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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주를 가르치겠느냐? (고전 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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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주를 가르치겠느냐? (고전 2:12-16)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여러 해 전에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용은 물론 잘 모르지만, 크리스마스 하면 성인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이 있기 마련입니다. 신자들에게는 성극이며 노래와 율동 등 성탄 행사에 참여 했던 추억이, 그리고 불신 성인들에게는 교회에서 나눠주는 떡과 과자 등을 얻어먹기 위해 성탄절에 교회에 갔던 추억들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탄절과 함께 또 한 가지 잊어버릴 수 없는 교회의 추억이 있습니다. 곧 여름 성경학교입니다. 

변변한 선풍기 한 대 없는 예배당에서, 거의 온 마을 아이들이 모여들어, 땀을 뻘뻘 흘리며 들었던 성경 동화, 레크리에이션 시간 등은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른들에게는 이제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여름 성경학교가, 오는 26일부터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각급 주일학교에서 수고하는 교사들을 위하여 “누가 주를 가르치겠느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는 중에, 교사들은 물론이고 온 성도들도 큰 은혜와 도전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을 “누가 주를 가르치겠느냐?” “주를 가르치는 교사” 중 어느 것으로 할 것인가 고심을 하다가, “누가 주를 가르치겠느냐?”라는 제목으로 정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가 오해를 할 수 있는 제목들입니다. 왜냐하면 마치 우리가 주님을 가르친다는 말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 40:13-14절에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며,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 하셨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이 광활하고 무한대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도와준 적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의논의 상대가 된 사람이 없습니다. 롬11:34절에도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라고 했습니다. 인간 중 어느 누구도 주님을 가르치기는커녕, 아무리 뛰어난 지혜자라도 결코 예수님의 조언자가 될 수 없습니다. 본문의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라는 말씀은,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께 대하여 가르칠 수 있느냐?”라는 뜻으로 보아야 정확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가르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교사된 사람,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가장 걸리는 성경구절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약 3:1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하신 말씀과 상통합니다. 왜 이러한 경고의 말씀들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자신은 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경고하시기 위함입니다. 복음성가 중에 가장 걸리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 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 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이렇게 부족한 것만 생각하면, 누가 교사가 되고, 누가 목사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들은, 자신의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채찍질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일반 성도들이 지녀야 할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선교사나 목사나 주일학교 교사들을 귀히 여길 줄 알고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딤전 5:17절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저 아프리카나 남미의 오지에 선교사로 보낼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를 목사나 전도사로 주님께 바칠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그럴 마음이 없다면, 선뜻 복음을 위해 주께 헌신한 선교사들이나, 주의 종들은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모든 성도들에게 목사나 선교사들처럼, 복음을 위해서 주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되겠습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는데,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며,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며,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듣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사나 교사들이 귀한 것입니다.

교사의 직분이 어렵고 힘든 것이 사실이긴 하나, 또한 지극히 영광스런 직분인 것도 사실입니다. 고전 12:28-29절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라고 했고, 엡 4:11-12절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으며, 

고전3:6. 8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하였으며, 단 12: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습니다. 이토록 귀하고 영광스런 교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될까요? 누가 다른 사람에게 주님을 가르치겠습니까?

1. 성령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사는 먼저 성령을 받고, 또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어야 합니다. 고전 2:12절에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교육의 3대 목적이 무엇입니까? 

1)당사자의 구원 곧 중생입니다. 

복음 전도나 기독교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단독으로 역사하시기보다는, 말씀과 함께 역사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통하여 열심히 기독교 교육도 하는 것입니다. 

2)중생 후의 영적 성장입니다. 

갓난아이가 태어나면, 젖을 먹이고 우유를 먹여서 잘 길러야 하듯이,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갓난아이와 같아서, 신령한 젖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지런히 양육을 해서 성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믿음이 아름답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일 낮 예배뿐 아니라, 주일 오후 예배도, 수요일 밤 예배도 부지런히 참석해서, 말씀으로 양육을 잘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3)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어린아이가 성장하면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고 효도를 다짐하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주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중생하지도 못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에, 또 중생한 학생들을 성장하도록 양육하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사는 이 시간 무엇보다도 나는 확실히 성령으로 중생하고 거듭난 사람인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성령 받은 확실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고전 12: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유일한 구주이심을 믿습니까? 신구약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까? 복음진리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사는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13절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아주 소중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곧 헬라의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과 변론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당대의 철학자들인 만큼, 사도 바울도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설교로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그러한 설교를 듣고, 그들은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라고 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개종자밖에 얻지 못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때 뼈저린 체험을 하고서, 다음 전도지인 고린도에 가서는 설교방법을 전혀 달리하게 됩니다. 고전2:1-5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사 여러분, 여러분의 조그만 지식을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그 지식을 가르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순수한 복음을 전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그 사실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십시오. 교사 여러분! 천국과 지옥을 가르치는 것은, 절대로 유치한 교육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윤리교육 도덕 교육 백날 천 날 해도,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을 가르치지 않으면, 그 윤리 도덕 교육은 아무런 힘이 없음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칠 때, 어떠한 결과가 나타납니까? 살전 1:5-10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 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여러분의 학생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심비에 각인 시켜서, 늙어도 그 진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민이, 사도 바울 자신에게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빌1:8절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교사들이 가져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1)온유입니다. 

마 11:28-29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2)겸손입니다.

빌 2:5-8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3)사랑과 긍휼입니다.

마 9:35-36절에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 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사들에게는, 반드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 주님의 연민, 주님의 마음, 주님의 심장이 있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 28:19-20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제자’라는 말의 무게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 시대의 학교 제도와, 예수님 당시의 학교 제도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제자’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배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제자’(disciple)라는 말보다는, ‘학생’(student)이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제자는 스승과 함께 살면서, 보고 배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을 ‘도제’(徒弟)라고 하고, 영어로는 ‘disciple’이라고 합니다. 스승과 함께 살면서 그분의 말과 행동을 보고 배워, 스승처럼 되려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준 학생들을, 주님의 제자로 길러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어떻게 제자들을 길러내야 할까요? 

1)모범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언제나 모범적으로 제자들을 훈련시킨 분이었습니다. 주님은 직접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자신이 행한 것처럼 서로 섬기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제자훈련은 모범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특정한 제자훈련 과정만 마치면, 제자훈련이 끝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자훈련은 하나님의 말씀과, 리더의 모범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택하셨을 때, 언제나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며, 모범적으로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와서 “선생님, 제 아이가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빨이 다 썩었어요. 사탕을 먹지 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습니다. 제 아들은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들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말씀 좀 해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간디는 “한 달 후에 데리고 오십시오. 그때 말하지요.”라고 했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놀랍고도 이상했으나, 한 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간디에게 갔습니다. 그랬더니 간디는 또 다시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한 달씩이나 또 기다려야 하나요?”라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습니다. 

간디는 “글쎄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참고 있다가 한 달 후에 또 갔습니다. 그 때에 간디는 “얘야, 지금부터는 몸에 해로우니 사탕을 먹지 마라.”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간디를 매우 존경하는 소년은 “예! 선생님, 앞으로는 절대로 사탕을 먹지 않겠습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소년의 어머니가 간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 말씀 한마디 하시는데 왜 두 달씩이나 걸려야 했나요?” 그러자 간디는 “실은 나도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아들을 보고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할 수 있나요. 내가 사탕을 끊는데 두 달이 걸렸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교사들도 이 간디처럼 모범을 통하여, 자신에게 맡겨준 제자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모범적으로 제자훈련을 시킨 분이었습니다. 행 20:18절에 보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고 했고, 행 20:35절에는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너는 잘해라 하는 식의 제자훈련은, 옆으로밖에 걷지 못하는 게가, 자식들에게는 똑바로 걸으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제자훈련 반드시 모범으로 이루어진다는 평범한 사실을 알고, 먼저 내 자신이 변화되어 주님을 닮아 가도록 해야만 합니다. 

2)희생을 통하여

희생의 모범이 가장 좋은 교육입니다. 교육이란 끝없이 지속되는 희생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한 사회학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과제를 냈습니다. 볼티모어의 유명한 빈민가에 사는 청소년 2백 명의 생활환경을 조사한 뒤, 그들의 미래에 대한 평가서를 내는 일이었습니다. 학생들의 평가는 동일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전혀 미래가 없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25년 후 다른 교수가 이 연구 결과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시 과제를 냈습니다. “25년 전의 청소년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조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망하거나 이사를 간 20명을 뺀 180명 중, 176명이 대단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었고, 변호사, 의사, 사업가 등 상류층 인사들도 많았던 것입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유를 알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학생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한 여선생님 덕분’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그 여교사를 찾아낸 교수가 “도대체 어떤 교육방법을 썼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미 늙어버린 여교사의 대답은 “정말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아이들을 사랑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최근까지 베스트셀러였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에 소개된 일화입니다. 

사랑하는 송정 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각급 주일 학교 교사 여러분!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서 복음을 전하고,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겠습니까?” 먼저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나고 중생한 후에, 성령의 능력으로 전하고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 주님의 연민, 주님의 마음,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전하고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범을 통하여, 희생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서, 금번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를 통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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