. 

어떤 기업이든지 어떤 국가이든지 이 정신을 높이 살 것입니다. 요즘 갑, 을 논쟁이 한창입니다만 갑은 이익을 위해서 을의 어떠한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이익이라는 한 목적만을 고집합니다. 그런데 지독스럽게 손해 안 보려는 이 마음, 이것이 우리를 이처럼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합니다. 빗나간 애국적인 욕망이 평안을 다 무너뜨립니다. 내 가족을 위하고, 내 민족을 위하고, 내 국가를 위하는 것, 얼핏 생각할 때는 가장 선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빗나간 애국은 세상의 평화를 앗아갑니다. 일본의 아베 총리 내각이 또 다시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으로 우리나라를 괴롭게 합니다. 괜히 중국까지 건드려서 벌집을 쑤셔놓은 듯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일본 사람들이 애국한다고 전 국민이 왜곡된 역사에 발맞춰서 떠들다가 전 세계로부터 국가가, 민족이, 개인이 돌팔매질을 당한다면 결국 이게 애국이냐 이 말입니다. 지나친 애국의 욕망, 이게 문젭니다. 왜곡하지 말고 정도껏 해야 보기 좋은 것입니다. 여기에 벗어나 욕심으로 보이면 추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들을 이기지 못하는 한 개인에게도, 민족에게도, 세상에도 평화는 없습니다. 늘 이 욕망들이 문제입니다. 어쩌면 오늘도 세상은 이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해서 평안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욕망 여기에는 현실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을 가리켜 경제적 동물이라고까지 할 만큼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이 소유욕이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인간의 소유욕이 없어지지 않는 한은 계속 되어질 문제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합당한 소유가 필요합니다. 정당한 것, 유익한 것, 필요한 것을 소유할 줄 아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배웁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 네 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얻는다.” 는 단어와 “잃는다.” 는 말, 그리고 “유익하다.” 는 단어와 “바꾼다.” 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네 단어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상업용어라고 하는 점입니다. 즉 수지타산에 관한 단어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보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때로는 손해보기도합니다. 가끔은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얻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익하다 생각되면 바꾸기도 하지 않습니까? 좀 더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바꿉니다. 

이 모든 행위가 실리추구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반증합니다. 솔직히 오늘도 우리는 주어진 인간관계 속에서 무엇인가를 얻기를 갈망 하고, 주어진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소유하고자하는 지극히 동물적인 욕망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이 너무 커서 이성의 냉철한 판단을 잠재워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누구나 얻으려고 하지만 저마다 다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과연 얼마까지 얻을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얼마까지 얻어야 그만하겠느냐는 것이지요. 욕망의 충족이란 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소유에 욕심을 부립니다. 물질에도 그렇고, 지식에도 그렇고 아무튼 모든 것을 향한 인간의 소유욕은 끝이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경제적 동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냉철한 판단과 이성을 가져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를 얻었다고 생각할 때는 반드시 잃은 것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며,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하는 원리를 이해해야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두 가지 있습니다. 먼저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는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잃어 버렸는가 아니면 얻는 것만 생각하다가 무엇이 빠져나갔는지도 모르게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 저것을 내버리는 지혜가 꼭 필요합니다. 무엇을 얻었느냐와 함께 무엇을 잃는지 알고 잃었느냐 모르고 잃었느냐 이것이 분명해야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어빙]이라고 하는 학자가 역사적인 석학들의 초상화가 걸린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잠깐 잠이 든 사이 꿈을 꾸었습니다. 자기가 아주 화려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썼는데 초상화에서 보았던 역사적인 석학들이 와서는 그의 몸에 걸쳤던 화려한 것들을 하나씩 가져가면서 하는 말이 한결같이 “이것은 내 것이요.” 하면서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지를, 또 어떤 사람은 팬티마저 가져갑니다. 저마다 자기 것이라며 빼앗는 바람에 그는 그만 알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꿈에서 깼습니다. 그는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맞다, 내 지식이라는 게 내 것이 아니로구나, 이것은 이 사람에게, 저것은 저 사람에게 다 빌려오는 것이었구나. 이제껏 남의 것을 입고 마치 내가 대단한 것인 양 자랑했는데,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 앞으로는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 는 깨달음이 오더랍니다. 잃은 것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지혜의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6절)” 아무리 천하가 좋다고 해도 자기 목숨과 바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죽고 난 다음에 천하를 얻은들 무엇 하겠습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유익한 것이 무엇이냐를 추구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더 유익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얻고 대신 해로운 것은 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합리적으로 분명한 가치를 알고 바꾸어야합니다. 멍청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내게 유익한 것은 얻을 것이요, 무익한 것은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이라고 합니다. 목숨과 천하를 바꾸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게 제일입니다. 살아있으니 아름다운 것이요, 살아있을 때에 예쁜 것입니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은 양귀비가 산 추녀만 하겠느냐” 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생명 속에 향기도 있고, 생명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고야 소유도 있고, 생명이 있고야 지식도 있고 명예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생명을 잃으면서 소유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곧 믿음을 말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아니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목숨처럼 붙들고 있는 그 확실한 믿음, 명확한 신앙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인 믿음, 신앙을 위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리며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건강해 지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니면 그때그때 내 믿음과 세상의 무엇을 늘 바꾸면서 편리하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믿음을 손해 보면서까지 세상에 할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에 손해가 된다면 가져 봐도 소용없고 부자가 되어 봐도 소용없습니다. 왜 가난할 때는 교회에 충성하고 믿음도 괜찮았는데 사업이 잘 되고 돈이 좀 벌리니까 교회를 등한시하고 자신도 모르게 교만에 빠지는 겁니까? 목숨과 세상을 바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하신 질문의 응용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셨는데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믿음에 손해 보면서까지 얻은 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세상의 은금보화를 다 가지고도 진실한 마음을 잃어버리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된 존재의미를 상실하고야 그 소유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입니다. 그 지식에, 그 명예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분명한 가치 판단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곧 생명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 없는 행위는 정말 유익한 것을 가치 없는 것과 바꾸는 비합리적이고 불신앙적인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의 것과 생명의 믿음을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게 정말 유익한 것은 생명이요,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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