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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날에 있을 일들 (사 17: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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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있을 일들 (사 17;4-11)       

오늘 말씀은 <그 날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7절과 9절도 <그 날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날>은 도대체 무슨 날일까요?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이해를 위해 지도 한 장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화면에서 보시는 지도는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을 때의 지도입니다. 위쪽에 초록색 줄이 쳐진 부분이 북왕국 이스라엘입니다. 아래쪽의 파란 줄이 그어진 부분이 남왕국 유다입니다. 그런데 북왕국 위에 보면 붉은 줄로 그어진 <아람>이란 나라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왕국 유다는 늘 북쪽의 이스라엘과 아람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편성하여 남왕국 유다를 침략하곤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남왕국의 백성들은 큰 두려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이사야서 7장 2절을 보면 그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다윗의 후손들이 통치하던 나라였고, 그 수도인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북왕국에는 의로운 왕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반면에 남왕국에는 종종 의로운 왕들이 등장하곤 했습니다. 북왕국에는 엘리야와 엘리사, 아모스 등 극소수의 선지자만 활동했고, 그나마 아모스는 남왕국 출신으로 북왕국에서 잠시 활동한 데 비해, 남왕국에는 많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남왕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했고, 북왕국은 영적으로도 매우 피폐했음을 알게 됩니다. 마치 오늘 대한민국에 많은 교회가 있어 말씀이 풍성한 반면, 북한에는 교회도, 말씀도 메마른 것과 흡사합니다. 우리를 마음껏 예배하고 말씀을 나눌 수 있는 대한민국에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남왕국 유다를 괴롭히던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의 멸망 예고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인 17장 1절을 보십시오.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아멘. 여기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입니다. 다메섹에 관한 경고는 곧 아람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1절은 아람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질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주전 732년 <앗수르>의 <디글랏 벨레셀>왕이 다메섹을 정복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아람은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4절에 오면 북왕국 이스라엘도 멸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4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아멘. 여기 <야곱>이라 표현된 것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살진 몸이 파리해진다는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 멸망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5절을 읽어보실까요?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의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추수하는 사람이 곡식을 모두 베는 것처럼 베어질 것이고, 땅에 떨어진 몇 알의 이삭까지 남김없이 주워가듯 철저히 당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이 말씀은 호세아왕이 다스리던 주전 722년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게 사마리아가 함락 당함으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북왕국의 멸망에 대해 기록한 열왕기하 17장 1절 이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다의 왕 아하스 제십 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 년간 다스리며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올라오니 호세아가 그에게 종이 되어 조공을 드리더니  그가 애굽의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가 배반함을 보고 그를 옥에 감금하여 두고  앗수르 왕이 올라와 그 온 땅에 두루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 그 곳을 삼 년간 에워쌌더라  호세아 제구 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고산 강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결국 <그 날에 있을 첫 번 째 일>은 <멸망>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더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방 나라인 아람만 멸망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멸망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인데, 어떻게 이들도 멸망할 수 있다는 말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죄에 대해 매우 엄격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당신의 백성까지도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악을 미워하시고 책망하시는가 하는 반증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완전한 멸망에까지 이르게 만든 북왕국 이스라엘의 치명적인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핵심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것이었습니다. 1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도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습니다. 방금 읽은 10절에서 <네가 기뻐하는 나무>, <이방의 나무 가지>란 이방의 우상을 말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하나님,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방의 나무 가지를 심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세요.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 자신들이 좋아하는 나무를 심고 울타리를 두르고 애를 썼지만, 그 결과는 농작물이 사라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좋아하여 심은 나무에서는 아무열매도 없었습니다. 기뻐해야 할 추수의 날이 근심과 슬픔의 날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생겨날 때부터 우상의 토대 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나라가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뉠 때, 북왕국의 첫 왕은 본래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이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왕이 된 여로보암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들이 제사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남왕국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백성들을 빼앗길까 염려했습니다. 결국 그는 고민 끝에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하면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북쪽 끝인 <단>과 남쪽 끝인 <벧엘>에 두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이 행위는 여로보암의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화면에서 몇 장면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단으로 가는 이정표>입니다. 그 다음 사진은 <텔 단>이라고 쓴 지명입니다. 그 다음은 <Cultic Site, 제사하던 곳>이라고 쓰인 표지판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경 구절이 적혀 있는 팻말인데, 여로보암이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었다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은 신전에서 제사하던 것을 상상한 그림입니다. 그 다음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단의 금송아지 신전 모습입니다. 그 다음 사진과 그 다음 사진 모두 단의 제사하던 곳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북왕국 이스라엘을 징벌하셔서 무너뜨리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깨닫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안에 설 때 살게 됩니다. 

본문 4절에서 <야곱의 영광>이란 구절이 나오지요? 왜 <이스라엘의 영광>이란 표현 대신에 <야곱의 영광>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야곱을 떠올리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야곱>이 누구입니까?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입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이 나중에 열 두 지파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떤 방법으로 영광을 추구했습니까? 창세기 25장 이후에 계속되는 야곱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떠난 삶>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대조시켜 보여줍니다. 야곱은 처음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이렇습니다. 그는 형님 에서가 장자로서 아버지의 복을 독차지할 것이 못마땅해서 형님의 장자의 권리를 빼앗고자 사냥에서 돌아와 허기진 형님에게 한 그릇을 죽을 주면서 장자의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거래치곤 지나친 불공정거래였습니다. 또 후에 아버지 이삭이 형님을 축복하고자 했을 때, 형님이 사냥하러 나간 틈을 이용하여 자신이 형인 것처럼 위장하여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대신 받는 잔꾀를 썼습니다.  그의 잔꾀는 이것만 아닙니다. 후에 그는 외삼촌 집에서도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외삼촌의 두 딸을 아내로 삼고, 외삼촌의 많은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행위는 그가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의지하여 살았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과연 진정으로 행복했습니까? 이런 식으로 한 결과 형 에서의 마음에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는 결국 형님을 피해 외삼촌의 집으로 도피하게 되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외삼촌의 재산을 편법으로 가로챈 결과 외삼촌과도 원수처럼 되었습니다. 또 후에 가족과 재산을 끌고 외삼촌의 집을 떠난 후 세겜이란 곳에 와서 머무는 동안에 딸 디나가 세겜의 추장에게 겁탈을 당하는 비극이 발생했고, 두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는 복수를 위해 세겜 사람들을 살해함으로써 야곱의 집안에 살인자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엔 그가 그렇게 사랑하던 아내 라헬마저 죽게 되어 길가에 묻고 떠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처럼 그가 사랑하던 것들이 그에게 참 복이 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마저 죽은 줄로 알게 되었을 때, 그 많은 재산도 그를 조금도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의 전반부 인생은 어떻게 살면 거짓 성공 속에서 울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후반부 인생은 어떻습니까? 나중에 야곱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돌아옵니다. 세겜의 사건이 있은 후 그는 벧엘로 올라가 제사를 드리면서 회개하였습니다. 오랜 후에 그가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음을 알고 22년 만에 요셉과 감격적 해후를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노력하여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복이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복은 인간적 수단으로 쟁취하는 게 아닙니다. 본문 4절에서 이스라엘을 야곱이라고 부르면서 <야곱의 영광이 쇠한다>는 말씀은 <너희가 제법 번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참 복이 아니다. 지금 누리는 영광은 조상 야곱처럼 잔꾀로 얻은 가짜 복이다. 이제 그 가짜 영광은 곧 시들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진정한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자기 방법으로 얻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떠난 삶>으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전환되길 원합니다. 

<그 날에 있을 두 번째 일>은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말씀하시는 와중에서 기적적으로 구원받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멸망의 한복판에서도 조금 남겨 후일을 기약하게 하는 분이십니다. 이사야서에는 남겨두시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1장 9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라고 했고, 6장 13절에서는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남겨 두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성경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사람들을 6절에서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 또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너무 높게 있어서 사람들의 손에 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손은 언제나 적당한 높이에 튼실하게 달린 열매로 향합니다. 꼭대기에 있는 것들은 외면을 당합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스타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손과 눈길이 닿는 곳에 있는 열매들은 모두 다 싹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꼭대기에 달려 주목받지 못하던 것들은 남습니다. 

어떤 의미로 오늘날도 구원에 이르는 사람들은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주인공이 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의 장단에 맞추어 죄악의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뛰어난 수단을 의지하여 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장단에 춤을 잘 출 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런 이들의 몫입니다. 마치 홍수 심판 당시에 방주나 만들면서 바보 영감 소리를 들었을 노아와 그의 가족만이 구원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것 때문에 멸시와 오해를 당한다면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부정한 거래와 부끄러운 쾌락의 자리에서 소외당한다면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감람나무 꼭대기에 남아 있는 너 댓 개의 열매와 같습니다. 세상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못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남겨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길 원합니다. 

<그 날에 있어야 할 세 번째 일>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입니다.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우리가 할 일은 창조자이시고 거룩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 제단을 만들지 않습니다. 8절을 보세요.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아멘.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무너진 이유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결코 우상의 제단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제단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제단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반기를 앞두고 <날마다 주님과 함께>란 주제로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졌을 때, 저는 며칠 동안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을 했던 이유는 다이어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반기를 맞이하는 제 마음에 영적 갈급함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몇 가지 일로 인해 영적 피로를 느꼈습니다. 한계도 느꼈습니다. 좀 더 강한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인생과 가정과 교회를 붙들고 계심에 대한 더 분명한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식사를 해야 할 상황이 몇 차례 있었지만, 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제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강화시켜 주셨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땅끝교회 목사로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 외에 승리의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제 마음에 주신 은혜가 우리 교우님 모두에게 넘치길 기원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던 세상의 신들을 위해 차려졌던 제단들을 치워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탄이 내게 오는 것을 환영한다. 내 건강한 믿음을 위해 사탄과의 대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힘으로 사탄과 싸우지는 않는다. 단지 사탄을 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께 소개할 뿐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에게 말씀하신다. "사탄아, 내 종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좋다. 그러나 너와 싸울 상대는 그가 아니라 나 예수다!“라고 하시며 못 자국이 나 있는 손을 내밀어 보이신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인하여 승리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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