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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헌신 (요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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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헌신 (요 3:22-30) 
           
인문학의 꽃이라고 부르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디세이아의 내용은 20년 동안 이어진 전쟁에 참여했던 오디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는 모험적인 여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며 경험하는 온갖 모험을 말하며 호메로스는 인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섬을 항해할 때 세이렌의 마녀가 근처를 지나는 배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뱃사람들을 미혹해서 자신들의 섬으로 끌어들여 배를 좌초시킨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대처 방법은 뱃사람들의 귀를 밀납으로 막아서 세이렌의 마녀의 노래를 듣지 않고 배를 몰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디세우스는 항해를 계속하다가 배가 세이렌의 섬에 가까이 가자 선원들의 귀를 밀납으로 막았습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싶었기 때문에 귀를 막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부하들을 시켜 몸과 손발을 단단하게 돛대에 묶게 했습니다. 

그는 부하들에게 당부하기를 자신이 세이렌의 마녀들의 노래를 듣고 몸을 묶은 밧줄을 풀 수 있으니 자신이 밧줄을 풀면 그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붙잡아 더 단단히 묶으라고 명령합니다. 세이렌의 마녀들은 오디세우스의 배가 다가가자 평소에 하던 대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노래를 들은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묶은 밧줄을 풀고 마녀들을 따라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하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오디세우스를 더 단단하게 기둥에 붙잡아 매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들 일행은 무사히 세이렌의 해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녀는 오디세우스 일행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화가 나서 자살해버립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오디세이아의 저자인 호메로스는 인생을 살다보면 인생을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많은 유혹이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의 욕망과 욕심을 중심으로 한 유혹 앞에 설 때 오디세우스의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밧줄을 풀고 마녀를 따라가려 하거든 나를 다시 기둥에 더 단단히 묶으라’는 말입니다. 처음의 결심과 마음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약한 의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짐을 하고 다짐을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욕심은 끝없이 일어나고 순간적으로 다짐이 무너지는 유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약함을 잘 표현한 것이 ‘작심삼일’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요한계시록 2장 4절에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처음의 마음, 처음의 사랑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길은 세상의 온갖 유혹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예수님에게 단단히 묶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줄을 풀어 제치고 유혹을 따라 가는 순간 성숙한 믿음의 자리에 설 수가 없습니다. 말씀의 줄로 단단히 묶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한 번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의 명예과 권력의 유혹이 그를 이끌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줄로 단단히 묶고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간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몇 차례에 걸쳐 말씀을 드린 것처럼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약 400년 만에 나타난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갈급해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의 출현에 환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기 위해 사람들은 광야로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회개하라는 그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회개하며 요단강으로 내려가 세례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면서 상황은 변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따르며 몰려 왔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몰려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세례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서 위기를 느껴 ‘선생님,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당신을 떠나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로 몰려가니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다가는 모든 사람이 예수라는 사람에게로 가고 당신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불안 해 하며 대책을 논하는 제자들에게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 메시야가 가시는 길을 곧게 하는 역할을 하는 광야의 소리라고 말을 했었는데 그것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백성들이 그를 향해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오시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9-30절을 보면 대단한 고백을 합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유대 사회의 결혼 풍습은 신랑의 친구들이 모든 결혼 준비를 다 합니다. 신혼 첫 날 밤을 다 준비 해 두고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신랑이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신랑이 도착했다는 외침을 들으면 친구들은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신랑을 맞아 신부가 있는 신혼 방으로 인도한 후에 친구들은 그 자리를 떠나며 기뻐합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이 주인공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혼식을 준비한 친구들은 신랑에게만 관심이 모아지고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수고한 자신들에게 관심이 모아지지 않는 것을 서운해 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신랑을 맞이하는 친구들의 기쁨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9절 하반 절에 보면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 자신이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떨어지고, 자신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 상황에서도 조금도 서운해 하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니 그 자체를 오히려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헌신자의 모습이고 섬기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처음의 마음을 간직하지 못하고 변질되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 왕으로 세워질 때는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겼습니다. 왕이 된 후에 어느 정도 힘을 얻기 시작하고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그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을 대신해 자신이 제사를 집례 하였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을 무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일로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십니다. 어린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쳐서 죽였습니다. 백성들은 다윗이 어리지만 그를 사랑했습니다. 백성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사울은 그 노래를 듣고 시기와 질투심이 생겨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을 챙겨 나옵니다. 사울은 왕이 될 때의 순수하고 겸손한 처음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마음은 교만해지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의 마음을 끝까지 품으며 산 사람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은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놀라운 사역을 통해 초대교회에서 가장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었지만 말년에 나는 괴수 중의 괴수라고 자신의 약함과 죄인 됨을 고백합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매우 감동적인 고백을 합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처럼 하나님의 사역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낮아지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내가 낮아지고 하나님을 높이는 가운데 믿음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신앙생활이 이어지고 자리를 잡고 활동량이 많아지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 나는 높아지고 하나님은 낮아집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그러나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낮추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낮추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고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브라질에서 가장 큰 교회에 가서 받은 감동을 글로 쓴 것을 읽고 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나이가 사십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을 돕는 부목사님은 나이가 60대 중반을 넘었습니다. 이런 일은 흔치 않는 일입니다. 의아해서 알아보니 나이가 많은 부목사님이 그 교회 담임 목사였습니다. 지금의 담임 목사님은 그 목사님 밑에서 부목사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볼 때 부목사가 큰 인물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유학을 보냈습니다. 공부를 다 마쳤을 때 목사님은 그 젊은 목사님을 교회의 담임 목사로 청빙하였습니다. 교회를 시대에 맞게 힘차게 이끌어 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부목사가 되어 담임 목사가 목회를 잘 할 수 있도록 기꺼이 협력했습니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 보다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위하는 분이셨습니다. 그 모습이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에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세상의 성공의 법칙은 내가 흥하고 너는 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성공의 법칙은 내가 쇠하고 너는 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공의 법칙을 적용하며 살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과 이웃에서도, 교회에서도 인정받고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반면에 낮아지고 섬기는 자리에 서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변화되어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기뻐할 수 있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그러하기를 원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가 지역에서 그리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하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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