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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사 53:3-5, 고전 1: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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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사 53:3-5, 고전 1:22-24) 

낡은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군대에 입대하였습니다. 야간 순찰을 돌게 되었는데 그 날의 암구호가 ‘반지-구슬’이었습니다. 보초가 ‘반지’ 하면 ‘구슬’이라고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군인은 보초가 ‘반지’ 하니까 얼결에 ‘다마’라고 했습니다. 보초는 암호가 틀리니까 총을 쐈습니다. 순찰병은 죽으면서 “구슬이나 다마나”라고 하더랍니다. 

본인의 머릿속에는 같은 것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전혀 다릅니다. 하나는 생명이 있고, 하나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의 차이입니다. 수많은 전도자들이 전하는 내용도 같은 것 같지만 어떤 것은 생명이 있고, 어떤 것은 생명을 잃게 합니다. 복음의 전달은 중요하고도 어렵습니다. 생명을 바르게 전달해야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암호전달 체계는 다양했습니다. 북소리로 전달하기도 하였고, 나팔소리로 전달하기도 하였고, 연을 날려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연을 ‘신호연’이라고 불렀습니다. 전투 시에는 신호와 암호전달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통신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호연의 몸체의 무늬, 그림, 색깔, 문양에 따라 이름도 다르고 암호 내용도 달랐습니다. 
  
말이나 몸동작으로 뜻을 전달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을 거쳐 가다보면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전달이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의 뜻을 잘 보존한다는 것은 그래서 힘듭니다. 똑같은 말을 듣지만 들은 말을 전할 때는 다 다르게 표현되기에 전달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에디슨의 성공을 말할 때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다”라고 합니다. 어떤 이가 에디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 한 것이 맞습니까?” 그 때 에디슨은 “‘나는 1%의 영감이 없으면 99%의 노력이 소용 없소’라고 하였는데 신문에는 1%의 영감의 중요성이 아니라 99%의 노력에 중점을 두어 나를 노력하는 사람으로 미화하여 진실을 잘못 전달한 것이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신문기자의 잘 못된 전달 때문에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디슨의 의도를 잘 못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간절하게 전하고자 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그 외의 어떤 것도 바울의 관심사가 아니며 바울은 전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16에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던 확실한 전달내용과 동시에 확고한 전달열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달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2:15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다음, 다메섹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만났던 그 경험을 간증합니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고 합니다. 바울이 전하려고 했던 것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4:20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보고 들은 것만을 전하려 하고, 보고 들은 것을 반드시 전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본 대로, 들은 대로 십자가를 전합니다. 보고 들은 것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전달 내용입니다. 
  
아도르노(Adorno)는 “그릇된 전달 속에 올바른 삶이란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려고 했던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바른 삶이 있습니다. 이 복음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려고 했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우리도 전하려는 열망으로 충만한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표적도 지혜도 전할 가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2에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가치한 삶을 삽니다. 그들이 최상의 가치라고 믿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인간의 어떤 것도 가치가 아닙니다. 
  
표적과 지혜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입니다. 신기한 표적을 보면 믿을 수 있을 것 같고, 인간의 지혜가 생명을 구하고 승리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인간의 최상의 가치가 전혀 아닙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신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봐야 믿겠다” “보면 믿을 수 있겠다”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본다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베푸셔서 먹여주었지만 먹은 사람들이 말씀 앞에서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2:37에는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표적을 보아도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자인 빌립도 “내 아버지를 보여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유대주의의 두 파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입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주의자이었고, 사두개파는 부활을 부정하는 파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파의 공통점은 표적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표적은 말씀 안에서 실현될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가장 큰 표적을 보아도 못 믿는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구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자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교만한 사람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다고 합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현대인의 가슴에는 하나님은 쫓겨나고 맘몬이 앉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과학이나, 기술이나, 컴퓨터나, 정보가 모든 인간의 과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로봇이 점점 인간을 닮아가서 인간이 하는 것들을 다 할 것 같습니다. 만능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로봇은 인간이 만든 또 다른 인간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을 능가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인간의 지혜는 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런 인간의 지식과 지능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제가 대학 시절에 동양철학을 가르치시던 구본명교수님댁을 방문했습니다.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던 중 교수님이 제가 목사가 되려고 한 사실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왜 기독교 진리가 과학의 보증을 얻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과학의 보증을 얻으면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지”. 신앙이란 과학의 보증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은사는 중요한 복입니다. 그러나 은사 중심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방언이나, 예언이나, 환상을 좇아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여! 보여 주시옵소서”라고만 한다면 건강한 신앙은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인간의 감성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이성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이성 중심의 신앙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과학이나, 논리나, 이성을 좇아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앙이 과학의 보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옳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신비는 필요하지만 신비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이성은 중요하지만 이성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은사중심의 신비주의나 이성중심의 자유주의는 둘 다 인간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 먼 것 같지만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성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마다 생각마다 귀신을 따지는 그릇된 신앙심이 있습니다. 홍콩에 갔을 때 보니 리펄스 베이라는 고급동네 바닷가에 고급 아파트가 있는데 아파트 한 가운데 큰 구멍이 있었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아주 가관입니다. 아파트 공사 중 사고가 났는데 용이 화가 났다고 하여 용이 지나다니는 길을 아파트 한 가운데 뚫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발리에 갔을 때 보니 건축물 고도제한이 15미터라고 합니다. 힌두 신이 야자수 위를 밟고 지나간다고 믿고 있어 야자수 높이 보다 더 높은 건축을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 신들은 신도 아닙니다. 어쩌면 신이 아파트 하나도 못 넘어가고, 신이 야자수를 밟고 야자수 위만 다닙니까? 
  
인간의 표적과 지혜의 수준은 이 정도밖에 안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영적 신적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표적과 지혜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3:19에는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인간의 과학은 결국 어리석은 것이며 자기 꾀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절대 표적을 보고 사람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거의 쇠락한 전도관의 박태선이나 통일교의 문선명도 초기에는 표적을 많이 행했습니다. 성경에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합니다. 
  
사람의 지혜나 과학을 좇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한마디에 인간의 바벨탑은 무너집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많이 쌓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노하시면 살아남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능력이며 지혜인 그리스도는 전할 가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4에는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헬라인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자기 올무이며 자기 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 자체가 능력이며 참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분별력입니다. 
  
인간의 꾀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지식 같은 지식을 얻으려고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인간의 꾀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인간의 꾀는 흩어지지 않고 하나님 같이 높아지려고 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인간의 꾀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 사람들을 흩어지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꾀는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성을 높이 쌓으면 불가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꾀의 결과는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허사입니다. 인간의 꾀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면 이스라엘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귀환하고 회복하고 강성합니다. 인간의 꾀는 스데반을 돌로 치고, 야고보를 참수하고, 사도들의 입을 막으면 복음이 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불같은 속도로 복음은 전파되었고 복음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5에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능력과 그 지혜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박히신 그리스도가 능력이며 지혜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능력도 지혜도 아닙니다. 정치적 패배자이고, 미련하여 올무에 걸린 실패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자체가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며 지혜입니다. 
  
지난 7월 6일, 아시아나 항공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착륙 도중 사고가 났습니다. 조종사 과실인지 기체 결함인지 아직 정확하게 조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날 공항의 착륙유도장치가 꺼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항공기의 여승무원들은 침착하게 승객들을 구출하여 영웅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 항공기는 최첨단기술이 응집된 보잉 777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의 한계입니다. 1998년 3월에 대한항공이 괌에서 추락사고가 났습니다. 그 날에는 항공기의 진입방향과 고도를 알려주는 ‘아웃마커’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기술도 허점투성이입니다. 
  
사람이 기계에 의존하여 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기계가 고장 나면 참사가 발생합니다. 기계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인간의 능력과 지혜가 할 일이 없어집니다. 
  
요즘에 스마트 폰을 보세요. 얼마나 스마트합니까? 저의 전화기에는 전화번호가 1,500개 이상 있습니다. 기계가 잘 알아서 전화번호를 찾아 주고, 전화를 해주니까 전화번호를 기억하는 것은 제 전화번호를 비롯해서 10개정도밖에 안 됩니다. 기계는 스마트한데 내 머리는 스마트 하고는 반대로 변해갑니다. 전화기가 없으면 전화도 못하고, 내비게이션 없으면 길도 못 찾고, 스마트 폰이 없으면 정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어떤 것이니까? 하나님은 전지(옴니 스키엔스), 전능(옴니 포텐스), 전재(옴니 프레젠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이고, 하나님의 지혜는 전지입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에 온전하신 분(wholeness)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의 불과 구름 기둥이 백성들 어디에 있었습니까? 성경에는 백성들 앞에 있었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13장에는 여호와가 앞서 가시며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이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과 구름 기둥이 자리바꿈을 합니다.14장에는 애급 왕 바로의 병거가 백성들 뒤를 쫓아옵니다. 백성들 앞에는 홍해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4:19에는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라고 합니다. 20절에는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저쪽이 이 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급 병사 사이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백성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전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능력이 생깁니다. 십자가와 순교와 어떤 고난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지혜롭게 됩니다. 똑똑해지고 세상을 이기고 가난과 무지와 부패도 사라지게 합니다. 
  
어떤 분이 보내준 자료에 보니 한국은 국민 90%가 국기를 소지한 유일한 나라입니다. 평균 IQ가 세 자리가 넘는 3개국 중 하나입니다. 평균 IQ가 105가 넘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일하는 시간 세계 2위, 노는 시간 세계 3위의 잠 없는 나라입니다. 문맹률 1%미만의 유일한 나라입니다. 버스와 지하철에 노약자 보호석이 있는 5개 나라 중 하나입니다. 여성부가 있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유럽 통계에 의하면 세계여자 미모 1위의 나라입니다. 의술을 빌린 점도 있겠지만 빌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1위입니다. 세계 4대국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우습게 보는 나라입니다. 유대인을 게으름뱅이로 보이게 하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한국기독교는 문맹퇴출에 기여하고, 교육발전이 헌신하였고, 경제성장에 엄청난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해하고, 비난하고, 폄훼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지혜 때문에 똑똑해지고 모든 면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라는 이단이 있습니다. 이 이단은 십자가가 우상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세우는 것을 반대합니다. 십자가를 숭배하는 것이 비성서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십자가를 교회내부에 부착하기 시작한 것은 주후 431년경입니다.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주후 586년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를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우리가 십자가를 숭배합니까? 전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숭배합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십자가의 의미와 능력과 지혜를 약화시킨다는 점입니다. 왜 십자가의 의미를 약화시킵니까? 자기들의 교주가 재림한 메시야라고 하려다 보니 자연히 십자가가 약화되고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메시지 릴레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긴 문장을 여러 사람이 차례로 전달한 후에 더 정확하게 전달한 편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차례로 전달되는 중 그 내용이 변질되어 마지막에는 전혀 다른 말로 전달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미국인들은 ‘러시안 속삭임’이라고 하고, 러시아인들은 ‘아메리칸 메시지’라고 합니다. 이것도 냉전시대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확률론’의 대가인 마르코프는 진위의 절반 이상이 변질된다고 하였습니다. 2천 년이 흘러오는 동안 십자가의 복음은 수없이 변질되고, 왜곡되고, 거짓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전할 복음은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할 것은 표적이나 인간의 지혜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전할 복음의 내용입니다. 십자가가 표적이며,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임을 전하는 우리가 됩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여 참 복음의 뜻을 바르고 확실하게 전하는 전도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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